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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무안·신안 30코스 역방향
수포마을회관-임치마을-해제방조제-지도읍 내양마을-참도선착장-서당마을-점암선착장
20221228
1. 무안 해제반도와 신안 섬들의 아름다움
서해랑길 31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한 뒤에 쉴 틈도 없이 곧바로 31코스 시작지점인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수포마을회관에서 30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한다. 순방향으로 탐방하여야 탐방의 감정을 제대로 느낄 수 있지만 그러하지 못하여 못내 아쉽다. 30코스 순방향은 신안군 지도읍의 북쪽 해안을 돌아 무안군으로 넘어간다. 순방향으로 진행하면, 무안군 해제면 양월리에서 신안군 지도읍 자동리로 넘어온 25코스 때의 감격을 회상하며, 신안과 작별하는 이별의 감정, 신안 탐방 곳곳에서 느낀 기쁨과 아쉬움에 흠뻑 젖어들며 석별의 정을 나눌 것이다. 그러나 30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하므로 무안에서 신안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어, 신안은 이별이 아닌 또 한 번의 환영, 무안군 해제면 산길리에서 신안군 지도읍 내양리로 진입하는 새 감격을 맞이하는 탐방이 된다.
서해랑길 30코스 역방향 탐방의 행정구역은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와 산길리, 신안군 지도읍 내양리, 봉리, 감정리 지역이며, 그 지역의 여러 마을과 풍물들을 살피며 지도읍 감정리 점암선착장에서 마치게 된다. 무엇을 보았는가? 무엇에 감동하였는가?
31코스를 탐방할 때 무심코 지나쳤던 곳이 30코스에서 뒤돌아보니, 그곳이 저리 아름답고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임을 깨닫고 감동하였다. 백학산, 석산마을의 뒷산 왕제산, 그 앞의 봉대산이 무안군 해제반도 북쪽의 요충지임이 분명히 확인된다. 내양마을 언덕, 박동산 자락길, 내양리 해안길, 참도선착장, 이들 지역에서 무안 해제반도를 조망하며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어 몸이 떨렸다. 지리적 위치 확인의 기쁨과 자연 풍경의 아름다움이 어우러져 가슴이 요동쳤다.
미지의 길에서 地圖를 참고하며 탐방하지만 종합적인 이해는 부족하다. 그 대신에 구체적인 현장 감각에 감동한다. 30코스에서 만난 아름다운 마을과 길 풍경이 가슴에 물결을 일으킨다. 임치마을의 임치진성과 망산(봉화산), 산길리의 강산(糠山), 산길리 간척지 수로길, 박동산 눈쌓인 자락길, 내양리 리아스식 해안길, 밖갈우섬과 안갈우섬의 모랫길, 참도마을 언덕, 서동마을 언덕, 취동해안, 불취들 언덕, 소금출마을, 점암마을 언덕, 그곳의 풍경과 그곳에서의 조망 풍경들이 지금도 불쑥 솟아올라 가슴을 덥힌다.
이번 탐방에서 역사적 문화유적지 임치진성을 배우게 되었다. 임치진성 설명안내판과 인터넷 자료를 참고하여 정리한다.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임치마을의 임치진은 백제 때는 고록지현, 신라 경덕왕16년(757) 임해현으로 고쳐 압해군에 속했으며, 고려 태조 23년(940) 임치현으로 고쳐 함평현에 속했다. 임치진성은 1515년(중종15)년 경에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전라우도첨절제사영으로 금모포, 법성포, 다경포, 목포, 어란포, 군산포, 남도포, 금갑도 등 8개 수군만호진을 관할하였고, 중선 8척, 별선 12척, 군 1055명, 초공 9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후 1682~1711년간 임자, 지도진이 설치되면서 연해진성으로 격하되었다가 고종(1863~1907) 때 다시 첨사가 배치되었다. 임치진성이 폐지된 것은 1896년, 동학농민전쟁 이후 일본에 의해 강제 폐지되었다. 폐진 전까지 첨사가 다스리는 군성으로 조선 수군의 오래된 주요 주둔지 중 하나였다.”
임치진성과 관련한 이순신 장군의 역사적 기록, 이순신 장군이 1596년 9월 임치진성에 들러 하룻밤을 묵은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하여 서남해안의 전략적 요충지를 순찰할 때 임치진성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병신년(1596) 9월 8일
맑다. 조반(早飯)에 고기반찬을 놓았으나 나라 제삿날(세조의 제사)이라 먹지 않았다. 아침을 먹은 뒤 길에 올라 감목관에 갔더니 감목관(나덕준)과 영광군수(김상준)가 함께 있었다. 국화 떨기 속에 들어가서 술 두어 잔을 마셨다. 저물녘에 동산원(무안군 현경면 동산리)에 도착하여 말에 여물을 먹였다. 말을 재촉하여 임치진(해제면 임수리)에 이르니, 이공헌의 딸 여덟 살짜리 아이와 그 사촌의 계집종 수경이 같이 와서 배알했다. 이공헌을 생각하니 참혹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병신년 (1596) 9월 9일
맑다. 아침 일찍 임치첨사 홍견(洪堅)을 불러 방비책을 물었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뒷성(봉대산성)으로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고 동산원으로 돌아왔다. 오후에 함평현에 이르렀다. 도중에 한여경을 만났으나 말 위에서 만나 보기가 어려우므로 타일러서 함평으로 들어갔다. 함평현감은 경차관을 마중하러 나갔다고 한다. 김억창도 같이 왔다.
