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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의 침입을 격퇴시키고 개경을 탈환한 고려의 충장(忠將) 정세운(鄭世雲)
● 친원파 권신 기철(奇轍)을 제거하다.
정세운(鄭世雲)은 고려 말기의 무신(武臣)으로 공민왕(恭愍王) 재위기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애쓰면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물리치고 국난(國難)의 위기에서 고려를 구해낸 난세의 영웅이었으나 간신(奸臣)인 김용(金鏞)의 음모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정세운이 고려사(高麗史)에서 눈에 띄는 전공(戰功)을 세운 무장이건만, 안타깝게도 그가 언제 어디에서 출생했는지, 어떻게 관직에 진출했는지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다만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수행원으로 있었고 공민왕이 귀국한 뒤에는 대호군(大護軍)으로 있으면서 왕궁 수비를 담당하여 국왕의 측근으로 활동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눈 짐작으로나마 되짚어 보려면 먼저 원나라의 불모로 있던 공민왕이 고려에 돌아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고찰하는 수밖에 없다.
1270년 원종(元宗)의 출륙환도(出陸還都) 이후 고려(高麗)는 40여년간 전개된 여몽전쟁(麗蒙戰爭)의 패전국(敗戰國)이 되어 원(元)의 지배와 간섭을 받게 되었다. 고려가 원나라의 종속국으로 전락하게 되자 충렬왕(忠烈王)대부터 고려 국왕은 불과 10년에 폐립되거나 폐립과 복위가 반복되는 기현상을 보였다. 충렬왕(忠烈王), 충선왕(忠宣王), 충숙왕(忠肅王)이 각각 중간에 한차례씩 폐위되었다가 복위하였고, 충혜왕(忠惠王), 충목왕(忠穆王), 충정왕(忠定王)도 각각 5년도 채 안되어 폐위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가 극심한 불안정 상태로 빠져들었음을 입증하는 적신호였다. 이 시기에 왕실과 권신들 간의 내분과 다툼이 그치지 않았고 민생은 문자 그대로 도탄에 빠져 있었다.
그 무렵 원나라는 세조(世祖)가 죽은 직후 황실의 제위 다툼과 권신들의 전횡이 심하여 그 뒤로 약 반세기 동안 황제만도 11명이나 바뀌고 공위(空位) 상태만도 3, 4회씩이나 되풀이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여러모로 타판이 난 지 오래였고 백성들은 각종 부역과 천재지변 및 기근에 지칠대로 지치게 되었다. 더욱이 14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각종 반란세력과 함께 홍건적까지 봉기하여 원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 시기에 충숙왕(忠肅王)의 둘째 아들인 강릉대군(江陵大君) 왕기(王祺)가 고려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1330년에 태어난 강릉대군은 전례에 따라 원나라의 연경에서 성장하였고 충정왕(忠定王)이 폐위되자 1351년 12월에 귀국하여 고려의 서른한번째 임금인 공민왕(恭愍王)으로 등극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원나라의 내정을 훤히 궤뚫고 있었을 뿐 아니라 대륙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원나라의 멸망이 멀지 않았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변발(辮髮)과 호복(胡服)은 선왕(先王)의 제도가 아니니 전하(殿下)께서는 그것을 본받지 마소서."라는 감찰대부(監察大夫) 이연종(李衍宗)의 간언을 혼쾌히 받아들여 변발을 풀어 헤치고 호복도 갈아 입는 과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른바 공민왕의 영토회복에 대한 의지와 국권회복운동은 그가 변발을 풀어 헤쳤을 때 이미 그 막이 오른 것이었다.
