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선생님의 조선상고사 읽어보았어요. 마음에 와 닿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독후감을 써 본김에 이 곳에 올려봅니다. 광복절이 있어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길고 지루한 감이 있어서 귀한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슈벨트 미완성교향곡 2악장 같이 올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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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의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문구로 조선상고사 제1편 총론의 첫머리에 역사에 대한 정의를 기술한 문구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과 조선상고사 그리고 앞서 기술한 역사에 대한 정의 등은 학창시절에 내가 단편적으로 자주 들어온 것들이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끝이었고 더 이상 깊은 관심을 갖지는 못하였다.
오래전에 칼 막스의 자본론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읽어가던 중 글 구성의 치밀한 논리에 크게 감탄하였다. 문장과 문장, 논리와 논리의 연결이 매우 정교하여 면도날 하나 들어갈 틈이 없는 마치 수학공식의 전개를 보는 것 같았다.
서점에서 이 책 저 책 훑어보며 책 여행을 하던 중 조선상고사가 눈에 들어왔다. 적지 않은 부피에 일견 지루해 보이는 구성의 책자였다. 나는 별 기대 없이 몇 장을 넘겨보던 중 눈에 익은 문장과 함께 역사라는 형이상학적 대상을 논리적으로 파고드는 선생의 역사 탐구방식에 관심이 가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머릿속 깊게 인상적이었던 칼 막스의 자본론과 견주더라도 탁월한 논리의 연계였다. 더구나 칼 막스에 비해 선생은 수감 중 자료에 대한 접근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도 논리와 추리로 어려움을 극복하여 고대사 연구의 새로운 장을 완성하였다는 점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논리와 추리의 전개방식을 통하여 선생은 우리가 배워왔던 고대 역사의 많은 부분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고 이를 통해 나는 민족적 자긍심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두 번이나 이 책을 읽게 된 이유이다.
선생을 만나본 동 시대의 사람들이 선생에 대해 평가한 것을 보면 타고난 천재 역사학자이고 국민사상 개혁의 선봉에 섰던 민족주의자로 보여 진다. 선생은 26세(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어 계몽논설을 집필하였다. 27세에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시론(時論)과 사론(史論)으로 국혼 진작과 민중 계몽운동의 선봉에 섰다. 1910년에는 한일합방을 예감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이후 독립운동에 직간접적 활동을 하던 중 49세에 투옥되어 57세에 옥중 순국하였다.
조선상고사는 우리의 역사를 중국의 요순시대와 대등한 수준으로 확대하고 있다. 단군왕검의 존재를 실체적 차원에서 다루었고 그 시대의 조직 제도를 규명하였다. 고대 중국의 요(堯)임금 시대에 치수로 유명한 하우(夏禹)가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게 된 기술을 단군왕검이 전수해주었고, 이후 우(禹)가 왕이 되어 본격적으로 조선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 삼신오제의 교의(오행의 설)를 믿고 정전과 도량형과 법률 등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였다고 고증하고 있다. 이와 함께 기자동래설의 실체적 내용, 조선에서 사용된 이두문의 독창성과 실용성, 고조선의 국가적 형태와 통치 범위, 고조선 붕괴와 고구려의 발흥, 한무제 등 중국의 침입과 고구려의 대응, 한사군의 허구성, 백제 및 신라의 성립과 발전, 가야국의 존재와 병합, 고구려와 백제의 활발한 정복활동을 다루었고 신라의 주도에 의한 삼국통일 이후 고구려 및 백제 재건활동의 추이 등 망국의 유민들이 국가 재건을 위해 투쟁하였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는 시기까지를 세부적으로 다루었다. 중요한 것은 승리자인 신라의 시각에서 주도되었기에 묻혀있었던 고구려와 백제의 영웅들의 본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상고사는 우리가 지금껏 배워왔던 고대사와는 꽤 많이 다른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이 중 특징적인 것 내용을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왕검은 이두 독법(讀法)으로 임금을 의미한다. 따라서 권력자가 조선 고유의 수두 미신을 이용하여 태백산 수두에 출현하고 스스로를 상제의 화신이라 칭하여 조선을 건국하였다.
2. 우리 민족은 삼신(三神), 오제(五帝)의 신설(神說)로써 우주를 설명하였기에 고조선은 신한, 말한, 불한에 세 한으로 이루어져 대단군이 신한(대왕)이 되고 말한과 불한은 부왕(副王)이 되어 신한을 보좌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3. 단군왕검이 하우에게 치수(治水)의 기술을 전수하였고 우는 이후 왕이 되어 조선의 삼신, 오제의 교의를 믿어 법률 및 도량형 등 제도를 중국 안에 전하여 퍼뜨렸다.
4. 종래에는 기자(箕子)가 주 무왕을 피해 조선으로 도망쳐 조선의 왕이 된 것으로 하고 있으나 그 자신이 왕이 된 것이 아니고 그의 자손대에 이르러 불조선(불한)의 왕이 된 것이므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은 사실이 아니다
5. 한자의 사용은 역사기록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우(禹)에게 금간옥첩의 문자를 가르쳐 주었는바 이는 한자일 것이다. 이러한 한자를 우리 사정에 맞추어 이른 바 이두문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정치상 비밀 준수를 위해 정치적 공동체별 문자의 사용이 달라 이두문도 지역별로 서로 달랐을 것이다.(설총의 이두를 발명하였다는 것은 맞지 않다)
6. 신한을 중심으로 한 말한, 불한 체계가 삼조선으로 각각 왕을 칭하여 독립을 한 바 중국의 춘추시대인 기원전 4세기 경이다.