*<영남 이순신연구소> 참조
또한 병자호란 때 시서거사(市西居士) 김선(金璇)이 지도(智島)로 피난하던 도중 임치진에서 머물며 시를 남겼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북쪽 강화도에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나주에 은거하던 시서거사는 지도로 피난하여 26일 동안을 머물고 나주로 돌아왔다고 한다.
광산 김씨 김선(金璇, 1568~1642)은 전남 나주 출신으로, 호는 시서거사(市西居士)라고 한다. 그는 양명학에 조예가 깊은 장유(張維), 임담(林潭) 등과 친밀히 교유하였으며,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한탄하여 나주로 내려와 두문불출하였다고 한다. 그의 유고집 <市西遺稿>가 번역되어 있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2월 1일 나주를 출발하여 지도(智島)에서 지내다 26일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1일 난리를 피하여 지도로 떠났는데 바람과 눈이 몹시 심하여 첫날을 묵은 곳이 고사촌(高寺村)이고, 2일에는 임치성에서 묵고, 3일에 지도(智島)로 들어가 윤희복 집에서 묵었다고 한다. “2월에 난리를 피하여 지도(智島)로 향하다가 임치성에 묵다(二月避亂 將嚮智島 宿臨淄城)” 그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읊었다. 당시 임치진성에서의 나그네의 근심이 지금 이 시대에도 핍진하게 전달되게 그려져 있다.
古鎭蕭條西海?(고진소조서해?) 오래된 성은 쓸쓸히 서해의 구석에 있는데
戌墉如斗枕長流(술용여두침장류) 성벽은 말(斗)처럼 긴 강을 베개로 삼고 있네.
寒燈小店難鄕夢(한중소점난향몽) 차가운 등불 켜진 작은 가게엔 고향의 꿈을 꾸기 어렵고
殘角三更起旅愁(잔각삼경기려수) 한밤중이 다 지나도록 나그네의 근심이 이는구나.
*<병자호란 때 시서선생의 숨은 이야기Ⅱ(나주투데이, 2007.12.24 김종순 고대문화TF팀장)> 참조
이번 30코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조망을 손꼽는다면 어디일까? 무안군과 신안군의 경계를 이루는 무안군 해제면 산길리 간척지 수로를 따라가며 드넓은 간척지와 철새들의 군무 풍경 조망, 신안군 지도읍 내양리 해안에서 해제반도·북동쪽 칠산 바다·서북쪽 어의도와 여러 섬 풍경 조망, 특히 밖갈우섬에서 안갈우섬으로 이어지는 모랫길 풍경과 참도·대포작도·소포작도·어의도가 어우러지는 섬 풍경 조망, 봉리 취동해안에서의 임자도와 어의도 등 섬 풍경 조망을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풍경의 아름다움을 그냥 스쳐가는 탐방객들은 없을 것이다. 아름답다. 이들 풍경 중 길손에게 그 한 곳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취동(吹洞)해안에서의 섬 풍경 조망을 꼽겠다. 아마도 곽재구의 시 ‘전장포 아리랑’ 영향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풍경은 그 풍경 자체만으로도 그날 최고의 풍경으로 손꼽을 수 있다.
취동해안에서 동쪽의 어의도와 서쪽의 임자도가 가까이 마주한 풍경을 보며 주변의 여러 섬들을 확인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전장포항이 어디지? 저 섬이 만지도가 맞겠지? 길게 동쪽으로 뻗어온 임자도와 서쪽으로 뻗친 어의도가 손을 뻗어 서로 함께 하고자 하는 모습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그림, 이별한 견우와 직녀가 만남의 그리움을 애태우는 사랑의 모습 같다. 아담을 창조한 하느님이 손을 뻗어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고 상상하여 창조한 미켈란젤로의 그림은 신과 인간의 종속처럼 보인다. 또 임자도와 어의도 풍경은 무한한 사랑의 그리움으로 서로 함께 하려는 풍경이다. 그 풍경은 평등한 사랑의 모습이다.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그리워하는 풍경, 대등한 인간 사이의 사랑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담의 창조’와 ‘견우와 직녀의 사랑’, 임자도와 어의도 주변에서 이 불변의 사랑을 찬미하는 아기자기한 섬들이 둥둥 세월을 견디고 있다. 삶은 고통이지만 사랑으로 살아야 함을 임자도와 어의도가 이야기하고 ‘전장포 아리랑’이 노래하고 있다. 길손은 이 풍경의 아름다움에 홈빡 빠져들었다.
