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제일 씨름 잘 하는 선수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마산용마고 이윤진 감독. 지도자로써 앞으로의 목표를 묻자 향후 씨름계의 판도를 뒤집는 대형 선수를 길러내고 싶다는 솔직한 바람을 피력했다.
지도자라면 그런 욕심은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볼 터.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교 씨름부 감독으로 제2의 씨름인생을 걷기 시작한 지도 어느새 9년째.
럭키금성과 현대에서 활약하며 80년대 후반 두 차례나 금강장사를 거머쥔 모래판의 악바리. 이윤진 감독을 만나 그의 씨름인생을 들었다.
◇자반뒤집기 명수= 현역시절 이 감독은 뒤집기에 능했다. 뒤집기는 정면뒤집기와 자반뒤집기, 들어뒤집기 등 3가지 기술로 나뉘는 씨름기술의 꽃.
역대 이 기술에 뛰어난 재능을 선보였던 장사 출신은 다수 있다. 그중 털보장사 이승삼 장사가 정면뒤집기에 능했다면 이 감독은 자반뒤집기에 일가견이 있었다.
금강급은 85㎏ 이하의 날래고 민첩한 장사들이 모여 자웅을 겨루던 무대. 조금만 방심해도 여차하면 고꾸라지는 게 바로 금강급이다.
그런 험난한 무대에서 이 감독은 난다 긴다하는 출중한 장사들을 제치고 두차례나 금강장사(제17·25대)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었다. 자기만의 기술로 승부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자반뒤집기 기술이 들어갈 때는 상대방의 겨드랑이 사이에 머리가 빠져나오고 제 다리 샅바를 상대방이 놓지 못하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으로 되치기를 당할 공산이 크거든요.”
이 기술의 핵심은 정확한 타이밍이다. 그런 연유로 아직까지 이 기술을 제대로 소화해내는 선수가 드물다.
그는 이 기술을 은사인 황경수 전 현대 감독으로부터 전수받았다. “선배들과 연습하던 도중 제대로 기술이 들어간 적이 있어요. 그때 ‘아! 이거 제대로 익히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어요. 그때부터 죽으라고 연습을 했었죠.”
그의 자반뒤집기의 특징은 왼쪽으로 기술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때문에 실전에서 그 효과는 배가됐다.
강한 허리 힘과 민첩함이 요구되는 이 기술은 어릴적 밥 먹듯이 무학산을 뛰어다닌 그에게는 가장 자신있게 구사할 수 있는 기술이었던 셈이다.
그는 자신의 기술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만족할 만한 수준은 못된다고. 자연스럽게 익히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게 그의 말이다.
◇금강장사 두 차례 제패= 그의 씨름인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두 차례 금강장사에 올랐을 때이다.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때마다 그는 부모님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렸다.
“저희 집이 보증을 잘못 써서 형편이 썩 좋지 않았어요. 집에서 밥을 먹다보면 부모님은 고기반찬에 손도 안 대시는 거예요.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3남1녀 중 차남인 그가 무학초등학교 5학년 무렵 갑자기 씨름을 하고 싶다고 하자 부모님은 “공부를 해야 한다”며 반대가 심했다.
이로 인해 마산중학교에 특기생으로 입학하고서도 1년간 씨름을 그만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씨름열정을 알고 난 뒤에는 어려운 형편에도 몸에 좋다는 보약을 구해 달이는 등 뒷바라지에 열과 성을 다했다.
“모든 생활 패턴을 저에게 맞추신 분이세요. 그러니 제가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그는 한국체대 2학년인 85년에 프로팀인 럭키금성씨름단에 전격입단하고 나서 계약금으로 받은 돈으로 부모님 집을 사드렸다.
“정말 기뻤어요. 말도 못하게 기분 좋은 그런 기분 있잖아요.”
이 감독은 씨름선수로는 특이하게 레슬링 국가대표 상비군 경력 보유자다. 사연은 이렇다. 고3인 82년 마침 마산에서 전국체전이 개최됐다.
도대표 선발전에서 이 감독은 아깝게 지는 바람에 탈락했다. 그런데 낙담하던 이 감독에게 뜻밖의 제의가 들어왔다. “지금 도체육회 권영민 상근부회장님께서 레슬링을 한번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하시는 거예요. 남은 대회도 없고 재미있겠다 싶어 하겠다고 했었죠.”
