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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 시대 (1907-1921)
1) 최초의 복음전도판 설립
2) 동양선교회의 한국선교와 성서학원 설립
2.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시대(1921-1943)
1) 교회조직과 행정구조
2) 교회발전 시대(1929-l93f
3) 교회의 수난과 해산(1937-1945)
3.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시대(1945-현재)
1) 해방과 교회의 재건(1945-1950)
2) 6.25사변과 교회의 재수난(1950-1953)
3) 환도와 교회발전(1953-1959)
4) 교단 분열 (1960-1965)
5) 합동운동과 교회성장 (1965-l9Ff
6) 성결의 빛을 아시아에 (1977-1986)
7) 세계속의 성결교회 (1987-1998 현재)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역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국난의 시대에 우리민족에게 허락하신 성결한 누룩덩이의 역할을 맡기신 교단이다. 우리교단의 성장과 발전과정속에서 민족과 역사를 변화시켜 가는 과정을 살펴 보면서, 자랑스런 성결교회의 일원임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1.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 시대 (1907-1921)
1) 최초의 복음전도판 설립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일찍이 한국인 정빈(鄭彬)과 김상준(金相濬)이 일본동경에 있는 동양선교회 소속 '백목(栢木) 성서학원'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일본에 있는 동양선교회의 도움으로 서을 종로에 있는 어는 셋집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란 간판을 1907년 5월 30일에 붙임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들은 일본 모교에서 배운 동양선교회와 같은 방법으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외치는 노방전도를 열심히 했고, 이 전도설교에 감동받은 자들에게는 주일에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에 열심히 다니라고 권면했다.
두 전도자들의 불을 토하는 듯한 구령열(救靈熱)에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이 죄를 통회자복 하였다. 미지근한 신자들이 이 전도관의 집회에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고 구원의 확신을 얻어, 찬송할 때는 기쁨의 박수가 저절로 터져나왔고, 기도 할 때는 우뢰소리같은 통성기도가 쏟아졌으며, 집회가 끝난 후에는, 기쁨이 충만하여 덩실 덩실 춤을 추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소문이 널리 퍼져나아가 복음전도관의 정기 집회시에는 언제나 초만원이었으며, 이 집회에 참석하는 자마다 성령이 충만함을 받아 집회 후에는 거리에 나서서 담대히 노방전도와 축호전도에 진력하는 등, 초대 예루살렘교회와 같이 선교지 향적 인 단체 였다.
2) 동양선교회의 한국선교와 성서학원 설립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는 미국인 카우만(C. E. Cowman)과 그의 친구 길보른(E.A Kilbourne)은 1901년 일본 동경에서 설립된 선교단체인데 동양선교를 목적으로 세운 순수한 선교단체였다. 그들은 본래 미국 감리교회 신자였으나 중생과 성결의 체험을 한 후 복음을 동양에 전하고 싶은 뜨거운 사면에 불타 시카고의 무디신학교를 졸업한 후 선교사로 안수받았다. 카우만은 1901년에 일본 동경으로 건너와 셋방을 얻고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간판을 걸고 부인과 함께 노방전도에 나섰다. 이듬 해 친구 길보른을 불러 선교사업을 확장하고, 전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성서학원을 개설하였는데, 1905년에 한국인 정빈, 김상준 두 청년이 이 학교에 입학함으로써 연결이 되어 마침내 동안선교회는 한국성결교회를 잉태 시킨 모체가 되었다.
동양선교회는 복음의 제자인 정 빈, 김상준이 한국에서 설립한 복음전도관과 전도활동을 후원하고 지도해주었고, 카우만 총재는 마침내 전도활동을 보다 구체화시키기 위하여 1910년에 토마스(John Thomas)선교사를 한국 전도관의 감독으로 파송함으로서 동양선교회가 한국 선교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초대감독이었던 토마스 목사는 한국에 와서 정빈 김상준 전도사와 함께 복음전도관에서 일하면서, 전도의 활성화를 위해서 1911년 3월 13일에 복음전도관 안에 임시로 '경성성서학원'을 설립, 원장 토마스 목사, 교수 정빈, 통역 이장하 교수진을 구성한후, 1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하고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성서학원 졸업생이나 재학 생들은 불타는 사명감을 이기지 못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므로 많은 전도판이 탄생되어, 1921년에 이르기까지 경향각지에 33개소의 전도관이 설립되는 큰 역사가 일어났다.