아리랑 전장포 앞 바다에/ 웬 눈물방울 이리 많은지/ 각이도 송이도 지나 안마도 가면서
반짝이는 반짝이는 우리나라 눈물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우리나라 사랑 보았네
재원도 부남도 지나 낙월도 흐르면서/ 한 오천 년 떠밀려 이 바다에 쫓기운
자그맣고 슬픈 우리나라 사랑들 보았네/ 꼬막껍질 속 누운 초록 하늘
못나고 뒤엉긴 보리밭길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멸치 덤장 산마이 그물 너머
바람만 불어도 징징 울음 나고/ 손가락만 스쳐도 울음이 배어나올
서러운 우리나라 앉은뱅이 섬들 보았네/ 아리랑 전장포 앞 바다에
웬 설움 이리 많은지/ 아리랑 아리랑 나리꽃 꺾어 섬 그늘에 띄우면서
-곽재구(1954~)의 ‘전장포 아리랑’ 전문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7.37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34분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수포마을회관 옆에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고, 오른쪽 기둥 위에 서해랑길 31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서해랑길은 앞쪽 임수리 동령재마을을 지나 왼쪽의 동령재를 넘어 임수리 임치마을로 내려간다.
"임수리(臨水里)는 해제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3km 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다. 임치마을 앞으로 근래에 조성된 태원간척지가 있으며 서해바다 건너 맞은편에는 신안군 지도읍이 있다. 또한 북쪽으로는 석룡리와 연결되는 곳에 동학군들이 훈련장으로 사용했던 민대들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임치, 수포, 석포 등 3개의 마을로 이루어졌으나 현재는 임치와 수포 두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임수리라는 里名도 임치와 수포에서 한글자씩 따다 만든 것이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면 임치리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해제면 석포리 임치동으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석포리, 수포동, 임치동으로 표기되었다. 1987년의 자료에는 현재처럼 해제면 임수리 임치와 수포로 나온다."
- 무안문화원
중앙에 왕제산이 우뚝하고 그 아래 석룡리 석산마을과 민대들이 있다. 중앙에서 왼쪽 앞 낮은 구릉이 있는 곳이 원머리마을이고 오른쪽은 석포마을인 듯.
"칠산바다를 향해 뻗어 나온 원머리는 민대들의 제방 첫머리에 해당된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마당바위가 있다. 마당바위는 주민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였는데 당시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바위였다. 원머리는 일제강점기 때 면 행정을 보았던 사무실이 있었던 곳이고 특히 목화의 저장 창고가 있어 해제에서 재배되었던 목화를 목포로 반출하는 기지가 되기도 하였다. 임치포구가 여객을 실어나르는 포구였다면 이곳은 물류를 실어나르는 포구였다. 이러한 이유로 원머리는 일제강점기 때 해제에서 가장 큰 포구이기도 하였다." - 무안문화원
왼쪽 지역이 임수리 석포마을, 중앙의 산봉이 금광산인 듯.
"돌캐(개)라고도 부르는 석포는 마을 앞에 포구가 있었는데 포구 주변에 돌과 바위가 많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돌이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지금도 백제시대 봉대산성을 축조하는 데 사용했던 돌과 석포의 돌이 재질이나 빛깔이 같아 당시 이곳에서 돌을 채취하여 성을 축조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마을 뒷산을 금광산이라 하는데 금을 캤던 산이다. 해제면에서는 광산개발이 활발하였는데 당시 제일 큰 광산업자가 이 마을에서 살았다. 한때는 마을 앞 농지에서도 토금(土金)을 채취하기도 했다." - 무안문화원
출발지인 임수리 수포마을회관이 앞쪽에 있으며 보이는 마을은 임수리 수포마을이다.
"수포마을은 임수2리에 속하는 마을로 물이 잘 나오는 포구라는 유래를 지니고 있다. 이 마을에 어느 성씨가 먼저 들어왔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담양 전씨가 들어왔다고 하나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경주 정씨가 먼저 왔다고 한다. 이 마을은 수포와 석포, 원머리를 포함하고 있다." - 무안문화원
왼쪽 고개가 동령재, 앞의 마을은 임수리 동령재마을인 듯. 왼쪽 뒤 동령재를 넘어 임수리 임치마을로 내려간다.
왼쪽에 석포마을, 오른쪽에 수포마을, 중앙에 솟은 산은 금광산인 듯. 맨 뒤쪽의 산은 봉대산이라 가늠한다.
동령재를 넘어 해제면 임수리 임치마을로 내려간다.
길 오른쪽에 임치진성 동문지(東門址) 출입구가 있다.
