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리(恭基里) 문곡삼거리에서 연덕리의 연평을 지나 10km 정도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공기는 주로 고추, 담배, 옥수수 등의 밭농사를 짓고 있는데 마을길이 포장되어 교통은 좋은 편이다. 이곳은 도릉계, 굴앞말, 안공기, 지소덕, 기와집말, 가매실, 장재골 등의 자연 부락이 있으며, 행정 2개 리에 91가구 351명(1992년 기준)이 살고 있다. 공기에는 부모님 묘에서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한 김선배 효자각과 홍우보(洪寓輔)의 처 선성 김씨(宣城金氏)의 열녀각, 서씨 효자각 등 효자, 효부, 열녀각이 많고 웃어른을 받들어 모시는 살기 좋은 고장이므로 '받들 恭'자와 '터 基'자를 써서 '공기리'라는 이름이 생겼다. 공기는 열두 개의 자연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으므로 '12공기'라는 말이 있다.
▣ 무동실(舞童室) 나산이의 북서쪽에 있으며 마을의 진산(鎭山)인 무동산(522.3m)은 아이가 춤을 추는 형상이므로 '무동실'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옛날 지솟덕(紙所垈)에 살던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부친상을 당했는데, 그 아버지가 평소에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생전에 정해둔 묫자리를 파면 큰 너럭 바위가 나올 것이니, 내 시신을 그 바위 위에 거꾸로 묻고 그 대신 봉분을 크게 만들어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상주들이 장사를 지내기 위해 그 자리를 파 보았더니 큰 너럭바위가 나왔다. 그러나 상주들은 아버지를 그 바위에다 그냥 모실 수 없다는 생각에 망치로 돌을 깨어 내니 그 속에서 세 마리의 두꺼비가 기어 나와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때 김씨집안의 어린 손자가 갑자기 춤을 추며 정신이 이상해지고 그 집안의 가세(家勢)도 기울어져 버렸으므로 이때부터 이산을 '무동산'이라 하고 이 마을도 '무동실'이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일제시대 때 철광이 있었으며, 말구리재를 넘어 평창군 시동과 마지리(馬池里)로 가는 길이 있다.
▣ 전씨 효자효부각(孝子孝婦閣) 공기 1리 도릉계와 굴앞말 사이에 있다. 이곳에 사는 전(全)씨 가문에 효자와 효부가 있었는데 평소에도 효성이 지극했을 뿐 아니라, 부모가 죽은 후에도 3년간 시묘를 살았으므로 1924년 6월엣 석비(石碑)와 함께 각(閣)을 세웠다.
▣ 말구리재 무동실의 서북쪽에 있으며 고덕치 아랫마을인 평창군의 다래(달래)로 넘는 고개이다. 고개의 경사가 워낙 심하고 높아서 '말구리재'라고 한다. 말구리는 '말(크다)+구리(골짜기)' 즉, 큰 골짜기를 의미하는 뜻이지 실제로 이곳에서 말이 굴러 떨어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 속새골 무동실 동쪽에 있다. 다년생 풀로 토끼가 잘 먹고, 즐기는 나무, 뿔 등의 기구를 닦는데 쓰이는 속새풀이 많이 자라는 골짜기이므로 '속새골'이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옻물은 차고 약효가 뛰어나서 옻 오른 사람들이 이용하였다.
▣ 기와집말(瓦村) 복지회관과 경찰전적비, 서낭당이 있는 공기 2리의 중심 마을로 예전에 부자인 에안 김씨가 살던 큰 기와집 한 채가 있었으므로 '기와집마을'이라고 불렀다. 이 기와집은 집터가 세다고 소문이 났는데 6.25사변때 폭격 당했으며 그 위치는 현재 2층집 앞이다. 이 마을은 300여년전 숙종 임금때 선성(宣城) 예안(禮安) 김씨들이 경상도 지방에서 이주하여 배판했던 곳이다.
▣ 효자각 공기 2리의 가매실에 있다. 서종기는 부친이 죽자(1884년 4월 20일), 큰 호랑이와 함께 3년 동안이나 극진한 효성으로 시묘살이를 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는 효자각을 세워주었다.
▣ 도릉계(桃陵溪) 공기의 중심 마을로 가매실, 기와집 마을쪽에서 흐르는 냇물과 굴앞 마을의 도랑물이 합치는 곳이므로 '도랑개→도릉계'라 불렀다. 공기초등학교가 있으며 공기 1리와 2리의 경계가 되는 곳이다. 초등학교 건너편에는 도릉계 서낭당이 있다.