2.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시대(1921-1943)
1) 교회조직과 행정구조
초기의 복음전도관은 교회가 아닌 전도관이라는 이름때문에 같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백안시 되고 이단시 되었다. 그리하여 교세확장과 발전에 이름이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1921년 9월에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고 바꿈으로써 이 땅에 성결교회라는 새로운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1925년에 '교리와 조례'를 제정하고 공포하였는데, 교리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해 나타난 복음의 진리와 요한 웨슬레의 성서해석에 의하여 ① 하나님 ② 예수 그리스도 ③ 성신 ④ 성경 ⑤ 원죄 ⑥ 자유의지 ⑦ 침의 ③ 성결 ⑨ 칭의후의 범죄 ⑩교회 ⑪성례 ⑫세례 ⑬성찬 ⑭신유 ⑮재림운명 등16개 항목으로 된 것으로 이 교리선언이야말로 성결교회의 모습을 세상에 천명한 것이었다.
1921년부터 제3대 총리로 부임한 길보른(E.4.Kilboume)선교사는 발전을 위하여 본부에 고 문회를 두고 한국인이 감독의 행정에 자문하도록 하였으나 1924년 길보른 총리가 미국으로 귀국함에 따라 감독제와 고문제도를 폐지하고 이사회를 조직하여 행정을 관장함으로서 최초 의 의회제도가 시작되었다. 1929년 2월 27일에는 목사 19인을 정회원, 안수받지 못한 남전도사 48인을 준회원으로 하여 성결교회 제1회 연회가 소집되었으니 이 연회를 통해 교회법이 제정되었고 중앙사무국이 설치되었으며, 주목할 것은 각 교회의 남자집사대표 1인으로 평신 도회를 조직함으로써 교역자 중심체제에서 평신도와의 공동협력체제로의 바람직한 전환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총회(總會)를 조직하자는 건의가 대두되어 1933년 4월 11일 오후2시에 경성성서학 원 강당에서 역사적인 제1회 총회가 개회되어, 이명직목사를 회장에 선출함으로서, 한국인에 의해 시작된 본 교단은 마침내 26년만에 한국인에 의해 자치적 교단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임원을 비롯한 각 부 부장이 선출되었고, 성결교회규칙(헌법)을 통과시켰으며, 각 부에서 상정한 많은 안건을 찬반토의를 통해 처리하는 등 의회제도가 점차 확립되어 갔다.
2) 교회발전 시대(1929-l93f
제 1회 총회장으로 피선된 이명직목사가 개회사를 통해 "조선에 1천교회를 목적하고 돌진 하는것이 이번 총회의 목적이라"고 밝혔듯이, 이 자치 선언 이후 1년만에 개척 신설된 교회가 50교회, 신 세례인이 2천명이었으며, 구도자가 1만 5천명에 달하였고, 신축한 교회당이 13교회, 주일학생이 3천여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교세가 크게 발전된 원인을 크게 세가지 측면에서 살펴본다.