이 산을 반룡산이라 이르는 듯. 오른쪽 나무 뒤는 서문지(西門址)가 있는 곳으로 그 뒤는 서해바다이다.
동문지 안쪽에 1685년부터 1873년에 건립한 역대 첨사의 선정비 5기가 남아 있다.
소재지 :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임치마을
시대 : 조선 1515년(중종15)년 경에 축성한 것으로 추정됨.
연혁 : 임치진이 1408년(태종8) 1월 처음 관찰기록에 등장(태종실록), 조선초기 전라우도도만호진으로서 목포진, 다경포진, 법성포진, 검모포진, 군산포만호진을 관할하던 주진이었고, 중선 8척, 별선 12척, 군 1055명, 초공 9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부속 시설은, 전하는 기록은 없으나 임치진 지도를 참조하면 성문은 동·서·남문이 있었다. 건물로는 객사, 동헌, 내아, 사령청, 장교청, 진무청과 화약고, 군기고, 환상고 등의 창고가 성안에 들어서 있었다. 전선은 함평현 소속의 전선과 함께 서문 밖에 정박처가 있으며, 해제봉수와 용산봉수를 관할 봉수로 거느리고 있었다.
유적현황 : 임치진성의 평면 형태는 대략 남동-북서의 타원형에 가깝다. 전체 길이는 480m로서 소형에 속한다. 전체적인 지형은 남쪽과 북쪽에 위치한 낮은 봉우리와 그 사이의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해안에 면한 서벽쪽은 높이 10~20m 정도의 낭떠러지 지형으로 자연 방어벽이 되어 주고 있다. 성벽의 축조기법은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쌓았다. 기저부는 1x0.3m~0.5m의 대형석재로 쌓고, 윗 부분은 20cmx40cm, 50cmx70cm 정도의 석재로서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석재를 이용하여 쌓아 올렸다. 그러나 모서리 부분은 위, 아래 구별없이 대형의 석재를 사용하고 있다. 성벽의 규모는 아래 너비 8m, 위 너비 3~4m, 안쪽 높이 8m이며 바깥쪽 높이는 잔존 상태에 따라 각각 다르다. 현재 성벽 남북의 봉우리와 이와 가까운 부분이 양호하게 남아 있고 평지쪽은 마을과 경작으로 인해 흔적만이 확인된다. 한편 동문지 안쪽에 1685년부터 1873년에 건립한 역대 첨사의 선정비 5기가 남아 있다.
강희 24년 반룡산(城 안) 임치진 성지(城址)에 전라우도 수군 겸 순찰사령 주둔군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 동아시, 성하시, 동령제라 부르고 뒷산은 봉화산, 지금은 망산이라 한다. 右로는 땅구지, 좌로는 고지끗, 북으로는 북구지가 있다. 앞산은 '강산'이라 하는데 임치마을 형국이 키 모형으로 생겼다 하여 겨 '강(糠)'자를 기록, 강산(糠山)으로 부르고 있다. 단, 마을 이름은 선인들이 성(城) 이름을 따라 임치마을이라 하여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봉화산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망산이라 불리는 산이 뒤쪽에 있다.
봉화산이라 불렸던 망산의 맥이 망재로 이어지고 있다. 임치마을은 망산-망재로 이어지는 산줄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임치는 임수1리에 속하는 마을로 임치와 동령재로 이루어졌으며 서해안 무역항로의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고대로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실지로 임치라는 지명이 최초로 나타나는 문헌은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는 백제의 고록지현(일명 개요현)을 통일신라가 염해현으로 개명하였고 고려에서 이를 임치현으로 개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명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을의 지형에서 비롯되었다. 치(키의 옛말로 곡식 따위를 까불러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는 도구. 고리버들이나 대를 납작하게 쪼개어 앞은 넓고 평평하게, 뒤는 좁고 우긋하게 엮어 만든다) 형국으로 물가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마을 오른편으로 임치진성이 있고 뒤로는 동령재가 지나고 있으며 망산 또는 봉화산이라고 불렀던 망재의 맥이 왼쪽을 구성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몇 필지의 농토가 있고 농지가 끝나는 지점엔 폐염전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맞은 편에는 산길리의 '강산(糠山)'이 자리하고 있는데 '강산'의 한자가 쌀겨 강(糠) 자다. 또한 치의 손잡이로 땅구지, 고지끝이란 지명이 남아있다. 또 하나는 목포대학교 박물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臨淄는 중국 산동반도의 고을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산동반도의 임치는 우리나라와 교류가 비교적 활발한 지역이었다. 고대에 중국의 지명을 따서 임치로 개칭한 것은 이곳이 중국의 강남지역뿐 아니라 산동반도와 교류에서도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을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려는 물론이고 조선에 이르기까지 智島를 일명 임치도라 불렀던 것은 이러한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료를 보면 조선 중기까지는 영광군에 속했다가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 임치리로 나온다. 추정컨대 '임치'라는 지명은 중국의 지명을 따서 붙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지형에서 비롯된 것은 후일 한자에 맞춘 풀이라 여겨진다." - 무안문화원
멀구슬나무가 노랗게 익은 열매들을 달고 겨울을 나고 있다. 멀구슬나무 왼쪽으로 방조제가 길게 이어진다.
