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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43)
마노아의 기도
본문 : 삿13:8-23
성경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이스라엘 역사는 모든 인류의
역사의 표본입니다.
늘 반복하며 죄를 짓는
그들의 모습은
모든 인류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성경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면
같은 죄를 반복해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베푼 은혜가
자손 대대로 이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늘 “기억하라”, “가르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한 세대만 지나가고
하나님을 잊기 일쑤였습니다.
특히 사사시대는 세대 간
단절이 명확히 나타났습니다.
다음 세대는 다른 세대가 되어
늘 하나님을 잊었고,
그 결과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파셨습니다”(10:7).
그리고 그 고통은 4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고통이 찾아와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만큼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황폐해져 있다는 반증이었습니다.
<나실인 삼손>
그래서 하나님께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의 손길을 내미시는 것입니다.
삼손이라는 특별한 사람을
세우시려고 계획하셨습니다.
단지파의 소라 땅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가정에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의 부인에게 나타나
특별한 수태고지를 하십니다.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붙습니다.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죽는 날까지(13:7)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실인’의 어원인 ‘나지르’(nazir)는
‘구별된 자’ 혹은 ‘헌신된 자’라는 뜻입니다.
나실인의 규례는 민 6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나실인은 몸을 구별하는 동안
세 가지가 금지됩니다.
첫 번째는 포도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라도 먹지 말아야 했고(민6:3-4),
두 번째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아야 했고(민6:5),
그리고 세 번째는 시체나 부정한 것에
접촉하지 말아야 했습니다(민6:6-7).
한마디로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나실인’은 어떤 특별한 이유로
인해 일정 기간 구별하여 지내겠다고
본인이 서원함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삼손의 경우에는 삼손 자신도 아니고,
그의 부모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심으로 나실인이 되었습니다.
<마노아의 기도>....
아내의 이야기를 들은 마노아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8절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께서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오게 하사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하니.”
아내로부터 아들이 생길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마노아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는 두 가지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자를
자신도 만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이유입니다. 불신해서라 아니라
그 낳을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분명히 가르쳐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9-12절>
9절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였으나
그의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10절 여인이 급히 달려가서
그의 남편에게 알리어 이르되
보소서 전일에 내게 오셨던
그 사람이 내게 나타났나이다 하매
11절 마노아가 일어나 아내를 따라가서
그 사람에게 이르러 그에게 묻되
당신이 이 여인에게 말씀하신
그 사람이니이까 하니
이르되 내가 그로다 하니라
12절 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하나님은 마노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아내가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를 다시 보내주셨습니다.
아마도 밭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마노아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의 아내가 밭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
마노아가 빈둥빈둥 집에서 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역할이 다른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양 떼를 치고 있든지
아마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급히 달려가서 남편에게 전날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났음을 알리고 데려왔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마노아는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12절)하고 묻습니다.
마노아의 신앙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자신에게 주신 자녀가 철저히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녀에 대해 무엇이라고 가르칩니까?
성경은 자녀에 대하여 교훈하기를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상급”(시127:3-5)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식을 자기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함부로 자식의 생명까지
빼앗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자녀는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내 맘대로 할 수 없습니다.
자녀는 우리에게 양육을 위탁한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식대로 양육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를
철저히 가르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쉐마교육 – 신6:4-9>
4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절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절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절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절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바울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마노아의 질문은
참 신앙적이고 바람직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이전에
그의 부인에게 했던 말씀을
다시 가르쳐주셨습니다.
<13-14절>
13절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14절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하니라.”
이것은 그에게 주시는 아들이
나실인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에게 포도주와 독주와 부정한
음식은 먹지 말고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키라는 것입니다.
당시 포도주는 일상화된 음료였습니다.
독일사람들에게 맥주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포도주를 마시게 하지 말라는 것은
시대 분위기, 시대 문화에 발맞추어
키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그대로
다 해보면서 살도록 하면
나실인으로 키울 수 없습니다.