7. 고조선은 종종 북경과 산동지방 일대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였다.
8. 장량의 사주로 1백2십근의 철추로 진시황을 저격하려다 실패하였던 창해역사는 동부여 출신의 인물이다.
9. 삼조선 붕괴후 부여, 옥저, 낙랑 등 열국이 생성되고 고구려는 그 와중에 강국으로 서서히 부상하였다.
10. 한사군은 조선땅에 실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지상(紙上)에 그렸던 일종의 가정이자 계획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진번군을 만들겠다. 북옥저를 멸망시켜 현토군을 설립하고 남옥저를 멸망시켜 임둔군을 세우며 낙랑국을 멸망시켜 낙랑군을 설치하겠다는 지상(紙上) 계획이었다.
고구려 성립의 시기를 사서에서 제시한 것보다 1백 수십년을 소급하여 기원전 190여년 경으로 보아야 한다.
11. 한무제가 고구려를 치기위해 9년간 전쟁(기원전 134년~기원전 126년)을 해왔지만 패하여 물러간 사실은 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른바 춘추필법(중국에 수치스런 일은 감춘다)이다.
고구려와 백제사는 삭감이 많고 신라사는 위찬(거짓 편찬)이 많아 사료로 삼기에는 적합한 것이 적음에 이를 주 인용하여 작성한 삼국사기는 그대로 믿기 힘든 것이 많다.
12. 신라의 화랑제도는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본받아 운영한 것으로, 고구려 선배제도는 학문과 무예로 개인의 지위를 정하여 국가로부터 녹을 받되 국가를 위하여 솔선수범하게 할 수 있는 제도이다.
13. 전한 말기 신나라를 창건한 왕망의 사회주의 혁명 실현의 골간인 토지분배 혁명(정전법)은 옛 조선의 균전제를 모방한 것이다.
14. 짧은 시간에 중국을 통일한 왕망의 신나라가 망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고구려에 중국식 제도를 도입시키겠다는 욕심에서 벌인 전쟁에서의 패배이다.
15. 백제 근구수왕(375년)은 바다를 건너 중국대륙을 경영하여 선비 모용씨의 연(燕)과 부씨의 진(秦)을 정벌하여 지금의 요서, 산동, 강소, 절강 등지를 경략하여 광대한 토지를 장만하였다. 이후 동성대왕 시대에는 남중국 회계 부근과 왜를 포함하여 백제의 영역을 확대하였다.
16. 광개토대왕은 감숙성 서북까지 원정하였다.
17. 광개토대왕의 원정은 5세기초 중국 판도에 직,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18. 수 문제, 양제 2대에 걸쳐 고구려에 대한 정벌을 감행하였는데 모두 실패하고 수나라는 망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특히 수양제의 침입은 전투병 113만명, 군수물자 운송 4백만명으로 중국 유사이래 가장 대규모의 병력 동원이었다.
19.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중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사망하였다. 중국사서에서는 당태종의 사망원인을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암, 감기, 이질 등 사서별로 사망원인이 다양함)
20. 연개소문은 당태종을 격파하였을 뿐아니라 북경까지 쳐들어가 중국 전역을 떨게 한 시대의 영웅이었으나 신라중심의 사관과 이후 사대주의적인 사관에서 흉적으로 치부되고 있다.
21. 이후 고구려, 백제 및 이후 복원 운동을 주도한 많은 영웅들이 있었으나 기존 사관에서는 이들을 작게 그리거나 배척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특징적 내용은 일반적으로 배워왔던 역사적 지식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 그 원인은 중국과 달리 우리 역사는 왕조의 교체가 심하지 않았기에 승자의 역사 위주로 사서가 기록되고 패자의 역사는 철저히 유린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또한 고려 이후 유학을 받아들이며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점차 고착되어가는 상황에서 우리의 호방한 고대 역사는 갈수록 왜곡이 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많은 외침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반면에 침략을 하지 않았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교육받았지만 이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자포자기적인 자위의 목소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늘 있어왔다. 선생의 고대사에 대한 치열한 탐구는 우리 민족사에 대한 자부심을 크게 고취시키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선생의 상고사를 읽을수록 동쪽의 작은 나라로 종묘사직 보전에 연연해온 신라와 달리 호전적이고 진취적이었던 고구려와 백제 역사의 실종이 아쉽기만 하다.
첫댓글 역사는 승자의 시각으로 씌어지기 때문에 폄하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백제에 대한 것만 봐도... 정말 잘 읽었습니다. 역시나 보배로운 빅맨 님!
ㅎ ㅎ너무 지루하셨죠?
지루하다니요? 무게감이 느껴지는 글이라 귀하게 잘 읽었습니다.
감상방에 들어와 슈베르트의 미완성을 귀에 댔는데 미완성이란 말에 먼저 다가섭니다. 마무리 하지 못한 여운~청자의 상상에 따라 완성되어야하는 ~ 미완이란 허술함에는 틈새가 있어 바람도 드나들고 물줄기도 스며들고~어쩜 그 틈에 홀씨 하나 뿌려질 수도~ 이렇게 '미완' 에 끌려다닙니다. 게다가 정선 아리랑에 매료되어 구비구비 해발 500미터의 짙푸른 정선숲속에 다녀왔더니, 아직 나의 귓가에는 어제 관람했던 정선아리랑 창극이 방해를 하네요.
"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 주게. 싸리골 올 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싸이지 ~~ 아리아리랑 아라리오." 빅맨님! 저의 오늘 음감은 엉망입니다.
작품감상방에 <아우라지 사랑> 읽어 보세요. 예전에 제가 정선아리랑에 관심을 갖고 쓴 거예요.
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