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다. 바다 건너는 신안군 지도읍 내양리와 봉리 일대일 것이라 가늠한다.
임치마을 망산(봉화산)이 봉긋하게 솟아 있다. 마을 앞 들녘을 돌아 멀구슬나무 앞을 거쳐왔다. 방조제 오른쪽은 폐염전인 듯.
임치마을 앞 농지가 끝나는 지점에 있다는 폐염전이 이곳일 것이라 가늠한다.
앞에 보이는 산은 해제면 산길리 강산(糠山), 서해랑길은 방조제를 건너 강산 오른쪽 산길리 해안길을 따라 이어진다.
왼쪽 뒤의 산이 왕제산, 그 아래 석산마을과 민대들, 오른쪽 뒤의 산이 봉대산, 중앙의 산이 임치진성이 있는 반룡산, 그 오른쪽 산이 망산(봉화산), 그 아래 임치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방조제 오른쪽 간척지 폐염전은 농지로 전환하려는 듯.
해제면 임수리에서 산길리로 넘어와 강산(糠山) 자락 산길리(山吉里) 해안길을 따라간다.
"산길리(山吉里)는 해제면 소재지에서 신안군 지도(智島) 쪽으로 22번 지방도로를 따라 3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등, 구등, 강산 등의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광복 이후 간척으로 이루어진 농장이 里 전체에 펼쳐져 있다. 본래 함평현 해제면 지역이었으나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때 무안군 해제면으로 바뀌었다. 1914년 강산동, 신등길, 구등길, 보천동 일부를 합하여 강산과 길등의 이름을 따서 산길리라 하였다. 문헌으로 살펴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면 구등길리, 신등길리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해제면 구등리, 신등리, 강산동이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해제면 산길리 강산동, 신등리, 구등리로 나온다. 이어 1987년의 자료에는 해제면 산길리 신등, 구등, 강산으로 나온다." - 무안문화원
서해랑길은 강산 자락 해안길에서 지방도 805호선 산길로를 가로질러 수로 옆 농로를 따라 이어진다.
무안군 해제면 산길리와 신안군 지도읍 내양리를 잇는 방조제가 이어져 있고 그 아래 지방도 805호선 산길로가 달린다.
산길로를 가로질러 수로 옆 농로를 따라 이어간다.
방조제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고, 앞의 남쪽 수로와 북쪽 수로 사이의 드넓은 간척지는 무안군 해제면 산길리에 속한다.
농로를 따라 이어가다가 오른쪽 수로가 갈라져 나오는 지점에서 수로를 건너 신안군 지도읍 내양리로 넘어간다.
무안군 해제면 산길리 간척지 들녘이 드넓다. 들녘 너머는 지도읍 자동리 일대일 것이며 왼쪽 산은 한봉산이며, 그 뒤 오른쪽 산은 선황산이라 추정한다. 지도읍 자동리 선황산을 넘어 신안젓갈타운으로 걸어간 25코스 탐방이 추억된다.
왼쪽은 해제면 산길리 들녘, 맞은편에 보이는 곳은 신안군 지도읍 일대. 농로 오른쪽에 수로를 건너는 제방이 있다.
제방길을 건너 무안군 해제면 산길리에서 신안군 지도읍 내양리로 넘어간다.
산길리-내양리 방조제에 의해 형성된 광활한 인공호가 펼쳐져 있다. 오른쪽은 신안군 지도읍 내양리 일대이며, 오른쪽 축사는 내양리 태원농장이다.
수로 옆 농로를 따라오다가 제방길을 통해 신안군 지도읍 내양리로 넘어왔다. 왼쪽에 무안군 해제면 산길리 강산, 오른쪽 뒤의 산은 지도읍 자동리 한봉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산길리-내양리 방조제가 길게 이어져 있고, 인공호가 펼쳐져 있다. 맨 왼쪽에 왕제산, 중앙에 봉대산, 맨 오른쪽은 강산 자락.
제방을 건너 오른쪽 현우목장 축사 앞을 거쳐 내려왔다.
낮은 구릉지 끝자락을 돌아나가는데 간척지에 태양광발전소가 넓게 조성되어 있다. 오른쪽 뒤에 무안의 왕제산이 보인다.
태양광발전소 울타리를 따라가다가 간척지를 가로질러 지방도 805호선과 만난다.
오른쪽의 태양광발전소 시설 점검 공사가 진행 중이다. 먼나무 가로수가 즐비한 간척지농로를 따라간다. 맞은편은 내양마을, 서해랑길은 중앙 오른쪽에 보이는 내양마을 언덕을 넘어 이어간다.
