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城 남사당 바우덕이(金岩德) 묘
*위치 : 경기 안성시 서운면 청용리 산1번지
이곳 안성 청용리 불당골 마지막 산동내 개울을 건너 가파른 산허리엔 유명한 사당패 바우덕이라는
23세의 꽂다운 女人이 묻힌 墓가 있는 곳이다. 처다보면 처마끝에 매달려있는 제비집 처럼 죽어서도
줄타기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는 듯 애잔한 마음에 가슴이 저린다.
줄타기에 쓰였던 밧줄은 바우덕이의 묘로 오르는 돌계단으로 꾸며놓은 듯, 시계 방향으로 계단을
오르면 잡티없이 손질한 아담한 묘소와 젊은 여성의 석물답게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정결하게
적당한 규모로 배치되어 있고 앞쪽은 넓은 광장으로 구경꾼들이 모이는 장소로 안성 마춤이라고
나 할가?.
바우덕이의 본명은 김암덕(金岩德)으로 조선 말기에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에서 염불, 소고춤,
줄타기 등 온갖 사당기예를 익혀 뛰어난 기량으로 유명하였고, 세상에 나가 판놀음을 벌이니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바우덕의 墓 入口>
바우덕이는 1848년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하여 1853년 안성 서운면 청룡사 안성
남사당 에 당시 5세로 입당하여 선소리, 줄타기, 풍물, 무동, 새미의 모든 남사당 공연예술을
학습하였다. 1863년에 당시 꼭두쇠 였던 윤치덕의 사망으로 바우덕이가 안성 남사당 꼭두쇠로
당시 15세에 추대되어 남사당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여성 꼭두쇠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바우덕 묘>
안성 청용리 불당골은 조선초기부터 사당패의 본거지로 유명하였다.
乙丑年(고종 2년 1865) 흥선대원군이 팔도 장정들을 동원하여 경북궁을 중수할적에 안성 바우덕이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들여 판놀음을 벌이니 장정들의 위로에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위에서 옥관자를 내리었으므로 그의 영기(令旗)를 세상에서 말하기를 "옥관자받은 旗"라
하여 우러러 봤다고 전한다.
남사당패는 풍물놀음, 꼭두각시놀음, 덧배기놀음, 버나 등 갖가지 기예(技藝)가 뛰어났다. 바우덕이
개다리패가 유명해지자 안성에는 "복만이패" "원윤덕패" "이원보패" 등 많은 남사당패가 생기었고
이로 말미암아 안성은 풍물고장이 되었다.
<안산>
1865년 ∼ 1870년까지 안성 남사당패가 “바우덕이”로 통칭되어 전국(全國)을 다니며 공연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870년 폐병으로 23세의 꽃다운 나이에 남사당 단원의 간호를 받다가 사망하니 남사당 단원
들이 바우덕이를 청룡리 골짜기에 안치하고 장례를 지냈다.
안성 남사당풍물이 유명해지면서 이런 영광의 근원이 바우덕이에 있는지라 안성유지들이 나서서
버려진 바우덕이 墓를 찾아냈고, 다시 무덤을 가꾸기 시작했다.
허물어 내린 봉분은 흙을 더 쌓아주었고 없었던 무덤 날개도 마련해 주고 제를 올릴 수 있도록 제단석
도 갖추었다.
<묘옆 계곡>
개울과 산자락 사이에 앉아있는 바우덕이 묘(墓)는 쌀쌀한 날씨지만 남향(南向)의 산자락 끝에
앉아있어 따스하고 포근한 기운(氣運)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매년 가을이 되면 경기도 안성에서는 우리들에게 생소한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축제'가 열린다.
경기도 안성시를 대표하는 축제로 우뚝 선 이 축제는 바우덕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통하여 우리의
정신문화, 전통문화가 결코 서구에 뒤떨어지지 않으며 우리의 뿌리를 갖고 있는 문화를 창출, 공유
하는 것을 탄생의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의 墓 밑에는 남사당의 민요를 적은 碑文이 있어 바우덕이 "金岩德"을........1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간다."
<민요>
푸른하늘 뭉게구름 치마만 들어도
두둥실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