원(元) 혜종(惠宗)의 두번째 황후인 기씨는 원래 고려 출신의 공녀(貢女)였는데 혜종의 눈에 들어 제2 황후의 자리에 올라 황태자 아이유시리다라[愛猶識理達獵]를 낳으면서 일약 핵심 권력자로 부상했다. 기(奇) 황후에게는 기식(奇式), 기철(奇轍), 기원(奇轅), 기주(奇周), 기륜(奇輪) 등 여러 명의 형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누이동생 덕분으로 고려와 원나라에서 모두 득세하여 친원세력(親元勢力)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이들 가운데 기철은 충혜왕(忠惠王) 때에 정동행성 참지정사로 임명되어 고려에 파견되기도 했으며 동생 기원은 한림학사에 재직하면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들은 본국인 고려에서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과 덕양군(德陽君)이라는 봉작까지 받을 정도였다. 그 당시 기씨 형제들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국왕 앞에서 신칭(臣稱)까지 하지 않을 정도로 무례하고 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렇게 방자한 기씨 형제들을 당시 국왕인 공민왕이 좋아할 리 없었다. 그런데 당시 판삼사사로 있던 조일신(趙日新)도 이들 기씨 형제와 불화를 빚고 있었다. 조일신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 시종을 도맡아 하던 인물인데 어려운 시기에 국왕을 시종했다는 공로를 믿고 갖은 횡포를 일삼곤 했다.
당시 조일신은 원나라 체류 시절에 교류했던 사대부들의 후원에 힘입어 부원배(附元輩)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반면, 또 다른 부원배인 기철 형제는 기 황후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일신인 기철 형제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평소 기철 형제와 사사건건 부딪치게 되자 마침내 이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마침내 1352년 6월에 조일신은 정천기(鄭天起), 최화상(崔和尙), 장승량(張升亮) 등과 모의하여 기씨 형제와 그 일파인 고용보(高龍普), 이수산(李壽山) 등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거병했으나 조일신의 병사들에게 붙잡혀 죽은 것은 기원 한 사람뿐이었고, 기철 등 나머지 형제는 놓치고 말았다. 그러자 조일신은 나머지 기씨 형제를 추격하는 한편, 공민왕이 있는 성입동 이궁을 포위했다.
이후 조일신은 공민왕으로부터 국인(國印)을 빼앗아 관직제수를 제 마음대로 하여 여론이 좋지 않자 역모혐의를 우려하고 변란의 책임을 최화상 등 동료들에게 뒤집어 씌우고는 그를 죽이고 마치 자신이 역적들을 토벌한 양 위세를 부리며 좌정승의 자리에 올랐다. 정권을 잡은 조일신이 날로 횡포를 부리자 공민왕은 이인복(李仁復), 최영(崔瑩), 김첨수(金添壽) 등의 도움으로 조일신을 제거하고 본격적인 반원정책(反元政策)의 기치를 들었다.
공민왕이 조일신의 난 이후 부원배(附元輩)들을 견제하며 개혁정치를 시작하자 기철(奇轍), 권겸(權謙), 노책(盧柵) 등 친원파(親元波) 권신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진 데에 위기감을 느끼고 공민왕을 폐위시킬 역모를 꾸미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 챈 공민왕이 먼저 선수를 치고 나오는 바람에 이들의 역모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당시 공민왕은 주연(酒宴)을 베푼다는 핑계로 재추(宰樞)들을 궁궐로 초청하면서 이들 세명도 함께 초청했는데, 이때 정세운은 강중경(姜仲卿), 목인길(睦仁吉)과 더불어 공민왕으로부터 부원배를 척결하라는 어명(御命)을 받고 미리 무장한 갑사(甲士)들을 매복시키고 기다렸다. 이 사실을 모르고 궁궐 안으로 들어선 기철은 공민왕이 보는 앞에서 정세운의 칼에 목이 달아났으며, 강중경은 도망치는 권겸을 뒤쫓아가 궁문에서 참살한 뒤 곧장 노책의 집으로 달려가 그마저 죽여 버렸다. 이렇게 부원배(附元輩) 거물들을 일시에 제거하는데 성공한 공민왕(恭愍王)은 곧바로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이문소(理問所)를 폐지하고 동북면병마사 유인우(柳仁雨)를 보내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수복하게 하는 등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강경책을 펼쳐 나갔다.
공민왕은 원황(元皇) 혜종(惠宗)의 연호인 지정(至正)을 쓰지 않기로 결정하고 관제를 문종(文宗) 때의 형태로 복구시킨 뒤 원나라에 빼앗긴 고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평리 인당(印螳)을 서북면병마사로 임명하여 압록강 이서의 8참(站)을 공략하게 했다. 이때 고려군이 압록강을 넘어 파사부 등 3참을 격파하자 혜종이 크게 분노하여 고려의 사신 김구연(金龜年)을 요양행성의 감옥에 가두게 하고 80만 대군을 동원해 고려를 응징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인당에게 국경 침범의 죄를 뒤집어 씌워 그를 참수형(斬首刑)에 처하고 수급(首級)을 원나라의 수도인 연경에 보내 혜종의 분노를 달래주었다. 그러자 원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지난 허물은 덮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이 조처는 공민왕의 정치적 술수에서 나온 것이지만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전공(戰功)을 세운 인당을 죽임으로써 다른 장수들의 사기에 큰 타격을 입혔던 것이다.