원내양길이라 명명된 805호선에서 건너편 내양마을 입구로 진입해 언덕을 넘어 중앙의 낮은 박동산 뒤쪽 해안으로 이어간다.
전남 신안군 지도읍 내양5리 원내양마을로 진입한다.
"내양리(內楊里)는 1895년(고종 32) 지도진이 폐지되고 지도군이 설치되어 지도군 군내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외양, 묘두, 가정, 적동, 송항, 둔곡마을을 합하여 내양리라 하여 무안군 지도면에 편입되었다가 1969년 1월 1일 무안군에서 신안군의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되었다. 내양마을은 1600년대 말경(조선 숙종)에 충청도 목천 내양에서 밀양 박씨 박수천의 다섯째 아들인 박만겸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 마을이 형성되어 마을이 날구지(일명 나루구지, 나루처)의 안쪽에 위치한다 하여 내양리라 하였다. 내양마을은 강산나루 안에 있어 안나루구지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신안군청
지도읍 내양리 간척지 갯벌에 태양광발전소가 광대하게 조성돼 있다. 오른쪽 산은 무안군 해제면 산길리 강산, 중앙에서 왼쪽에 해제면 임수리 반룡산의 임치진성, 그 오른쪽에 망산(봉화산)이 분명히 보인다.
중앙의 낮은 구릉을 왼쪽으로 돌아 태양광발전소 울타리를 따라와서 지방도 805호선과 만났다. 왼쪽 뒤의 산은 무안군 해제면 양월리 왕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내양마을 언덕길을 올라 내양리 박동산 자락길을 따라가다가 해안으로 내려간다. 왼쪽에 겨울 멀구슬나무 열매에 감탄한다.
오른쪽은 석산마을이 자리한 무안군 해제면 석룡리 왕제산, 바다의 왼쪽 섬은 밖갈우섬이다.
태양광발전소가 박동산 기슭과 방조제 간척지 방죽들에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서해랑길은 방조제를 따라 이어지며 바다의 오른쪽 섬은 밖갈우섬, 왼쪽의 섬은 안갈우섬, 그 뒤의 섬은 대포작도와 소포작도이다. 왼쪽 산자락 마을은 내양리 가정마을이다.
"가정(佳亭)마을은 1687년(숙종13) 기계 유씨, 창녕 조씨, 밀양 박씨(박종매) 등이 입향조이며, 마을의 모양이 가재형이라 하여 가재라 부르다가 한자어로 표기 시에 가정이라 바뀌었다." - 신안군청
방죽들에 태양광발전소가 펼쳐져 있다. 오른쪽 산봉은 옥녀봉인 듯하고 그 아래 가정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옥녀봉에 어린 전설이 있다. "옥황상제의 딸이 죄를 짓고 벌을 받아 지상에 내려와 살게 되었는데, 어느 가난한 집 외동딸로 다시 태어났다가 20세가 되는 해에 돌아오도록 하라는 옥황상제의 명에 의해 지상에서 살게 되었다. 지상에 머문 지 18년이 지날 무렵 이웃집 도령과 좋아하게 됐는데 약속된 20년이 되어 옥녀는 뒷산 봉우리에서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도령은 옥녀를 못 잊어그 봉우리에서 옥녀를 부르다 죽었다. 그 후 이 산을 玉女峰(옥녀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해랑길은 내양리 가정마을 앞 방조제 제방길을 따라 해안을 이어간다. 바다의 왼쪽 작은 섬은 안갈우섬, 오른쪽 두 개의 섬은 밖갈우섬이며, 뒤쪽의 섬은 대포작도와 소포작도이다.
중앙 뒤의 나즈막한 박동산 자락길을 걸어 해안으로 나와 앞 구릉 뒤 방조제길을 따라 이곳으로 와 해안을 이어가고 있다.
왼쪽에 대작포도, 그 오른쪽에 소작포도, 그 뒤에 어의도, 중앙의 작은 안갈우섬, 그 오른쪽의 밖갈우섬이 가늠된다.
내양리 해안이 리아스식 해안처럼 굴곡져 있다. 왼쪽으로 돌아 방조제를 건너간다. 중앙에 대포작도, 오른쪽에 소포작도, 맨 뒤에 어의도가 확인된다. 대포작도 앞에 참도가 있다.
방조제길을 따라 내양리 여끝들을 오른쪽으로 돌아서 내양리 적동마을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참도선착장으로 이어간다.
여끝들을 오른쪽으로 돌아나가서 내양리 적동마을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봉리로 넘어가 참도선착장으로 이어간다.
방조제는 내양리 적동마을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며 내양리에서 봉리로 넘어간다. 왼쪽은 내양리, 오른쪽은 봉리이다.
왼쪽 수로를 넘어 내양리에서 봉리로 넘어간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참도선착장을 거쳐 중앙에 보이는 언덕을 넘어간다.
