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1745년 12월 2일 ~ 1805년 2월 11일)
1. 출생
1745년 김한구와 원 씨 사이에서 2남 1녀 외동딸로 태어났다. 1805년(순조 5)에 사망했다.
2. 영조 시대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와 결혼하였으나 1757년 승하하자, 1759년 계비 정순왕후를 새 왕비로 간택하여 혼례를 올렸다. 당시 영조의 나이는 66세 정순왕후는 15세로 51세의 나이 차이를 두었다.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와 며느리 혜경궁 홍씨보다 10살이나 어렸다. 정순왕후가 왕비가 된 후 노론 벽파에 속하는 친정 오빠 김귀주와 경주 김씨가문이 득세하여 세력을 떨쳤는데, 김귀주는 영조 후기 남당을 이루어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의 북당과 대립하였다. 대립의 명분은 임오화변으로 죽은 사도세자 처분에 대한 파벌의 당리·당권의 유·불리(有不利)에 대한 당략(黨略) 때문이었다. 정순왕후 김씨와 영조의 후궁 숙의 문 씨는 사람을 심어 사도세자의 행적을 영조에게 고해바치며 양자를 이간질했는데 사도세자는 1762년(영조 38년) 7월 12일(윤5월 21일) 뒤주 안에서 굶어 죽었다.
3. 정조 시대
1776년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한 후 왕대비가 되었다. 정조 즉위 초기 친정 오빠 김귀주는 한성 판윤을 제수받고, 홍인한 정후겸 탄핵에 동참하였어 제거했다. 정조는 이후 척신 정치 청산을 계획하여 영조 후반기 세도를 부렸던 노론 척신들을 배척하였는데, 이때 오빠 김귀주가 탄핵을 당하여 1786년 유배 중 사망하였다.
정조는 왜 김귀주를 숙청했을까?
정순왕후의 오빠 노론 남당 김귀주는 영조 47년(1771) 유생 한유를 시켜 영조에게 상소를 올려 북당의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을 공격했다. 이 상소에서 한유는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초래한 임오화변에 적극 나선 점을 공격했는데. 이것은 영조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셈이 되었다. 영조는 격노하며 한유를 서남해의 흑산도로 유배보냈다. 김귀주는 영조 48년(1772년 임진년) 직접 상소를 올렸다. “홍봉한이 외손자이며 세손)정조를 이용해 뭔가를 해보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이것은 정황상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신원과 명예회복을 의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김귀주의 행보는 영조에게 세손 대신 다른 왕손을 선택하려는 의심을 받았으며, 세손인 정조에게 직접적인 위협과 피해를 입히는 것이었다. 영조가 세손에게 그 이야기를 물어보자 세손은 비를 맞으며 대성통곡했다. 이에 영조는 이 상소로 김귀주의 사람됨을 의심하여 심하게 질책하였다. 정조 즉위 직후 김귀주는 한성부 판윤이 되어 숙적인 홍봉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한번 더 올렸다. 그러나 정조는 오히려 과거의 일을 언급하며 남당의 김귀주를 귀양보냈다. 정조는 바로 이때 김귀주가 세손 시절의 자신이 정순왕후에게 아뢴 내용을 곡해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외조부와 사사로이 나눈 대화이며 가정을 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는 것이다. 어릴 때라 정순왕후하고도 스스럼 없게 얘기 나눈 것을 김귀주가 듣고 상소에 올렸다는 것. 정조의 김귀주 숙청은 상당히 강도가 높았는데, 사사 명령까지 직접 내렸지만 곧 취소되고 김귀주는 귀양지중에 사망하였다. 결국 정조는 외조부인 홍봉한의 발언을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않을 경우 추숭을 빌미로 틈을 노리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멘트로 이해했고, 이를 다소 경계하면서 정순왕후에게 전달했다. 문제는 이 발언을 김귀주가 직접 문제삼으면서 홍봉한을 죽이기 위해 세손 자신까지 위태롭게 했다라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영조 48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가 외조부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는데, 거기에도 김귀주의 상소에 대해 "흉악하고 반역스러운 심보, 분통이 터져 관이 찢어질 정도" 라고 표현할 정도로 김귀주에게 엄청나게 격노하고 있다. 정조 23년경에 외숙인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 당시 일이 언급되어 있다. 사실 정조에게 즉위 이전 위협이 되는 세력은 외가인 풍산 홍씨(북당)였지 경주 김씨(남당)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김귀주는 이렇다 할 죄가 없는데 정조가 그를 숙청하는 정황이 엿보인다는 해석도 있다. 즉, 어떻게 보면 정조가 김귀주와 정순왕후를 '배신'한 셈이었다. 이후 정순왕후는 정조의 보호자에서 견제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정순왕후는 정조가 강화도에 귀양 가 있던 이복동생 은언군에 대한 모함에 사적으로 만나는 등 편의를 봐주자 노론계 신하들의 공론을 이끌어내며 정조와 대립하였다. 노론 세력은 정조의 탕평 정치에 힘입어 정계에 상당한 진출을 하였던 남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기에 남인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4.순조 시대
