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월 남벽아래
2011. 6월 남벽아래
2011. 7월 17일 남벽아래
4. 깊이보기. 구상나무의 변화 (2011. 5~7월 중순)
구상나무 숲은 한라산 1,400고지에서 백록담 까지 광활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다. 백록담 절벽 마저 빙 두르고 있는데 특히, 남벽분기점의 구상나무숲이 매우 윤택한 것 같다. 남향이라 나무의 자람세도 좋고 군락지도 넓다. 우리나라에서 구상나무의 가장 너른 군락지가 한라산이며, 세계적인 원조가 이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나무를 구한말 영국 식물학자가 발견하여 영국으로 보낸 것이 크리스마스트리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흥미롭다. 싱그러운 향기만큼 은 빛 솔가지가 신선하다. 올 봄에야 멋지고 특이한 구상나무의 열매를 처음 보게 되었다.
지난 5월 돈네코 코스로 남벽분기점에 이르렀을 때, 이 곳이 너른 구상나무 숲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때는 작은 열매들이 붉으스름하거나 노르스름했고 연둣빛 꽃을 잔뜩 매달고 있었다. 대가족처럼 여러 세대 식구들이 넘쳐났다. 수형의 아래쪽 가지에는 수꽃이, 위쪽엔 암꽃이 달려있어 '자웅동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바람이 매파가 되어 수꽃 속의 송홧가루를 암꽃으로 보내 맺어준다. 세상의 반쪽을 찾아 애쓰지 않아도 이미 한 몸으로 태어난 그들도 서로를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걸 보면 사랑은 기다림이 본질인가 보다.
주말이면 윗세오름 등산을 자주 가는 편이다. 심한 안개 때문에 남벽 쪽으로 갈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그때마다 서운하고 안타까웠다. 윗세오름에서 남벽분기점까지 2.5킬로를 더 가서 돌아오려면 왕복 2시간을 추가해야하므로 총 6시간을 걸어야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듯 발걸음 총총거리며 오월부터 4회 그 곳에 다녀왔다. 앞으로도 구상나무의 사계절을 지켜보려한다. 그 숲의 특정 나무들을 눈 여겨 볼 것이다. 남벽을 배경으로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저들이 산마루를 장식해 주기도 한다. 내가 함께 하늘을 보며 남벽을 병풍삼기도 하고, 산정을 향해 함께 기도 하리라. 계절 따라 다른 분위기로 만나는 것은 멋진 일이 될 것 이다. 나무도 친구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나를 맞아주리라.
지난 달 6월 초부터 오층탑 같은 몸통에 붉은 열매들이 달린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붉은 색, 검은 색, 또는 푸른 색의 삼색 촛대를 꽂고 산정아래를 화려하게 수를 놓고 있었다. 두 팔 벌린 채 하늘을 향하거나 백록담을 향해 경배를 하는 모습이다. 너른 가슴에 잔뜩 촛불꽃불을 태우고 있다면 그 열정은 무얼 향한 것이겠는가. 영산에 경배하고 있지 않은가. 저렇게 매해 이맘 때 쯤 온 산의 가슴이 열정으로 불타오른다. 가족을 위한 기도가 저를 위함이 듯, 영산을 위함이 저를 위함이리라.
7월 중순인 지난 일요일, 구상나무열매들은 다 검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기억 속의 화려한 모습 대신 붉은 색도 검게, 잿빛도 검게 변했다. 연두 색은 녹색으로 짙어졌다. 이렇게 열매들이 변색을 한 것은 안에서 씨가 익었다는 신호라 한다.
이런 변화는 노화인 동시에 씨앗을 남기는 과정일 뿐이라는데 변색된 열매에 마음이 썰렁해진다. 아기 젓을 주고 나면 가슴이 쭈그러들었지만 생명을 키워내 위대하다. 씨앗을 키워낸 열매도 마찬가지다. 유월의 구상나무가 청춘이라면, 7월은 부모가 되어 세상을 알아가는 중년이다. 가을이 되면 노화된 솔방울과도 이별을 맞으리라. 한 자리에서 한 주기 나이테를 그어내면서 만남과 이별 뒤에 침묵으로 삭히는 그들을 지켜보리라. 그리고 권속을 보낸 빈 자리에 눈을 받아내며 봄을 기다릴 그들을 위해서 뜨거운 박수를 보내리라.
첫댓글 대단하십니다. 남들은 평생 몇 번 오를까하는 한라산, 그곳에 뿌리내린 구상나무를 관찰하시겠다니...
기다림의 본질, 그 사랑을 위해 묵묵히 산을 오르는 님의 깊은 마음을 보게 됩니다. ^^
죽기살기 산을 오르며 나에겐 이 길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편이 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