① 자급자치 (自給自治)
그동안 모든 교역자의 생활비는 중앙의 감독이나 이사회로부터 매달 지급 받았는데, 이것은 동양선교회에서 외국의 후원자들로부터 거두어들인 것이다. 제1회 연회의 평신도회에서 월정헌금을 거두고 교역자의 봉급은 개교회가 담당한다는 비장한 결의를 함으로써 지교회는 자립정신이 싹트기 시작하였는데, 이 희생적인 정신자세야말로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② 활발한 문서운동
당시 한국의 문서활동은 극히 미약하였으나 본 교단은 문서선교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총회산하에 출판부를 두고 각종 신앙서적을 인쇄보급하여 교단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1910년에 한국 최초로 출판한 '부표성경'(附標聖經)과 1911년에 출판된 복음가, 1919년에 증보개정한 '신정복음가', 그리고 1930년에 대폭증보한 '부흥성가'를 발행하여 은혜로운 성경과 찬송을 통해 성도들의 심령을 변화시켰다. 1922년에 창간된 월간지 활천(活泉)은 생명의 양식과 생수가 되어 성도들의 신앙을 성장시켰으며, 성서신학 교수들의 성서강해집, 신학연구집, 전도문서집, 설교집, 교회교육을 위한 주일학교 독본 등 30여가지의 단행본이 쏟아져 나와 평신도와 교역자들의 자질 향상과 승리로운 은혜생활을 이룩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하였다.
③ 뜨거운 전도활동의 확산
총회에서는 도시전도대와 농촌축호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을 누빔으로써 전도에 열심하였고 열심있는 전도자들로 구성된 '전국순회전도대'가 조직되어 악대와 대형트럭에 프랑카드를 걸고 전국 대도시를 순회하며 며칠씩 대형천막을 치고 대대적 전도활동을 하였는데 그 효과가 커서 집회 한곳에는 반드시 교회가 개척되었다. 국내 뿐 아니라 동포들이 살고 있는 만주, 중국, 일본 등지에까지 전도의 열정이 미쳐, 1925년 3월에 성결교회는 이정원전도사를 동만주 선교사로 파송함을 계기로 만주의 용정, 할빈, 봉천, 목단강, 심양, 만주 등지에. 우리 교회가 설립되었고 , 1927년 3월에는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한 윤락영목사에 의해 동경성결교 회가 창립되었고, 이어 오사까, 히로시마 등지에 성결교회가 설립되어 해외동포들을 찾아 목 회하였다.
3) 교회의 수난과 해산(1937-1945)
19세기말부터 일본의 대륙침략의 야심이 마침내 한국을 발판으로 시작되어 1910년에는 한일합방을 성취시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일제에 도전해 오는 가장 무서운 세력이 한국의 기독교인 것을 간파한 일본은 소위 신민회사건, 105인사건 등을 조작하여 기독교인을 무수히 탄압하였고, 민족자결을 외친 3.1운동을 주동한 기독교인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말기에 일제는 한국기독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처음에는 토두 우상숭배라고 거절하였으나,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이다"라고 회유하였고, 총칼의 위협속에서 모든 교파에서는 강제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우리 성결교회에서도 참배하지 않으면 교회를 폐쇄시킨다는 그들의 위협에 신사참배를 종교 의식이든지, 국가의식이든지 각자의 신앙양심에 맡기기로 했으나 철원교회 박봉진목사 같은 분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모진 매와 고문에 못이겨 1944년 8월 15일에 순교했다.
또한 우리교회의 사중복음중 재림의 교리는 성결교회의 강단에서 설교를 자주하는 편이었다. 일제가 이 재림사상을 트집잡아 일본천황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사상으로 일본국시에 위배된다고 판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1943년 5월 24일에 전국성결교회의 교역자와 평신도지도자 300여 명을 일제히 검거하여 모진 심문과 고문 등으로 괴롭혔다.
뿐만 아니라 1942년 12월에는 기관지 '활천'을 강제 폐간시켰고, 1943년에는 교단신학교인 '경성신학교'를 페쇄시키고, 1943년 9월떼는 성결교회 예배중지령, 마침내 12월 29일에는 성결교단을 강제 폐쇄시켰다. 물론 이렇게 급속도로 박해가 악화된 것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우리의 지도자들이 재림신앙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한국교회의 첫 제물이 된 성결교회는 일제 말기에 이 땅에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교역자들은 옥중에 있고, 신자들은 다른 교파로 옮겨 갔으며 교회당은 각종 공장 등으로 강제 매매되고 말았다. 일제 하의 한국성결교회는 민족의 고난과 함께한 순교자적 교회었다.
