P원장은 내과 전문의로서 신도시 메디칼 빌딩에 내과 의원을 개원하였다. 경쟁이 치열하여 의원 경영은 그리 잘 되지 않았고 P원장은 진료하지 않고 노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데 P원장의 의대 동기인 H가 인근에 정신과 의원을 개원하였다. H는 정신과 전문의이지만 이 정신과 의원에서는 비만클리닉을 주로 하였다. P원장은 내분비 내과에서 수련을 받았기 때문에 이 분야에 비교적 지식이 풍부했고 그래서 H원장은 P원장에게 일주일에 이틀은 오후에 나와서 비만클리닉 운영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P원장은 H정신과 의원에 일주일에 두 번씩 나가 진료를 했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H원장은 P원장에게 아예 공동 명의로 클리닉을 개설하자고 하였다. 정신과 전문의와 내과 전문의가 함께 한다고 하면 환자 유치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P원장은 이에 동의하고 의료기관 명의는 그대로 두되 명함이나 환자 홍보용 전단, 병원 내부 안내판 등에는 모두 공동 원장으로 등재하였다. 물론 그 동안에도 자신의 내과의원은 계속 운영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의 의원을 모두 다닌 K씨가 P원장을 의료법 위반으로 고소하였다. K씨는 보건소의 직원으로 P원장이 불법적인 의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터였다. P원장의 행위는 정말 의료법을 위반한 것이었을까?
<윤리적 고찰>
의료법의 위반 여부만을 따지자면 위 사례 역시 위반이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 하는 것은 의료법에서 위 사례와 같은 상황에 대해 규제하고 있는 법률제정의 기본 취지, 특히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취지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의료법에서는 의사가 개설할 수 있는 의료기관의 수를 1개소로 제한하고 있다. 그 취지는 2개소를 개설하여 의사 자
신이 직접 수행할 수 없는 경우 의사가 아닌 사람에 의해 의료기관이 관리 되지 않도록 하려는 데 그 취지가 있다.
위 사례에서 P원장은 자신의 명의로 개설된 의료기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의사의 명의로 된 의료기관에서 직접 의료행위를 하였기에 법을어겼다고 하겠다. 따라서 P원장이 H정신과에 일주일에 두 번씩 나가 진료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법을 어긴 것이며, 공동명의로 클리릭을 개설하는것 역시 위법이며, 법적인 명의는 H원장의 이름으로 하고 실질적으로는 공동원장으로 운영하는 경우에도 역시 위법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의사는 개설할 수 있는 의료기관 수를 단지 1개로제한해야 하는가이다. 분명 여기서의 윤리적인 고려는 의사가 자신의 환자에 대한 충실한 진료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의사가 두 곳의 환자를 동시에 볼 수는 없으므로 어느 한 곳의 환자는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의사를 만날 수 없거나 만약 다른 의사가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의사가 아닌 다른 의사를 만나야 할 것이다. 또한 자신 이외의 다른 의사를 고용하는 데 있어서도 자신을 임시로 대신할 정도의 사람을 고용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질이 낮은 진료가 제공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결국 한 곳의 의료시설에 전념하는 것이 환자에게는 양질의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위와 같은 규정을 마련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우려는 다분히 우리나라 개원의들의 의료관행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학병원과 같은 3차 진료기관이 아닌 한, 의사를 만나기 전에 예약을 하고 가지는 않는다. 내가 언제 방문하든 의사는 진료실에서 환자를 기다리고 있어야 하고, 아픈 환자가 시간을 정해 놓고 발생하는 것은 아니기에 의사는 항상 환자를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대학병원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통념은 적용되지 않는다. 아무리 내가 아프더라도 응급실에 가지 않는 한 아무 때나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약에 의한 진료가 가능한 것은 여러 명의 의사들이 진료를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원의라 하더라도 단 한 명의 의사가 진료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 병원을 운영하는 경우, 의사 개인별로는 예약제로 운영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고, 이런 경우라면 2곳의 병원에 소속되었다 하더라도 예약에 의해 환자를 진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스템의 장점은 서로 다른 지역의 환자들에게 진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환자 입장에서는 다소 불편한 점도 있을 텐데 자신이 원하는 의사를 급하게 만나야 할 때 예약을 거쳐야 하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1차 진료기관마저도 그 운영 조건에 따라 예약제로 운영할 수 있을지 여부는 국민들의 이해와 한국의 의료 시스템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일일 것이다.
결국 위 사례와 관련하여 의사가 단지 한 곳의 병원에만 근무해야 한다는 것은 병원 경영이나 진료가 의사가 아닌 사람에 의해 운영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데 그 취지가 있으므로, 이런 문제점이 없는 한, 의사가 한 곳에서 진료를 하든 두 곳에서 진료를 하든 윤리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하겠다.
끝으로 위 사례와 관련하여 한 가지 제기할 수 있는 의문점은 정신과 의원에서의 P원장의 진료행위가 적법한 것이냐는 점이다. 아무리 비만클리닉을 주로 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이 정신과에서 제공되는 진료인 만큼 정신과 전문의가 담당해야 하는 진료인데 내과 전문의인 P원장이 진료한 것이라면, 이것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적절한 자격을 갖춘 전문의가 진료한 것이 아니어서 자신의 능력 밖의 업무를 적격자인양 담당했기에 환자를 속인 잘못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법률적 고찰>
의료법 제30조 제2항에 따르면,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또는 조산사 등은 1개소의 의료기관 만을 개설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판례는 이 법의 취지에 대하여, ‘의사가 의료행위를 직접 수행할 수 있는 장소적 범위 내에서만 의료기관의 개설을 허용함으로써 의사 아닌 자에 의하여 의료기관이 관리되는 것을 그 개설단계에서 미리 방지하기 위한 데에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대법원 2003. 10. 23. 선고 2003도256 판결)
나아가 판례는 ‘다른 의사의 명의로 개설된 의료기관에서 자신이 직접 의료행위를 하거나 무자격자를 고용하여 자신의 주관 하에 의료행위를 하게 한 경우는 비록 그 개설명의자인 다른 의사가 새로 개설한 의료기관에서 직접 일부 의료행위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미 자신의 명의로 의료기관을 개설한 의사로서는 중복하여 의료기관을 개설한 경우에 해당한다.’고하고 있다.(대법원 1998. 10. 27. 선고 98도2119 판결)
그러므로 P원장의 행위는 의료법 제30조 제2항을 위반한 행위에 해당된다. 반면 판례에 따르면 H원장은 자신의 명의로 개설한 병원의 영업에 따라 발생하는 이익을 얻는 등 위 병원의 경영에 관여한 것에 불과할 뿐이어서 H원장은 의료법 위반이 아니다.(대법원 2003. 10. 23. 선고 2003도256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