● 공민왕(恭愍王)의 내정개혁(內政改革)
공민왕은 강력한 반원정책(反元政策)을 실시하면서 개혁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를 마련하였다.
첫째, 원나라의 지시에 따라서 인사권을 행사하던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이제는 품계에 따라 재상들이 진퇴를 결정하기도 하고, 인사권을 맡은 이부(吏部)나 병부(兵部)에서 의논해 알리기도 하고, 감찰(監察) 등 사법관은 담당 관리의 사무 능력을 헤아려 전(殿)과 최(最)의 법으로 고과를 매겨 승진시키거나 쫓아내도록 하였다. 원(元)의 간섭을 배제하는 뜻이 포함된 방책이기도 하였으나 국왕이 인사권을 행사하고, 이를 받드는 담당 관서의 계통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인사권과 재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면 자연히 왕권이 취약해지고 통치를 원활하게 할 수도 없다.
둘째, 권문세가들이 자행한 토지 점탈의 비리를 척결하였다. 나라에서는 하급 군인들에게 일정한 토지 경작권을 주었는데 이를 대신 경작하던 군호(軍戶)들이 권문세가나 고위 벼슬아치들에게 땅을 빼앗겼으므로, 이를 되돌려주는 조치였다. 그동안 임피평야에 둔전(屯田)을 두어 여기에서 나오는 조세(租稅)로 군량미를 조달해왔는데 이마저 권문세가들이 빼앗아 도조(賭組)를 받아먹었으나 이때 다시 둔전관을 보내 회복하였고, 다른 곳의 둔전도 임피의 예를 따르게 하였다.
한편 정동행성(征東行省)과 역신(逆臣)들에게서 빼앗은 집과 뗄나무, 목초를 육로 수송의 편리를 위해 설치한 원(院)과 관(館)에 공급하고, 여기에 지급한 토지에는 세금을 면하였다. 또 산림과 저수지, 다리를 권문세가들이 차지하고 뗄나무를 하는 대가를 받거나, 물세, 통행세 따위를 받았는데 이를 몰수하여 국가에 소속시켰으며, 이에 대한 법을 느슨하게 하고 조세를 가볍게 하였다.
셋째, 조세 부정과 불법을 제거하는 조치를 내렸다. 서북방면은 국경 경비를 담당하여 조세를 면제했는제 권문세가들이 이곳의 토지를 차지하고 조세를 거두어 착복하였다. 이를 다시 거두어 들여 토지 1결에 1섬의 조세를 매겨 군용으로 쓰게 하였다.
백성들의 조세 공납 방법도 개선하였다. 조세를 낼 때 원래는 백성들이 스스로 말질을 하여 바쳤는데, 이 무렵 관헌에서 직접 말질을 하여 받으면서 작은 말을 큰 말로 바꾸는 따위의 비리를 저질렀다. 이때 말과 되를 통일하여 같은 규격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또 소금세로 거두어들이는 배를 3분의 1로 줄였다. 이 특별 목적세는 소금세를 받아 소금 공급을 원활하게 하고 국고의 수입을 늘리려는 본래의 뜻과는 달리 그동안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넷째, 낭비를 일삼고 소란을 떠는 음사(淫祀)를 철거하고, 부호들이 돈놀이하는 짓을 금단하였으며, 홀아비, 과부, 고아를 구제하고 뽕나무와 삼의 재배를 장려하는 등 일반적인 비리를 제거하였다.
다섯째는 군사제도의 개선이다. 지금까지 별초(別抄)의 정원을 억지로 늘리다보니 노약자와 어린이까지 강제로 먼곳에서 수자리를 사는 경우가 있었다. 백성들은 군역(軍役)을 피해 도망치기 일쑤였다. 이에 대한 개선책으로 바다와 인접해 있는 지역의 군사와 백성들을 자기 지역 방어에 충당하였다. 그 대신에 부역을 면제하고 먼 곳의 백성들에게 그 부역을 맡겼다.