3.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시대(1945-현재)
1) 해방과 교회의 재건(1945-1950)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써 36년간 일제에 의해 억눌림을 당한 한국민족에게는 해방의 감격이 찾아왔다. 가장 모진 시련을 당했던 성결교회는 누구보다도 감격이 벅찼다. 그리하여 성결교회 재흥준비위원회(위원장 박현명목사)를 발족하여 1945년 11월 9일에 경성신학교 강당에서 성결교회 재흥총회를 개최하였는데, 흩어졌던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이 모여 서로 얼싸안았으며 이 날 개회식장에서는 찬송가와 함께 애국가를 눈물로 부르는 감격스런 총회였다.
이 날 총회는 교단의 명칭을 '기독교조선성결교회'라고 개칭하였다가 그 후 1948년 8월 15일 국가가 건국되면서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확정되었으므로, 1949년 제 4회 총회에서 교단명칭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에 의해 강매되었던 교회당을 다시 찾는 일에 노력했으며, 폐교된 신학교와 활천도 복간하였다. 또한 재흥총회에서는 성결교회의 새로운 전기를 이룩할 헌법전면개정을 착수했고, 성결교회의 생활강령과 지도원리, 우리 교회의 사명, 성경의 권위, 생활규범 등을 천명함으로 완전 의회제도를 확립했다.
2) 6.25사변과 교회의 재수난(1950-1953)
해방을 맞아 민족의 자유는 얻었지만 연합군은 38선을 그어 남과 북이 갈라졌다. 남한은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대한민국이 수렵되자 미군이 전면 철수해버린 남한 땅에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불시에 남침을 감행하여 일시에 서울을 빼앗기고, 계속 남하하여 부산에 임시수도를 설치, 경상남북도의 일부만이 남아 위기일발의 전황이었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맥아더 장군이 이끈 유엔군과 국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탈환하였다. 3년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한국사회는 목불인견의 참상과 막 대한 피해를 입었고, 성결교회는 불타버린 교회가 27교회, 무너진 교회가 79교회였고, 순교 한 교직자가 20여 명, 행방불명된 교직자가 20여 명에 이르는 큰 손실을 입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부산으로 피난하였으나 서울에 남아 교회와 신학교를 지키고 있던 당시 총회장 박현명목사, 이 건 교장, 박형규 교단총무, 김유연 교수, 최석모 교수, 유세근 목 사 등 실로 교단의 중추인물들이 체포되어 북으로 납치당했고, 전남 도서지방의 전도 어머 니였던 문준경 전도사는 모래사장에서 학살당하였고, 전남 임자도의 진리교회 이판일 장로 의 일가족 13명을 포함한 성도 48명과 전북 정읍 두암리교회 김용은 목사의 일가 23명, 충 남 논산 병촌교회 성도 66명이 집단학살, 순교를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3) 환도와 교회발전(1953-1959)
피난지 부산에서 피난 서울신학교가 어려움중에 개교하여 전도자들을 계속 양성하였고 1953년 수도가 서울에 환도함에 따라 신학교도 복귀하였으나 전쟁직후라 경제적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일제 때 철수했던 동양선교회(OMS)가 6.25사변으로 시련을 당하고 있는 한 국민과 성결교회를 위하여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부산 피난지에서 신학교와 교역자들 을 구호 품으로 도왔으며 환도 후에도 파괴된 교회당 복구사업과 구호사업으로 교회발전에 끼친 공로가 혁혁하였다. 1957년 5월 30일은 성결교회가 창립된 지 만 50주년이 되는 뜻깊 은 날이다. 그리하여 전후의 어려움 속에서도 희년 기념사업을 하기 위하여 준비위원회를 1954년에 조직하고 총력을 기울인 결과 몇 가지 기념사업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복음의 발 상지인 무교동교회 대지에 2층으로 희년기념관이 설립되었고, 또한 기념출판도서를 발행하 였으며, 희년 기념전도대 대장에 부흥사 이성봉 목사를 선임하여 전국 순회전도를 통하여 교세가 확장되어갔다.