왼쪽 뒤에 내양리 송항, 그 오른쪽 뒤가 내양리 둔곡이며, 오른쪽은 봉리 봉동인 듯.
"송항(松項)마을은 1688년경(숙종대) 장수 황씨(황기봉), 인동 장씨(장봉례)가 함평에서 입향하였으며, 마을 주변에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둔곡(屯谷)마을은 1593년(선조26) 풍천 임씨(임만천)가 강원도에서 입향하였으며, 마을 지형이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봉동(鳳洞)마을은 1588년경(선조대) 진원 박씨(박응남)가 지도(智島)에서 입향하였으며, 마을의 뒷산이 봉(鳳)의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신안군청
밖갈우섬과 안갈우섬이 모랫길로 이어져 있고, 오른쪽 앞에 무안군 석룡리 왕제산 자락, 맨 뒤에 학송리 백학산이 가늠된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백학산 자락길을 걸어 다드락섬 입구 백학포구에서 다드락섬을 찾아보았으나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날이 밝아서 학송리 송전마을 언덕에서 다드락섬을 멀리 조망하였다.
굴곡진 내양리 해안을 돌아 왼쪽으로 나와서 왼쪽 여끝들을 거쳐 오른쪽 적동마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왔다.
"적동(笛洞)마을은 1748년경(영조24) 김해 김씨(김정희)가 함평에서 입향하였으며, 마을의 모양이 피리형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신안군청
왼쪽에 봉동염전이 있는 방조제길을 따라 참도선착장으로 향한다. 오른쪽 섬은 큰포작도, 중앙의 작은 섬은 신풍도, 오른쪽 맨 뒤의 섬은 어의도이다.
"참도(站鳥)마을은 1906년(광무10)과 1932년에, 밀양 박씨(박성운)와 인동 장씨(장태평)가 지도(智島)에서 입향하였으며, 어의도와 포작도 주민들이 쉬어가는 곳이라 하여 참동 또는 참도마을이라 붙여진 지명이다." - 신안군청
"대포작도(大包作島)마을은 1506년(연산군12)과 1863년(철종14)에 인동 장씨와 수원 백씨(백남식)가 영광(군서)과 장성(삼서)에서 입향하였으며, 해산물을 보자기에 싼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신안군청
중앙의 신풍도, 오른쪽에 어의도, 흰 등대가 있는 솔섬 뒤가 만지도, 맨 왼쪽 뒤는 임자도 전장포항인 듯.
"어의도(於義島)마을은 1456년(세조2)과 1664년(현종5)에 금녕 김씨, 진주강씨(강노안)가 지도에서 입향하였으며, 소쿠리 모양으로 생겨 늘어져 있다 하여 느리섬, 느리라 부르다가 이후 한자로 표기하여 어의리라 개칭하였다." - 신안군청
무안군 해제면의 주요한 산이 조망된다. 안갈우섬 뒤 맨 왼쪽에 백학산, 중앙에 왕제산, 그 오른쪽에 봉대산이 보인다.
참도선착장 가게 앞 식탁에서 30분 동안 점심을 즐기고 출발, 오른쪽 언덕으로 올라간다.
참도 앞바다 안갈우섬 뒤 무안군 해제반도의 왕제산과 봉대산, 맞은편 산 오른쪽 아래 내양리 적동마을이 보인다.
언덕을 내려가 참도마을을 거쳐 서동마을로 이어간다.
맞은편에 보이는 마을이 원동마을인 듯. 서해랑길은 참도길을 따라가다가 오른쪽 서동길로 진입한다.
참도길에서 오른쪽 서동길로 진입하여 서동저수지 제방을 통과하여 서동마을로 내려간다.
참도마을에서 서동길로 들어와 왼쪽 위 서동저수지 제방길을 걸어 서동마을로 내려왔다.
언덕을 넘어 서동마을회관 앞으로 이어간다. 서동마을은 언덕을 넘어 있는 남쪽 서동마을과 이곳 북쪽 서동마을을 아우른다.
아래는 북쪽 서동마을이다. 참도마을(정면), 서동마을(아래 왼쪽), 원동마을(오른쪽), 봉동마을(중앙 오른쪽) 앞 봉리 간척지가 드넓다. 오른쪽 뒤 산 아래는 내양리 적동마을, 중앙 뒤쪽에 무안군 해제반도의 봉대산과 왕제산이 흐릿하지만 식별된다.
언덕을 넘어 남쪽 서동마을로 내려간다. 바로 왼쪽에 서동마을회관이 있다.
"서동(書洞)마을은 1588년경(선조대) 풍천 임씨(임경)가 남원에서 입향하였으며, 한학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다 하여 서당골이라 부르다가 이후 서동이라 하였다." - 신안군청
봉리길을 따라서 서동마을 버스정류소를 지나 오른쪽 취동마을 방향으로 진입한다.