그런데 레슬링 입문 두달여 만에 도대표 선발전에서 1위에 오르며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씨름이나 레슬링이나 사람을 잡아서 넘기는 기술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 부분이 많아요. 물론 재미도 있었지만요.”
그리고 전국체전에서 이 감독은 자유형 금, 그레꼬로만형에서 은메달을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지역 레슬링계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발칵 뒤집어졌죠. 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내니 제가 마치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도 들 정도였으니 오죽했겠습니까”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당시를 회상하는 이 감독. 그덕에 그는 씨름에서 레슬링선수로 진로를 급선회, 한국체대로 진학하며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선발됐다.

◇지도자로 새 출발= 하지만 그의 레슬링 인생은 얼마가지 못했다. 체대 진학후 씨름을 향한 열정과 레슬링 선수로의 갈림길에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때 그의 인생 항로를 바로 잡아준 이가 바로 황경수 감독이다. 지도자 연수프로그램 참관 차 체대를 방문한 황감독은 그에게 다시 씨름을 해볼 것을 권유했다.
“매너리즘에 빠졌던 것 같아요. 그런데 황 감독님의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드는 거에요”
이후 이감독은 대학 2학년인 85년 프로씨름단 럭키금성 창단멤버로 전격 입단하며 모래판 복귀를 알렸다.
프로팀에 입단하니 환경이 확 달라졌다. 서울 잠실의 아파트에 숙소를 두고 지방대회에는 비행기로 이동했다.
“첫 봉급이 150만원이었어요. 당시로써는 엄청 많은 금액이었죠. 체대에서 빨래하고 고된 훈련만 하다가 프로에 오니 달라진 환경에 어리둥절했어요.”
다시 돌아온 모래판은 그에게 즐거운 놀이터였다.
1985년 제주도에서 열린 제17회 금강장사 결정전에서 이경학 장사를 3-1로 꺾고 생애 첫 금강장사에 전성기를 열기 시작했다.
이후 고향 마산에서 열린 제25대 금강장사 결정전에서 고향선배인 구봉석 장사를 접전 끝에 3-2로 누르고 두 번째 금강장사 타이틀을 거머쥐며 절정기를 보냈다.
하지만 89년 현대씨름단으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심한 마음고생을 겪었다.
“재계약이 안됐어요. 저보다 못한 선수들도 재계약을 하는데 허탈하고 씁쓸한 마음에 씨름을 포기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런 그를 다시 이끌어 준 이가 황 감독이다. 현대씨름단 창단감독으로 부임한 황 감독은 그를 스카웃하며 끊길 뻔한 씨름인생을 다시 잇게 했다.
“저에게는 평생 은사님이세요. 고비 고비마다 큰 영향을 주셨어요. 이적 후 우승트로피를 못 안겨 드린 게 너무 죄송했어요.”
모교인 마산 용마고에는 지난 2000년에 부임했다. 91년에 은퇴한 이후 그는 개인사업과 프로씨름 심판으로 활동했다. 그런 그에게 고향선배 이승삼 마산씨름단 감독이 모교 씨름부 감독을 맡아볼 것을 권유했다.
“이전부터 생각은 있었는데 여건이 안됐어요. 마침 선배님 권유를 받고 ‘한번 해보자’ 고 시작하게 됐습니다.”
막상 모교로 돌아오니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부원수도 5명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착실히 팀 재건에 나서기 시작했다.
매년 한 차례 이상 전국대회우승을 일궈내며 씨름명가의 자존심을 지켜나갔다.
그의 지도스타일은 간결하다. 부원들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옆에서 조언해주는 것.
“돌이켜 보면 아쉬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때 조금만 더 열심히 했었더라면 하는 생각 있잖아요. 저는 지나와 봐서 알겠는데 지금 아이들이 저처럼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도와주는 게 제 역할이겠죠.”
인터뷰 말미에 그는 가족을 향한 애틋한 사랑을 드러냈다. “바빠서 집안 형광등 하나 달아주지 못했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저에게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사진설명(위 부터)
1, 이윤진이 금강장사에 오른 뒤 황소우승컵을 받은 뒤 꽃가마을 타고 있다.
2, 경기에서 상대를 넘어뜨린 뒤 일어나고 있는 모습.
3, 이윤진 용마고 감독.
◇이윤진 장사 약력
▲출생년도= 1964년 7월 14일 ▲고향= 마산시 자산동 ▲수상경력= 금강장사 17대, 25대 제패 ▲ 현 마산용마고 감독(2000년 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