4) 교단 분열 (1960-1965)
우리 성결교회는 60년대에 이르러 연합기관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N.C.C(기독교 연합회)와N.A.E(복음 동지회)에 함께 가입되어 있던 성결교회는 외세의 흐름에 따라 N.C.C의 용공 문제로 시시비비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1961년 제 16회 총회에서 건의된 N.C.C 탈퇴안이 부결되자 이에 격분한 N.A.E 인사들이 퇴장하여 5월 30일에 '보수총회'를 조직했다. 총회에서는 분열하면서까지 연합기관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전국대의원들의 연합기관 (N.C.C 탈퇴를 서면으로 결의를 했으나, 보수측에서는 여러가지 구실로 합동하지 않다가 마침내, 그 해 12월 19일에 부산동광교회에서 '예수교대한성결교회'를 조직하고 I.C.C.C를 가입함으로써 교단은 분열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성결교회는 기·성과 예·성이라는 두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 었다.
5) 합동운동과 교회성장 (1965-l9Ff
교단의 분열을 누구보다도 가슴아프게 생각한 이명직목사가 마침내 가성, 아성 양측 전 국교회에 '성결교회 형제,자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송함으로써 합동운동의 불길이 당겨 졌다. 그 요지는 기·성이 우리의 요구대로 N.C.C를 탈퇴했으니 예·성은 더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무조건 합동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미 예성은 1.CC.C에 가입하여 그들의 조종을 받고 있던 터라 쉽게 응하지 않았는데, 본격적 합동운동을 전개, 마침내 1965년 7월 23일에 서을 아현교회에서 역사적 합동총회를 성취하였으나, 합동을 원치않은 세력들은 남은 교회들을 규합했다. 1차, 2차 합동을 통해 교세가 신장했으나 교회의 성장은 역시 꾸준한 전도활동의 열매였다. 부산 피난시 0.M.S본부 후원으로 십자군 전도대가 조직되어 전국에 파송되어 축호전도, 문서전도, 노방전도, 천막전도 등으로 크게 역사한 결과 성결교회가 없는 지역에 많은 우리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6) 성결의 빛을 아시아에 (1977-1986)
1977년은 교단 창립 「7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이 「70주년을 맞아 교단은 질적, 양적으로 도약하게 되었다. 기념대회는 1977년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서을 장충체육관에서 중앙대회를 개최하였다. 2박 3일동안 년인원 37,900명으로 집계된 기념대회는 새벽기도회, 오전·오후 각종대회 및 세미나, 저녁의 기념성회, 철야기도회로 이어지는 일정속에서, 중요한 것은 선교대회를 통해 선교백서가 발표되었고, 교육대회를 통해 교단교육 제 1차 5개년 계획서가 발표되었다. 또한 괄목할만한 사건은 교단70주년기념 선교관 건물이 마침내 1979년 9월 15일에 서을 강남구 대치동에 지하1층 지상10층의 연건평 1천평 규모의 성결회관으로 봉헌되므로 총회본부와 0.M.S사무실은 물론 모든 지도자들의 자질향상을 위한 각종 훈련을 할 수 있는 세미나실과 숙소등이 준비되어 성결의 빛을 아세아로 뻗어 나아가게 하는 교육과 선교훈련 센터가 되었다.
교단 70주년 기념사업 중에 주목할만한 것은 선교백서인데, 이 선교백서 중에 국내 전도 의 계획과 함께 해외 선교확장이 있다. 이를 위해 총회는 해외선교의원회를 조직하고, 사업 으로 선교사 파송, 토착교회 및 신학교 설립, 현지 교역자 양성, 현지교회 지원 등을 채택하 였다. 회원을 모집하면서 동시에 1차로 인도선교에 착수, 인도에 130여 교회를 설립하였고, 80여 명의 교역자 생활비를 지원하였다.