이에 따라 강원도와 함경도의 군사는 쌍성에서 수자리하게 하고, 황해도와 평안도의 군사들은 압록강 연안에서 수자리하게 하였으며,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군사들은 왜구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군사와 관련된 개선책은 여진족,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려는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이외에도 여러 개혁적 조치들이 있었다. 공민왕이 개혁정치를 천명하자 권문세가와 부호들은 불만에 차 있었으나 제대로 항거하지 못하였다. 기철 일파의 최후를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민왕의 야심에 찬 위민개혁(爲民改革)은 여러가지 요인으로 제대로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끊이지 않는 외적의 침입이었다.
● 붉은 수건을 두른 무장집단 홍건적(紅巾賊)
1358년에 중원 대륙은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중국 땅에서 반란세력의 활동은 1351년 5월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수만명의 농민들이 황하의 홍수를 겪은뒤 치수공사에 동원되었다가 백련교도를 표방한 유복통(劉福通)이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10만명의 세력으로 불어나 하남 일대를 석권하였다. 그뒤 여러 세력이 일어나 유복통에게 합류하기도 하고, 별도의 부대를 편성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반란세력 가운데 하나인 장사성(張士誠)은 고우에서 원(元)의 관군을 물리친 뒤 크게 세력을 떨쳤다. 1356년 2월에 그는 소주(蘇州)를 점령하고 대주국(大周國)의 수도를 고우에서 소주로 옮겼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주원장(朱元璋)은 금릉(金陵)을 점령하였다. 장사성은 깜짝 놀라 주원장에게 대항하기 위해 원나라와 강화를 체결하고 주(周)라는 국호를 버렸다. 주원장은 9월에 항주(杭州)를 손에 넣고 절강성 일대를 차지하여 이 지역의 실질적인 강자가 되었다.
주원장은 어릴 때 백련교(白蓮敎)의 난(亂)을 목격하였다. 곽자흥(郭子興)은 백련교의 난에 호응하여 거병했는데 주원장은 곽자흥의 휘하에 들어갔다. 곽자흥은 자신의 군대를 홍건군(紅巾軍)이라 일컬으며 세력을 키웠는데 원나라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주원장은 고향인 종리로 가서 병사 7백명을 모집하였다. 그는 곽자흥과 더불어 홍건군을 표방하며 세력을 넓혔다. 그는 가난한 유민 출신인 만큼 농민의 고통을 돌보았으며, 원군까지 끌어들이는 능력을 발휘했다. 주원장의 군대는 백련교단처럼 군기가 엄격하여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주원장이 금릉을 점령할 무렵에는 도독 곽자흥이 죽어서 그가 실제의 영수가 되었다.
이 무렵 홍건군은 두 일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처음 한산동(韓山童)이 이끈 홍건군을 주류파라 하는데, 주원장도 여기에 소속되었다. 한산동이 원나라 군사들에게 생포되어 사형에 처해진 뒤 실력자인 유복통은 한산동의 아들 한임아(韓林兒)를 황제로 추대하여 국호를 송(宋)으로 정했다. 서수휘(徐壽輝)는 서족 지대인 호복에서 거병하였는데, 이들을 홍건군 서파라 불렸다. 수전(水戰)에 능한 이들은 장강 중류를 차지하고 원군(元軍)과 전투를 벌였다. 홍건군 서파는 천완국(天完國)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서수휘의 부하인 진우량(陳友諒)은 원군과의 전투에서 여러차례 무공(武功)을 세워 실력자로 부상했다. 한편 절강 쪽에서는 방국진(方國珍)이 세력을 이루고 있었는데, 방국진은 주변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느끼자 원의 관작을 받으며 협력하였다. 그의 군대는 뱃길로 고려와 가장 가까운 곳에 터전을 잡고 있었다.
