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흥초등학교 교사시절 - 5
✝ 2월 중순이 되어 졸업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정말 2년차 연임하여 담임한 나로선 졸업생에 남다른 애정이 싹터 있었다. 공부방의 글짓기와 주산이며, 옥당문예제의 다수 우수입상이며 생명보험글짓기에 탁월한 입상실적 및 소년조선일보 글짓기 최고상 수상등은 기념비적인 실적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 사. 제. 친의 교사와 학생 부모의 3박자가 딱 들어맞은 보람찬 산물이었고 특히 소아마비 장애를 극복한 김숙의 활동상은 가히 눈부신 것이었다.
졸업생 최고상인 교육감상 수상자후보를 사정하는데 아쉬운 점이 많았음을 고백하고자 한다. 6년간의 제반 수상기록과 성적을 학년마다 1/6 의 차등으로 최근에 비중을 높게 두어 환산률을 적용한 결과 김숙의 결과는 사정권에서 멀리 떠나 있었다. 1~4년 까지의 저조한 실적으론 만회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졸업당일 건의하여 졸업생특별상을 마련하고 장애를 딛고 일어서 모교를 빛내준 김숙에게 특별공로상을 안기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흡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어 졸업 후의 발전상황을 기대하면서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 79년 2월말 사무처리 및 연말정리를 하며 교사로서 심도 있는 주특기 연마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군교원서예전에 입선한 것을 계기로 서예가 연파 김용석 장학사님의 지도를 받기로 하고 광미사 필방에서 23,000 짜리 서예도구 일체를 같이 구입하게 되었다. 김장학사님은 신앙이 깊으면서도 종친사상이 많으시고 학구면에서도 조예가 깊으시어 연우회 고문으로 계시었기에 나에겐 3박자가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분으로 더 없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매일 한글 정자를 연습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비정을 받아보자고 약속을 해 주시는 것이었다. 처음엔 별로 하찮게 시작했으나 그 위력은 대단해서“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경말씀이 적중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서예활동을 생각하면 입지성공의 기초석을 단단히 놓은 셈이 되었다.
✝ 1979. 9월 건축부흥회를 광양읍교회 정영민 목사님을 모시고 시작하게 되었다.
이형재 목사님은 건축준비로 벽돌까지 찍어놓고 타처로 옮기어 가시고 후임으로 백사섭전도사가 초빙되어 오셨다. 백전도사님은 말만 전도사일 뿐 당회장의 몫까지 하는 듯 교회건축 두어군데 경험이 있으신 분이셨다. 그리하여 부흥회 한번에 한 교회가 건축된다는 건축부흥사 정영민 목사님을 물색하여 어렵게 부흥회를 시작한 것이다.
5년전 정전도사님이 계실적 겨울부흥회를 할 즈음 어떻게 폭설이 많이 퍼부었던지 영광읍 도로길이 막혀 옴짝달싹 못하는 판국에 부흥사도 못 오실거라고 단정 짓고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영광읍에서 부흥사님의 전화가 와서 겨우 택시로 모시고와 교우들을 비상 연락하여 부흥회를 시작한 첫 시간이었는데 그 시간 얼마나 혼비백산하도록 꾸중을 들었던지 모두들 어안이 벙벙하였다.
“내가 내려올 적에 꼭 한 가지 안 가져온 것이 억울하다”고 독백하시며 “뭐 이런 곳에서 하나님보고 계시라고 오두막 집만도 못한 명색교회당이 있더란 말이냐?”고 하는 것이었다.
눈이 좀 온다고 부흥사를 위한 기도는 안하고 포기해버리는 믿음 없는 심령을 질책하시며 안 가져온 한 가지는 다름 아닌 묵직한 도끼라는 것이었다. 교회당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자기네들은 고대광실 높은 집에 살고 있는 꼴이란 목불인견 그 자체라는 것이었다.
빨리 이런 교회당이 부서져 없어져야 부흥이 된다는 것이었으니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백전도사님은 부임하면서부터 교회 건축을 서두르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호 계속)
첫댓글 안녕하십니까?선생님..임성님입니다~ 선생님의 글...감명 깊게 읽었습니다~추운 날씨 건강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