태국선교를 위해 1981년 선교사를 파송하여 신학교를 설립지원, 복음의 사역자를 양성하 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아프리카 케냐와 필리핀, 그리고 남미 볼리비아에도 선교사를 파 송하여 원주민선교에 전력, 많은 효과를 거두고 있다.
오늘날 지식의 극대화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교회는 성장을 위해 수준높은 인재들을 많이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1984년 제39회 총회에서 장학위원회를 교육국에 설치 결의함으로써 해외에서 석·박사학위과정에 있는 교역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장학사업이 시작되어 1994년 6월 현재 해외유학생 36명을 장학생으로 선발, 그동안 해마다 박사학위를 획득 하고 귀국한 인재들이 서울신대에서 인재양성에 전력하고 있으며, 앞으로 계속 해마다 1-2명씩 학위를 취득한 장학생이 귀국하게 되면 그만큼 우리 교단의 질적 성장이 있으리라 본다.
7) 세계속의 성결교회 (1987-1998 현재)
1987년에 교단 창립 80주년을 맞이한 성결교회는 '세계속의 성결교회'로 비약하려는 부푼 꿈을 안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70주년 기념사업을 통해 교단이 선교, 교육면에 발전을 가져왔고, 80주년을 맞아 또 하나의 비약을 위하여 새로운 기념사업을 계획하고 단행하였다. '80년의 사중복음, 세계속의 성결교회'를 표어로 1987년 10월 13일부터 15일까지 류관순 기념관 (80주년 교회음악합창 연주회)과 서울 잠실 학생체육관(기념대회 및 80주년 기념 연극제), 그리고 충무교회(교육대회 및 교역자 세미나)와 독립문교회(선교대회 및 평신도대회)와 성결회관(80주년 역사자료 전시회)에서 거행되었는데, 특히 교육대회에서는 교단 교육 제 3차 10개년 계획이 발표됨으로 선교와 함께 교육하는 교단으로 성결교회의 이미지가 정립되었다. 80주년 이후의 교단은 선교와 교육에 더욱 박차를 가하면서 동시에 내실을 기하여 세계속의 성결교회를 지향하고 있다. 선교는 구체적으로 파라과이, 필리핀을 비롯하여 러시아, 베트남 등 구 공산권 국가와 스페인, 헝가리, 터어키 등 유럽, 중동지역 국가에 이르기까지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 오는 현 재 40억원의 예산으로 36개 국가에 31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개 선교지에 총회를 구성하고, 「26개 교회개척을 하는 등 세게복음화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교단창립 90주년을 맞이하는 1997년도에는 "90년의 사중복음 세계속의 성결교회"라는 표어를 가지고 교단의 모교회인 중앙교회와 연합하여 기념사업을 가졌다. 성결교회가 세계적교회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한국성결교회의 발전적 성장이 필요하며, 국내 기반확대가 강화되어야 한다는 인식아래, "국내선교위원회"가 발족되었다. 그리고 활천 과 성결신문의 편집쇄신을 하여 성결교회 대외적 이미지 제고의 첨단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고, 지속적인 성결교육의 기반확대를 위한 교육사업의 확대를 실시하였다.
1998년은 I.M.F의 여파로 시작되고, 온 국내가 혼돈에 빠져드는 국난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 교단은 이러한 어려움은 먼저 기독교인들의 회개에 의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고 자성하였다. 그리고 한국교회와 민족 모두에게 회개운동과 영적대각성운동을 주창하는 한국교회 의 영적운동의 선두자로 역할을 감당하였다. 3월 25일에 거행된 "98성결인 대회"는 "이 불 을 꺼지지 않게 하라"라는 주제아래 잠실 체조경기장에서 3만여 성결가족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 대회를 통해서 모든 교회와 기독교인의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고, 성결성을 회복하여야 함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될 수 있음을 널리 알리 었다. 그리고 교회가 중심으로 민족의 화합과 도약을 기원하였고, 이를 위한 본 교단의 민 족구원과 세계선교의 역할을 최대화하는데 노력을 경주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