▣ 영천(靈泉) 공기초등학교 앞에 있다. 아무리 가물어도 바위 속에서는 항상 차고 맑은 물이 줄지 않고 솟아나는 신비스러운 샘이므로 '영천(靈泉)'이라 한다. 옛날 영천의 너래 바위에다 송아지를 매어 났는데 영천에 살던 큰 메기가 송아지를 잡아먹었으므로 그 바위를 '메기바위굴'이라 한다는 얘기도 있다.
▣ 가매실(釜室) 기와집 마을 윗쪽으로 마을의 지형이 가마솥처럼 생겼으므로 '가마솥마을→가매실'이라고 한다. 마을 앞에는 나무를 하던 연림비알이 있으며 이 마을에는 온천이 날 것이라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 고산골(高山谷) 가매실의 남서쪽에 있으며, 서북쪽에서 뻗어 내린 절개산(節介山 876.1m)과 삼방산의 높은 산 밑에 있으므로 '고산골'이라 한다.
▣ 새터(新基洞) 공기의 가장 북쪽 마을로 삼방산(三芳山, 979.1m)밑에 있다. 화전민(火田民)들이 새로 터를 잡고 생활하던 곳이므로 '새터(新基)'라 했으나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 진등(辰山登) 삼방산 줄기가 길게 뻗어내려 도마치, 상도마치, 하도마치를 형성하였다. 진등의 유래는 새터에서 도마치로 가는 긴 산등성이가 늘어져 있으므로 '긴등→진등' 또는 '산등마을'이라고 하였다.
'긴'이 '진'으로 발음되는 것은 기름이 지름이 되듯 이 고장 방언의 일종이다. 옛날에는 공기 사람들이 진등과 도마치를 넘고 평창읍 샘골(泉洞里)과 종부리(鍾阜里)의 음지말을 지나 평창장(平昌場)까지 걸어서 다녔는데 30리 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 삼방산(三芳山) 북면 공기리와 마차리의 주산(主山)이다. 태백산맥이 서쪽으로 뻗어내려 남한강 발원지인 진부면 우통수를 형성하고 대관령에서 나누어진 산맥은 남쪽으로 흘러내려 평창의 두만산(斗滿山)을 거쳐 삼봉산(979.1m)과 영월의 주봉(主峰)인 삼각산으로 그 맥이 이어졌다.
▣ 도마치(都馬峙) 공기 새터의 진등에서 평창읍 천동(샘골)으로 넘는 고개로 웃도마치(웃둠)와 아래도마치(아랫둠)가 있다. 도마치고개는 영월과 평창의 경계를 이루는데 예전에는 이 재를 넘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이용이 불가능하다. '도마치'는 삼방산의 높은 등성이에 위치한 고개로 큰 언덕을 의미하는 '둠이→두무→두메→도마'로 변형되어서 만들어진 지명이다. 이 고개 정상에는 기와집마을에 살던 김휘수 씨가 사비를 들여 평창으로 가는 길을 닦은 공덕을 기리기 위한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 장자골(長子谷) 삼방산 계곡의 넓은 들녘으로 새터 뒤에 있는데, 예전에 큰 부자가 살던 곳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이곳은 산골 마을이므로 큰 부자가 살았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장자골은 작은 산촌 마을인 '잔자골이→잔잣골→장자골'로 변했으며 '잔'은 '작았다'는 뜻이다. 장재골에서 어둔골을 지나 굴앞 마을까지는 91년에 산림 도로가 개통되었다.
▣ 곧은골(直谷) 굴앞 마을에서 평창군 미탄면(美灘面) 안말을 지나 율치리(栗峙里)로 가는 길이다. 골짜기 모양이 곧바른 지형이므로 '곧은골'이라고 부른다.
▣ 어둔골 삼방산 밑으로 계곡이 깊고 높은 산으로 가로막혀 있다. 일조시간이 짧고 해가 일찍 지기 때문에 '어둔골' 또는 어두 탈락 현상으로 '둔골'이라고 한다.
▣ 물푸레골 곧은골을 지나서 있다. 공기 사람들이 이곳에서 농기구 자루를 만드는 물푸레 나무를 많이 해갔으므로 붙은 이름으로, 미탄면 안말로 가는 길이 있었다.
▣ 애막골 어둔골과 곧은골 사이에 있다. 예전에 화전민들이 싸리나무, 수숫대 등으로 외를 엮은 움막을 짓고 살았다하여 '외막골'이라 했는데 음운의 강화 현상으로 '외막골'이 '애막골'로 변하였다. 애막골에는 높이 솟은 큰 바위가 있는데 엣날에 신선이 놀고 갔다고 하여 '신선바우'라 한다.