봉리4구 취동마을이 이곳에서 1.2km 지점에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방조제를 건너 해안길을 따라 앞에 보이는 취동마을로 들어간다.
왼쪽 산 끝 취동마을 입구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간척농지 농로를 따라와서 방조제로 올라왔다.
해안을 돌아 취동마을로 들어간다. 왼쪽의 작은 섬이 작도이고, 오른쪽 흰 배가 있는 곳 왼쪽에 만지도, 맨 오른쪽은 어의도라고 추정한다.
중앙에 임자도의 끝, 맨 왼쪽에 작도, 중앙 왼쪽 흰 배가 있는 곳이 임자도 전장포항, 그 앞 섬이 만지도일 것이라 추정한다.
왼쪽에 끝이 조금 나온 섬이 임자도이며, 중앙 뒤의 섬이 어의도라고 가늠한다.
취동마을 해안을 돌아 취동마을을 거쳐 두순재뒷산 아래 농로를 따라 언덕으로 올라간다.
"취동(吹洞)마을은 1688년(숙종14) 신창표씨(표이매)가 지도에서 입향하였으며, 마을 북쪽이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 막힘 없이 바람이 마을로 불어온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신안군청
취동마을 앞 불취들을 돌아 오른쪽 두순재둣산 아래 농로를 따라 왼쪽 뒤 봉리길 언덕으로 올라간다.
불취들과 취동마을, 바다의 어의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봉리길을 따라오르다 소금출 갈림목에서 오른쪽 소금출 지역으로 내려간다. 언덕을 넘어가면, 뒷산에 금출이 있다 하여 황금마을이라 명명된 마을이 나온다.
소금출마을로 길을 들어 진행한다.
아래 보이는 동백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안내판을 살피지 못하고 그냥 통과한다.
언덕 너머의 황금마을과 관련되어 있는 듯. 이곳은 金出이 조금 나온다거나 작은 금출마을(황금마을)이라는 뜻인 듯. 서해랑길은 마을집을 돌아서 내려간다.
아래에 소금출저수지, 바다의 섬은 임자도인 듯. 서해랑길은 해안에 위치한 농장 앞 봉리길로 내려간다.
소금출마을 뒷산이 삼암봉인 듯.
서해랑길은 점암선착장 입구까지 봉리길을 따라간다.
수산물 산지가공업체인 '형제수산' 영어조합법인 앞을 통과한다. 고개를 넘어 지도읍 봉리에서 감정리로 넘어간다.
왼쪽은 수도(水島), 그 뒤에 오른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섬은 임자도(荏子島)이다.
지도읍 감정리(甘井里)와 건너편 섬 임자면(荏子面) 수도리(水島里)를 잇는 임자2대교, 수도와 임자도를 잇는 임자1대교는 뒤쪽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수도(水島)는 본래 지도군 임자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무안군 임자면에 편입, 1969년 1월 1일 무안군에서 신안군의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되었다. 1680년경(숙종6) 경주 봉씨가 최초로 이주해 오고 이후 광산 김씨 김정희가 나주에서 이주,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작은 섬인데도 물이 풍부하고 깨끗하다 하여 수도(水島)라 하였다." - 신안군청
봉리길 언덕에서 지도읍 감정리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왼쪽에 보이는 산은 두류산일 것이다. 지난 번 눈내리는 새벽의 어둠 속에서 서해랑길 29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하여 그 위치가 제대로 가늠되지 않는다. 두류산을 오른쪽으로 돌아 신안젓갈타운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30코스 역방향은 봉리길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해제지도로를 따라 점암선착장으로 이어간다.
"감정리(甘井里)는 1896년 지도군이 설치되면서 지도군 군내면의 지역으로 감정, 조비, 용산, 백련동, 금출, 점암, 고사 등 7개 마을을 합하여 감정리라 하여 무안군 지도면에 편입, 1969년 1월1일 무안군에서 신안군의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되었다. 1863년(철종 14)에 김해 김씨 김문현이 영암에서 거주하다 무안군 삼향면 대암동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이곳으로 이주해옴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덕기동(德基洞)이라 부르다가 이후 국지관이 이곳에 들러 우물물을 먹어 본 후 우물 물맛이 좋다 하여 달 '감(甘)'자와 우물 '정(井)'자를 넣어 감정리라 하라하여 감정리로 개칭되었다." - 신안군청
봉리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해제지도로로 들어서 점암선착장으로 향한다.
"점암(點岩)마을은 1738년(영조14) 김해 김씨가 지도(智島)에서 입향하였으며, 마을 땅밑이 바위로 되어 있다 하여 점바위 또는 점암(點岩)이라 하였다." - 신안군청
여객선 매표소 옆에 예쁜 화장실과 서해랑길 신안 29·30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임자대교가 완공되어서 여객선매표소는 이제 폐교처럼 버려져 있다.
신안 코스에서는 내양리방조제-일등염전-호남염전-참도선착장-점암선착장이 표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