중국 남쪽 곧 장강 언저리에는 붉은 수건을 두른 홍건적이 들끓었다. 이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주민들이 몰려나와 환영하였다. 홍건적은 결코 주민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물건을 빼앗지도 않았다. 게다가 철천지 원수인 원과 싸우고 있었으니 백성들의 환호성이 들판을 울렸던 것이다. 원나라 조정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송(宋)이란 나라를 건국한 홍건적은 관선생(關先生), 사유(沙劉)등의 지휘 아래 북쪽의 안휘성을 지나 산서성을 점령하고 만리장성까지 넘나들었다. 홍건적은 승승장구(乘勝長驅)를 거듭한 끝에 1358년 12월, 마침내 원의 상도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상도(商都)에서 7개월 동안 머물렀다. 원은 간신히 대도(大都)를 지키는 형편이었다.
남쪽의 세력은 1358년에 접어들어 고려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게 되었다. 고려는 중원의 정세에 관심을 기울여 홍건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 무렵에 고려는 뜻하지 않은 세곳의 사절단을 맞이하게 되는데, 방국진이 보낸 사신과 장사성이 보낸 사신, 강절해도방어(江浙海島防禦)의 직함을 가진 정문빈의 사신이었다. 이들은 우호를 맺자는 편지를 들고 와서 방물을 바쳤다. 앞으로 있을 원(元)의 공격에 대비하여 고려의 지원을 얻으려는 의도였다. 그뒤에도 간간이 사신들이 왔는데 주원장이 보낸 사신은 없었다.
1359년 2월에 관선생이 이끄는 홍건적이 고려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것은 고려(高麗)와 친선관계를 맺자는 뜻으로 보낸 사신이 아니었다. 관선생의 사신은 대략 '나라를 바치고 홍건적에게 투항하지 않으면 엄중히 응징할 것이다.'는 협박성 내용의 편지를 고려 조정에 전했다. 고려에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 홍건적의 고려 침공
1359년 12월, 모거경(毛居敬)이 이끄는 4만명의 홍건적이 얼음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와 의주를 함락시키고 주민 1천여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은 물밀듯이 내려와 정주를 짓밟고 도지휘사 김원봉(金元鳳)을 살해했으며 안주까지 함락시켰다. 압록강 연안지대가 모두 홍건적의 말발굽에 짓밟힌 것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암(李岩)을 서북면 도원수로, 경천흥(慶千興)을 부원수로 삼아 출전시켰다. 홍건적과 고려군은 압록강과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의 공방전(攻防戰)을 벌였다. 안우(安祐)는 한때 청천강에서 분전하며 홍건적의 남진을 막았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후퇴해서 정주로 돌아왔다. 이암도 군사를 퇴각시켜 서경에 머무르고 있었다.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시킬 것이 유력시되자 서경부윤 이춘부(李春富)는 황주로 후퇴하고 진지를 구축하였다. 서경에 무혈입성(無血入城)한 2만여명의 홍건적은 의주와 서경 등지의 주민 1만여명을 잡아두면서 한달 정도 주둔하였다. 날씨가 추워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게 되자 군사들은 동상에 걸려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혹독한 추위 속에 쓰러지는 자들도 속출하였다. 홍건적은 대부분 중국 남쪽의 따뜻한 지대에서 살던 농민들이라 북방 추위에 익숙하지 않았다.
새해 정월이 되자 고려군은 홍건적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했다. 최영(崔瑩)이 별동대를 이끌고 홍건적의 진지를 습격하여 적군 100여명을 참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홍건적은 포로로 잡은 고려의 주민 1만명을 모두 죽여 버리고 고려군의 총공세에 완강히 저항했다. 초전(初戰)에서 고려군은 보병 1천여명이 전몰(戰歿)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뒤이은 기마병의 기동타격작전(機動打擊作戰)으로 수천명의 홍건적을 무찔렀다.
함종에서 전투를 벌일 때에는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안우경(安遇慶) 등이 이끄는 고려군이 목책 안으로 쫓겨 들어간 홍건적을 포위하고 궁사전(弓射戰)을 펼쳐 2만명의 홍건적을 사살하기도 했다. 선천에서는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 기병부대가 습격하자 홍건적 3백여명이 간신히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고려에 침입했던 4만명의 홍건적 가운데 겨우 3백여명만이 목숨을 건져 돌아갔던 것이다.
