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에 일본 고관(高官) 암살과 관공서 폭파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0년대 말부터는 급진적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다. 1919년 3·1운동 뒤,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해외로 옮긴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더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필요에 따라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지린성에서 독립지사들은 민족주의 노선(路線)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抗日秘密結社)인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이 이름은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고 한데서 유래한다.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들이 미온적이고 온건하다고 본 의열단은 직접적 투쟁방법인 암살과 파괴·폭파라는 과격한 방법을 통해 독립운동을 해나기로 했다.
창단 당시의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이 중심이 되었다. 고문으로는 김대지(金大池)·황상규(黃尙圭)가 맡았고, 단원으로는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곽경(郭敬)·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鐘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喆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권준(權俊)의 13명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창단 직후 ‘공약 10조’와 뒤에 ‘5파괴’, ‘7가살(可殺)’이라는 행동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공약 10조는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이와 같이 의열단은 조국독립을 위해 과감하고 과격한 적극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고 있으며, 암살대상으로는 조선총독 이하 고관·군부수뇌·타이완총독·매국노·친일파거두·적탐(밀정)·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을 지적하였다. 한편, 파괴대상으로는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각 경찰서·기타 왜적의 중요기관을 선정하고 이 시설에 대한 폭파를 의도했다. 이를 위해 의열단은 폭탄제조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초기 의열단의 의거활동으로는 ① 밀양·진영폭탄반입사건 ②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③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④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 ⑤ 상하이 황포탄 의거 ⑥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삼판통·효제동 의거 ⑦ 제2차 암살파괴계획 ⑧ 도쿄[東京] 니주바시[二重橋]폭탄투척 사건 ⑨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등을 들 수 있다.
의열단의 경륜과 강령을 체계화한 신채호(申采浩)는 1923년 1월에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에서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문화주의(文化主義)·외교론(外交論) ·준비론(準備論) 등의 입장을 비판하고 민중에 의한 직접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독립노선을 제시하였다. 신채호는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民衆革命)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내걸었던 것이다.
의열단은 독립운동에서 퍼져나가고 있던 사회주의 이론을 1926년부터 점차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변화는 1928년 10월 조선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가 발표한 ‘창단 9주년기념 성명’에서 잘 나타난다.
의열단은 이를 계기로 순수한 민족주의 노선에서 계급적 입장까지도 고려한 급진적 민족주의 내지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1929년 12월 베이징[北京]에서는 ML파와 합동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였는데, 의열단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급진좌파로 변신해갔다.
의열단은 창단한 얼마 뒤에 근거지를 지린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고, 상하이[上海] 지방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1924년경에는 약 70여 명의 단원을 이룰 수 있었다. 후일 한국민족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김창숙(金昌淑)·신채호 등이 실질상의 고문 역할을 했고,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총통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열단 [義烈團]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첫댓글 항일(抗日) 독립(獨立) 운동(運動) 단체(團體)의 하나. 1919년 11월 10일 만주(滿洲) 지린성(吉林省)에서 조직(組織)되었는데 일정(一定)한 본거지(本據地)가 없이 각지(各地)에 흩어져 폭력(暴力)으로 일본(日本) 관헌(官憲)과 관청(官廳)을 암살(暗殺), 파괴(破壞)했음. 조직(組織) 당시(當時)의 단원(團員)은 김원봉(金元鳳), 이성우(李成宇), 곽재기(郭在驥), 강세우(姜世宇), 이종암(李鍾巖), 한봉근(韓鳳根), 한봉인(韓鳳仁), 김상윤(金相潤), 신철휴(申喆休), 배동선(裵東宣), 서상락(徐相洛) 등(等) 13명이었으며, 부산(釜山) 경찰서(警察署) 폭파(爆破) 사건(事件), 밀양(密陽) 경찰서(警察署) 습격(襲擊) 사건(事件), 총독부(總督府) 습격(襲擊) 사건(事件), 황포탄 사건(事件), 종로 경찰서(警察署) 사건(事件), 니주바시 사건(事件), 동양(東洋) 척식 회사(會社) 폭파(爆破) 사건(事件), 황옥경부 사건(事件) 등(等)은 모두 의열단원(義烈團員)이 거사(擧事)한 사건(事件)임.
김원봉
1919 의열단(만주/지린성)
1921 김익상 조선총독부
1923 김상옥 종로경찰서
1924 김지섭 일본 궁성
1926 나석주 동양척식주식회사
1926 황포군관학교 유학 (의열단원)
1931 조선혁명간부학교 교장 (김원봉)
1935 민족혁명당 김원봉 지청천 조소앙
1937 조선민족전선연맹 / 조선민족혁명당
1938 조선의용대 김원본 (우한/한커우)
1942 한국광복군 합류 (조선의용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