▣ 굴앞마을(窟前洞) 공기 1리로 마을의 큰 암벽속에 맑은 물과 석굴이 있으므로 '굴앞마을'이라 한다. 이 굴을 막으면 흉년이 들고 막지 않으면 마을에 언청이가 난다는 말들이 전해지고 있다. 두개의 굴이 있으며 박쥐가 많아서 어린이들은 여름 한철 솔가지불을 이용하여 박쥐를 많이 잡았으나 지금은 철문으로 막았다.
▣ 안공기 굴앞 마을의 동남쪽으로 지솟덕과 공기산성 밑에 있는 마을인데 공기 안자락에 있으므로 '안공기'라 한다. 까치골과 지솟덕을 지나면 마차리의 솔치로 갈 수 있으며, 예전에는 이 고개를 넘어 마차장으로 다녔다. 안공기 입구에 있는 서낭당, 뒤에는 개박달나무가 있는데 정월 초사흘에는 안공기 사람들이 10월 초하루에는 굴앞말 사람들이 이 곳에서 각기 다른날 고사를 지내는데 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에 간단한 고사를 올리고 그후 서낭당에 당고사를 올린다.
▣ 까치골 안공기 남쪽에 있는 사양진 마을로, 논두렁 옆 큰 미루나무에 까치집이 있었으므로 '까치골'이라고 불렀다.
▣ 지솟덕(紙所垈) 안공기 남쪽으로 마차 6리인 윗솔치와 경계 지점인 언덕위에 있다. 지소덕은 산상분지(山上盆地)로 예전부터 닥나무로 우리 전통의 한지(韓紙)를 만드는 지소(紙所)가 있었으므로 '지소덕→지솟덕'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산상(山上) 분지로 수질이 좋고 물이 풍부하여 한지를 만드는 장소로는 적격이다. 한지는 조선종이라고도 부르는데, 닥나무를 가마에다 푹 삶아 껍질을 벗겨서 말린 다음, 다시 냇물에 불려 하얀 속껍질을 양잿물과 닥풀뿌리를 풀고 발에다 걸러서 종이를 떠낸다. 지솟덕에는 여러 가구가 살았으나 10여년 전에 폐촌이 되었으며 지솟덕 밑에는 복구밑이라는 마을이 있다.
▣ 공기산성(恭基山城) 공기에서 마차리의 솔치로 넘어가는 중간에 있다. 현재는 약 2km 정도의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축조방법은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흙을 이용하여 일정한 높이로 쌓아올린 『보축법』을 이용했고, 북쪽인 평창을 향하여 축조하였는데,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성안'이라고 부르고 있다.
공기산성은 고려 고종(1217년)때 거란족(契丹族)이 침략하여 철원, 양양, 명주, 진부, 도암리, 평창을 거쳐 영월과 주천, 원주로 침략할 때 축조된 성으로 그들은 결국 제천부근에서 감취려 장군에게 격파되어 대관령을 넘고 강릉과 양양을 거쳐 북쪽으로 달아났다. 일설에는 영월 흥교사의 승려였던 궁예가 원주 양길의 부하가 되어 892년 영월, 주천, 평창, 진부를 점령할 때 축성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 선성(宣城)김씨 열녀각 공기 기와집말 입구에 홍우보(洪寓輔)의 처 선성(예안 禮安) 김씨의 정여각이 있다. 조선 숙종 임금때 두 사람은 결혼을 하였는데, 첫날밤 홍우보는 신부의 족도리를 벗기다가 밖으로 나간 후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신부가 밖으로 나가보니 큰 호랑이가 신랑을 물고 빼골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신부는 남편의 시신을 찾아 장사를 지낸 후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고 평생을 수절하며 남편의 제사를 잘 모셨다.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지자 281년 전인 1718년(숙종 44) 2월에 숙종 임금은 열녀정여문을 내렸다.
『烈女 學生 洪寓輔妻 儒人 宣城金氏之門 上之 四十四年 二月 命旅』 열녀각의 원 위치는 신부 선성 김씨가 호랑이로부터 시신을 빼앗아온 '빼골'에 있었으나 약 50년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정여문은 소실되고 지금은 표지석과 열녀각이 남아있다. 홍씨들은 이곳에서 모두 떠나고 지금은 선성(宣城) 김씨인 김영수(金瑛守)씨가 관리하고 있다. 일부 책과 안내판에는 의령(宜寧) 또는 의성(宜城)으로 표기되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