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8차 남산 정기산행기
[산행기 2005~2020]/정기산행기(2013)
2013-06-18 10:50:45
길 따라 역사 따라 제 1탄
일시: 2013년 6월 16일
산행지: 남산(장충파출소-장춘단 공원-
참가자: 조길래 최거훈 정진수 박창선 김종곤 김재일....뒷풀이 박은수
- 남산 위에 서서 -
“배가 남산만하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왜 하필 부른 배를 남산에 비유하였을까?
그 남산은 서울에 있는 남산만을 이르는 것일까?
어떻든 ‘남산’은 친근한 곳으로, 전혀 낯설지 않다.
특히 서울의 남산은 상징적이다.
서울 시민들에게 남산은 앞마당 같은 곳으로,
남산타원(N타워)는 서울의 랜드마크다.
오늘 그런 남산을 올라본다.
쉬엄쉬엄 다니면서 남산의 향기를 느끼고, 역사 깊은 서울의 정취를 마음껏 만끽해본다.
출발은 지하철 3호선 6번 출구 동국대 앞 장충파출소다.
오전 9시 50분까지 집결하여 10시에 출발해보기로 한다.
10시 조금 지나자 선수들이 모두 모였다.
도합 6명, 김재일, 김종곤, 박창선, 정진수, 조길래, 그리고 최거훈(이상 가나다 순). 6인의 용사, 7인의 건달을 기대해봤는데----.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뒤풀이에 박은수가 참석하였다.
사람들은 변화를 꺼리는 것 같다.
시도하지 않았던 것, 생각해보지 않았던 방향으로 가는 것에 저항감을 느끼고, 때로는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매주 산만 타는 것에 익숙하다가, 나지막한 산을 걷고 난 다음 길 따라 역사 따라 도보여행을 한다고 하니 뭔가 내키지 않는가 보다.
산우회 게시판에 이번 산행계획을 올려놓았더니 반응이 시큰둥하다.
그러나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개혁을 망설이지 말라.
얻고자 하면 버려야 할 것이고, 벌고자 하면 비워야 할 것이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보다 가고 싶은 호기심과 열정에 사로잡혀라.
아주 조그만 것이지만 끊임없는 변화와 사고의 전환으로, 남은 생을 활기 있고 의미 있게 개척해나가자.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기들의 공감을 기대해본다.
장충단공원.
무엇이 생각나는가?
당장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공원’이 생각난다.
그 외 생각나는 것은 없는가?
‘장충단’은 잘 모르겠고, ‘장충’이라고 하니 ‘족발집’부터 먼저 생각나는가?
그렇다. ‘장충’하면, ‘장충동 족발’이고, 그 맛은 가히 세계적이다.
장충동에 있는 ‘장충동 족발’만큼 맛있는 족발은 찾기 힘들 것이다.
유래 있는 장충족발이지만, 그러나 지금은 몇몇 곳만 제 맛을 내고 있는 것 같다.
지난 6월 6일 현충일에 남산 사전답사를 위해 혼자 장충단 공원을 찾았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낯설지 않은 곳이기에 그러려니 하면서 이곳을 찾았다.
막연히 옛 시절 장충단 공원을 생각하며 찾았건만 이미 예전의 모습은 간데 없고, 엄청나게 변해있었다.
옛날의 쓸쓸하면서도 아련한 그런 장충단 공원은 이미 아니었다.
이번, 남산 등 탐방을 1탄으로 ‘길 따라 역사 따라’를 준비하면서, 나름대로 인터넷과 책 등을 살펴보면서 기본적인 역사와 스토리를 알아보았다.
당장 느낀 결론은 3무다. 정말 내가 무식, 무지, 무관심하다는 것이었다.
몰라도 너 ---무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장충단, 장충단, -----. 결코 낯설지 않은 단어이고, 지역이건만, 도대체 나는 장충단, 장충단 공원에 대해 뭘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야 말로 족발집과 동국대 입구, 그리고 태극당 등 주변지역 음식점 및 술집을 제외하고는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는 말인가?
한 없이 부끄럽고, 서글프기까지 했다.
장충단. 한자로는 獎忠壇이다.
충성을 기리는 제단이라는 뜻이다.
1900년 광무 4년에 고종의 명으로 건립되어 을미정변에 희생된 홍계훈, 이경식 등과 임오군란에 희생된 영의정 이최응 등의 영령을 제사 지냈다고 한다.
1900년 9월, 남소영이라는 군영으로 사용되던 곳을 다듬어 매년 봄, 가을에 제사지내고, 오늘의 현충원에서 하듯 군악이 연주되고 조총을 쐈다고 한다.
남산 서쪽에 자리 잡은 지금의 회현동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했고, 1900년 당시 일본 공사관이 위치했던 곳으로, 구한말 일본인들이 집결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고종은 일부러 그에 맞대 이곳에 자리를 잡아 장충단을 지었다고 한다. 1900년 9월 이라는 시점은 일본세력이 다소 위축된 상태로 고종은 그런 시점에 일본의 침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의지의 상징으로 장충단을 지었던 것이다
.
공원 가운데에 비석이 하나 있고, 그 비석 앞면에 전서체로 獎忠壇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다. 그 글씨 우측 상단에 睿筆(예필)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바, 睿筆이란 황태자나 왕세자가 직접 쓴 글씨를 의미한다고 한다. 비석 뒷면에는 민영환이 지은 글이 새겨져 있는데, 그 글을 읽으면 獎忠壇이라는 비석의 글씨는 1990년 11월 순종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장충단은 이런 곳이기에 일제는 대한제국 멸망 후 이곳을 철저히 훼손했다. 일제는 1920년대 후반부터 이곳에 자국의 국화인 벚나무 등을 대거 심어 공원으로 만들었고, 1932년에는 공원 동쪽에 박문사(博文寺)라는 사당을 세웠다. 박문사는 이등박문을 추모하기 위한 사찰이다. 사찰이 자리 잡은 언덕은 춘무산이라고 했고, 춘무는 이토의 호라고 한다.
광복 후 일제의 흔적을 지우고 장충을 회복하는 일련의 과정이 있었다.
공원 안쪽에 이준열사의 동상이 서 있고, 이준 열사는 철거된 박문사가 있던 자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공원 외곽을 따라 조금 더 돌면 구한 말 외교가인 이한응 선생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그 외에도 장충단 공원에는 외솔 최현배 선생을 기리는 기념탑이 있고, 청계천에서 옮겨온 수표교가 있으며, 리틀야구단 야구장도 인근에 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철저히 부정하려고 했고, 그러한 모습들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의 그런 모습 상당부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만 아직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가까이 다가가면 새삼스러운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미 지나버린 과거에, 역사에 너무 연연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리고 미래를 살아갈 우리 후손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삶을 결정짓고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깨우쳐야 할 것으로, 끝없는 사색과 탐구가 필요할 것 같다.
(2부 계속됩니다....comming s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