한달 뒤인 3월에는 요동 일대에서 계속 원군의 공격에 밀리던 홍건적이 산동 일대의 군선들을 동원하여 벽달포, 덕도, 석도 등에 침입하여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고 황주의 비파포와 안주의 원포에도 홍건적이 출몰하였다. 홍건적은 고려군의 토벌전(討伐戰)에 밀려 황주에 20여명, 풍산에 30여명의 시체를 방치하고 퇴각했으나 섬과 해변에 있는 마을 사람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홍건적은 계속 요양과 심양 일대에서 원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홍건적은 역량을 총집결하여 1360년 9월에 상도인 개평을 공격했으나 원군의 반격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고 근거지인 하북으로 들어가는 길이 막혀 버리는 상황에 이르렀다. 상도를 지나 만리장성을 넘어야 하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홍건적은 고려 땅을 근거지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1361년 10월에 홍건적은 다시 20만 대군을 동원해 고려에 쳐들어왔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방실을 서북면 도지휘사로, 이여경(李餘慶)을 부지휘사로 각각 임명하여 절령에서 방어선을 형성하게 하고, 안우를 상원수로, 김득배(金得培)를 도병마사로 삼아 일선에서 홍건적의 진로를 막게 하였다. 고려군은 개천, 박천 등지에서 홍건적과 전투를 벌여 적병 3백여명을 살상하는 등 간간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홍건적이 갑자기 안주를 기습하여 도지휘사 김경제(金景提)를 사로잡고 절령에서 고려군을 대파하여 개경으로 향하는 진로를 열어놓았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정의 대신들은 공민왕에게 파천(播遷)을 권유하였다. 최영을 비롯한 장수들이 결사항전으로 개경을 사수하겠다고 눈물로 호소하며 파천을 막으려 했지만 공민왕은 형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파천을 결정했다. 개경을 떠나는 공민왕을 수행하는 관원은 28명뿐이었다. 도성 사람들은 보따리를 이고 지고 피난길에 나섰다. 늙은이와 어린이는 넘어지고 엎어져 밟혀 죽었으며, 자식과 어미가 서로 찾아 헤매며 울부짖는 소리가 성 안과 밖에 가득하였다. 거리 곳곳에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날씨마저 몹시 추웠다.
이해 11월 24일에 홍건적은 마침내 개경을 함락시키고 도성 안의 소나 말을 모조리 잡아 고기로 먹었으며, 미처 피난하지 못한 주민들을 죽이거나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고려군이 공격해올 것에 대비해 짐승가죽을 펴서 성곽에 두르고 물을 뿌려 얼렸다. 고려군은 성벽을 오를 수 없었고 가죽으로 감싼 벽에 화살을 날리면 그대로 퉁겨나왔다.
● 개경탈환전(開京奪還戰)을 총지휘하는 정세운(鄭世雲)
공민왕은 개경을 떠난지 20일만에 복주(福州)에 이르러 행재소(行在所)를 차리고 개경을 탈환하기 위한 본격적인 반격작전을 구상하였다. 이때 임금을 호종하던 정세운(鄭世雲)은 홍건적을 물리칠 방책을 강구하라는 공민왕의 말에 머뭇거리는 신하들의 모습을 보고 분통을 터뜨리며 임금에게 이렇게 건의하였다.
"빨리 애통교서(哀痛敎書)를 내리시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사자(使者)를 보내 여러 도의 군사를 독려하여 적을 토벌하게 하소서."
공민왕은 정세운에게 애통교서와 절월(節鉞)을 주어 의병을 모집하도록 했다. 정세운은 총병관(摠兵官)으로 임명되어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군사를 모으고 벼슬아치들을 독려하여 전의를 불태웠다. 특히 흩어져 있던 서경의 군사 1만명을 개경 부근으로 불러모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도합 20만명의 대병력이 규합되어 홍건적에 대한 반격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1362년 정월 17일, 마침내 정세운(鄭世雲)은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최영(崔瑩), 김득배(金得培), 한방신(韓方信), 이여경(李餘慶) 등과 함께 20만명의 고려군을 지휘하여 경성(京城)을 완전 포위하였다. 고려군은 먼저 숭인문(崇仁門)을 공격했는데, 박강(朴强)이라는 군졸이 판자를 지고 나가 사다리를 만들어 타고 홍건적이 성 위에 만들어 놓은 채 위로 올라가 적의 감시병들을 칼로 베어 죽이자 다른 군사들이 뒤따라 쳐들어가서 채의 문을 부수었다.