정순왕후는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대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하였는데, 정조가 죽은 다음 날부터 실권을 행사하였다. 7월 4일에는 노론벽파의 영수인 좌의정 심환지를 영의정으로, 좌의정에는 이시수를 임명하였는데, 이것은 임금의 국상중에는 모든 정사, 특히 인사 조처를 중지하는 관례를 깨는 조치였다. 또한 자신의 친인척과 노론 벽파 인사들로 국정 인사를 채웠다. 국상이 끝나자 정조가 설치한 장용영을 폐지하였고, 규장각을 축소하였으며, 천주교 금지령(신유박해)을 내려 노론과 대립하던 남인, 소론 시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축출하였다.
4-1. 신유박해
정순왕후는 수렴청정하는 동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며 천주교에 대해 온건한 정책을 펼치던 정조와는 달리 천주교를 강경 탄압하였다. 급기야는 1801년 2월 22일(음력 1월 10일), 사학(邪學, 천주교)의 엄금을 명령하여 천주교를 박해하는 이른바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킨다. 아래는 1801년 2월 22일(음력 1월 10일), 천주교 엄금에 관해 정순왕후가 하교한 내용이다.
“선왕(先王)께서는 매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듣건대, 이른바 사학이 옛날과 다름이 없어서 서울에서부터 기호(畿湖)에 이르기까지 날로 더욱 치성(熾盛)해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 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서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들어 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와 수령은 자세히 효유하여 사학을 하는 자들로 하여금 번연히 깨우쳐 마음을 돌이켜 개혁하게 하고, 사학을 하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며 징계하여 우리 선왕께서 위육(位育)하시는 풍성한 공렬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와 같이 엄금한 후에도 개전하지 않는 무리가 있으면, 마땅히 역률(逆律)로 종사(從事)할 것이다.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닦아 밝히고, 그 통내(統內)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統首)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劓罰)을 시행하여 진멸함으로써 유종(遺種)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이 하교를 가지고 묘당(廟堂)에서는 거듭 밝혀서 경외(京外)에 지위(知委)하도록 하라.”
이러한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정책은 노론과 남인 벽파들이 정권 획득과 유지를 위해 천주교인들이 상대적으로 많던 남인과 시파의 제거를 목적으로 한 숙청이었다.
5. 사망
신유박해를 통한 숙청작업 1년 만에 조정의 실권은 노론 벽파로 채워졌다. 그런데 1803년(순조 3)에 평양부와 함흥부에 큰불이 나더니, 그해 11월에 사직 악기고, 12월에는 창덕궁 선정전, 인정전에도 큰 화재가 발생했다. 닷새 후에는 장안의 종루 거리에서 다시 큰불이 나서 인심이 흉흉해지는 일이 발생했다. 정순왕후는 1804년 2월 9일(1803년 음력 12월 28일) 수렴청정에서 물러났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 기간 동안 국정 운영의 제일 과제로 삼은 것은 정치와 여러 방면에서 정조가 구축한 탕평 정치의 기반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자, 그의 장인이자 정조의 친위세력이었던 김조순에 의해 대부분의 벽파 관료가 숙청되고 정순왕후의 정치 영향력도 약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세 흐름은 조선의 정치가 당파 중심에서 외척 중심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결국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허망한 말년을 보내다가 1년 뒤인 1805년 2월 11일(음력 1월 12일), 창덕궁 경복전에서 사망하였다.
참조: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