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광복절 아침이 밝아온다. 겨레가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지 66년이 된다. 아직도 일본은 어린 세대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여 가르치고,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하며 한국이 불법 점유하고 있다고 교과서에 싣고 있다. 만주와 한반도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1894년에는 청일전쟁이, 1904년에는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울릉도와 독도에는 러시아 전함을 관측하기 위하여 일본이 불법적으로 세운 망루 터가 지금도 완연하다.
1905년 2월 22일, 일본은 독도를 도둑질하였다. 이 해에 을사 강제 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하였고,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1906년 3월, 영천·포항의 1천여 명의 사람들이 참가하여 의병부대, 산남의진을 창설하여 치열한 항쟁을 벌였다. 총수는 동엄 정환직(鄭煥直, 1844-1907) 선생이고 대장은 그 아드님 단오(丹吾) 용기(鏞基, 1862-1907)였다. 영덕 이북에서는 신돌석 의병부대가 맹활약을 하였다. 영국제 스나이더 연발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하여 의병은 산악 지형을 이용하는 게릴라 전투를 하였고 산중의 사찰들은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1907년에는 전국의 의병이 연합하여 서울 수복 전쟁을 펼쳤다. 이 무렵, 서울에서 동해안을 따라 포항으로 내려온 동엄 선생은 평시 항일전의 근거지가 된 포항시 기계면의 운주산 안국사(安國寺)에서 단오 대장을 비밀리에 만났다. 산남의진이 낙동정맥을 타고 북상하여 서울 수복 전쟁에 합류하는 작전을 의논하기 위함이었다.
얼마 후 일어난 죽장면 입암리 전투에서 단오 대장과 이한구 중군장, 손영각 참모장을 비롯하여 본진의 많은 의병들이 산화하였다. 1907년 9월 1일에 일어난 한국독립운동사상 대혈전이었다. 백발노장 동엄 선생이 아들의 주검을 거두고는 2대 의병장이 되어 항쟁을 계속하다가 동대산에서 체포되어 영천 서세루 아래 남천 가에서 총살되고 말았다. 뒤를 이어 18세기 당대 최고의 여항 시인이었던 농수 최천익(崔天翼, 1712-1779)진사의 방손으로 을미의병을 지휘하기도 하였던 흥해의 선비 농고(農膏) 최세윤(崔世允, 1867-1916) 선생이 영천 거동사(巨洞寺)에서 3대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선생은 장기 용동에서 체포되어 형산강을 건널 때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을 시도 했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나라가 망하자 11일 간의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 일본군은 친일파를 앞세워 의병 항쟁을 돕고 그 근거지가 되는 전국의 사찰들을 폐허로 만들었다. 전각들은 불 지르고 석조물은 부수었다. 산남의진의 항일 전쟁 중에 보현산 비상사, 비학산 법광사, 운주산 안국사가 일본군의 표적이 되어 초토화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