이것을 신호로 고려군이 성 안으로 쳐들어가서 홍건적을 공격했다. 이때 한방신의 부장으로 참전한 이성계(李成桂)가 동계(東界)의 기병들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홍건적의 괴수 사유(沙劉)와 관선생(關先生)을 참살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이 기세를 타고 고려군이 세찬 공격을 퍼붓자 홍건적은 맥없이 쓰러졌다.
일선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정세운이 "궁지에 몰린 쥐도 발등을 무는 수가 있다. 궁한 도둑을 모두 잡을 수는 없다."고 말하며 동쪽의 숭인문과 탄현문을 열라고 명령을 내려 적군이 도망갈 길을 열어주었다. 홍건적의 남은 무리가 열린 문으로 달아나자 고려군은 적당히 추격하다가 멈추었다. 이 전투에서 홍건적은 무려 10만명이나 되는 군사가 몰살되었으니 총병력을 20만으로 보면 반수가 죽은 셈이다.
정세운의 뛰어난 지도력과 필승의 의지로 홍건적을 격퇴시킨 고려군은 성안에서 원나라 황제의 옥새 2개를 비롯하여 수많은 보배와 인장 등을 노획하였다. 고려가 현종(顯宗) 때인 1018년 제3차 요여전쟁(遼麗戰爭)에서 강감찬(姜邯贊), 강민첨(姜民瞻) 등의 전공(戰功)으로 소배압(蕭排押)이 이끄는 요나라의 침략군 10만명을 구주대첩(龜州大捷)으로 궤멸시킨 이래 240여년 만에 외침(外侵)을 물리치는 승전(勝戰)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전공(戰功)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정세운(鄭世雲)의 말로는 매우 비극적이었다. 홍건적과의 전쟁에서 아무런 공로도 세우지 못해 공민왕의 눈 밖에 난 김용(金鏞)은 정세운에 대한 개인적 감정과 시기심으로 그를 제거하는 음모를 꾸몄다. 김용은 국왕의 교지를 거짓으로 꾸며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에게 보내 정세운이 장차 역모를 꿈꾸고 있으니 그를 죽이라고 일렀다.
안우는 김득배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세운을 죽이기로 결정한 후 정세운의 처소로 가서 그를 칼로 베어 죽였다. 복주를 떠나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주에 머무르고 있던 공민왕은 정세운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사자를 보내 안우를 죽이게 하였다. 그리고 김용이 국왕의 교지를 받아내 이방실과 김득배마저 죽였다. 군부는 복잡한 내외정세를 겪으면서도 이렇게 분열상을 보였고, 공민왕은 제때에 효과적으로 수습하지 못하였다.
김용은 원나라의 기 황후를 섬기던 최유(崔濡)가 공민왕을 폐립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옹립하려는 음모에 가담하여 흥왕사(興王寺)에 머무르고 있던 공민왕을 습격해 죽이려고 하였으나 내관(內官) 안도치(安都峙)가 국왕을 가장해 대신 김용 일당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김한룡(金漢龍), 홍언박(洪彦博) 등도 이때 살해되었다. 그러나 최영(崔瑩), 안우경(安遇慶), 김장수(金長壽)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와 반란을 진압하고 김용을 체포했다. 김용은 밀성(密城)으로 귀양갔다가 계림부(鷄林府)로 옮겨진 뒤 유배지에서 처형되었다.
강감찬(姜邯贊) 장군에 버금가는 전공(戰功)을 세웠으나 역신(逆臣) 김용(金鏞)의 음모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일세의 영웅이자 비운의 무장인 정세운(鄭世雲) 장군은 그 비참한 최후만큼이나 후세에 남겨진 개인적 기록이 거의 없어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난세에 뛰어난 능력을 지녔고 존경을 받을만한 인품과 절개를 겸비한 영웅이 나타나면 그 영웅을 시기하여 해치려고 하는 소인배가 함께 등장하는 것은 역사의 법칙인가, 세상의 이치인가? 광산 출신인 정세운 장군은 광주 정씨 가문의 시조로서 무량(武略)에 뛰어났으나 문장(文章)에도 능하여 많은 유집(遺集)을 남겼다고 전하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