할 짓, 못 할 짓 다 하면서
많은 경험을 갖도록 도우면
풍성한 사람이 될 것 같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한 것은 아주 천천히 배우지만
악한 것은 아주 빨리 물들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려면
세상과 다른 가치관과
다른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마노아 부부에게
아이를 세상에 물들이지 않는 사람으로
키우도록 방향을 준 것입니다.
꼭 기억할 것은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다 영적인 나실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지켜야 하는 방법은 다를 수 있지만
목표는 같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고전10:23-24>
23절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10:31-33>
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절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절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삶,
바로 이것이 영적 나실인으로
부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적 모습입니다.
<대접하려는 마노아>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에게
음식을 대접하려고 합니다.
15절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하니.”
당시 유목민에게 염소는
대단히 큰 재산이며,
염소 새끼를 잡아 대접한다는 것은
손님에 대한 ‘최상의 접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는
이를 거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6절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이렇게 대답함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역사의 원인,
곧 아들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고자 함입니다.
내가 음식을 대접하지 말고,
마땅히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의 궁극적인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사람에게 대한 예의와
감사의 표현도 마땅히 해야겠지요.
그러나 모든 일의 궁극적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 이름은 기묘자>.....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의 이름을 묻습니다.
17절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하니.”
이는 아직도 하나님의 사자를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가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18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기묘자’라는 말은 히브리어 펠리(phely)라는 말인데,
공동번역에서는 ‘비밀’(secret)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 성경엔 wonderful, secret,
혹은 “beyond understand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우리의 이성을 초월해서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로 예측 가능한,
측량 가능한 그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경계의 너머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러하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역사 방법이
그러합니다(요셉).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고”
타락한(반복하여 악을 행하면서도,
그리고 징계를 받으면서도 회개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역시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그 때에 새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다 쓰러져가는 단지파에서,
더군다나 자녀 하나 없는 마노아 가정을 통해
구원역사를 하신다고 하십니다.
에브라임 지파나 유다 지파의 명
문 가문도 아닌데 ...
당시 누가 이런 하나님의 손길을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이름은
‘기묘자’라고 소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그것도 가장 낮은 곳에 보내주시고,
가장 비참한 죽음으로 ...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것이
기묘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를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후에 나오는 삼손 이야기는
그 허물 많고 실패를 반복하는
삼손 곁에서 그의 손을 잡고 동행해 주시고,
기다리고 인내하다 기어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비밀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기묘입니다.
언제나 역사의 최후 승리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끝까지 가보면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이깁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기묘한 방식으로,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beyond understanding)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세상을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아물 힘들어도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적을 체험하는 마노아>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의 말씀대로
염소 새끼를 번제로 드렸습니다.
<19-20절>
19절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이적이 일어난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20절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취하여
반석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가셨습니다.
그들에게 아들이 있을 것을
예언하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본 마노아 부부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1-22절>
21절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22절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
사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본 자는 죽습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출33:20에서
“내 얼굴을 보는 자는 죽으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를 때에도
아무도 산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여호와의 영광을
뵈온 후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사6:5)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노아가 이러한 반응을
보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실체를 본 자는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거나
하나님의 대리인 곧 사자를 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노아 부부도
하나님의 실체를 본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를 본 것입니다.
성경은 성부 하나님을 본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딤전6:16).
요일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말은
어리석은 말입니다.
우리의 육안으로 하나님의 실체를
볼 수 없고 보아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자들입니다.
어쨌든 마노아가 본 이는
말 그대로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그의 아내가 마노아에게
이렇게 위로합니다.
23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맞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의 사자는 특별한 목적,
곧 수태고지를 위해,..
그리고 마노와의 기도에
응답하기 위해 오신 것임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영적 안목을
가지고 있는 지혜로운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맺는 말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를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마노아는 참 지혜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바른 질문을 통해 바른 해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마노아는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12절)하고 묻습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바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려면 저는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이 질문을 던질 때
하나님의 지혜의 영이 임합니다.
마노아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임하였듯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바른 질문을 던질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임재하셔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질 때
온전히 순종하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