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상 2:29-30(411)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성도 2022.11.27.
금세기 최고의 가스펠 가수를 손꼽으라고 말하면, 가스펠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들은 조지 베버리 쉐아(George Beverly Shea, 1909-2013)를 선택합니다. 쉐어는 캐나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타고난 아름다운 목소리로 인하여 교회보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꿈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방송국 공개홀에서 ‘가라 모세’를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미 NBC 방송국의 전속가수 요청을 받게 됩니다. 이때 그의 나이 일약 23세였습니다.
앞에는 돈과 인기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방송국에서 세상의 노래를 부르면 돈방석에 앉는 것은 보장되었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을 부모님에게 듣게 됩니다. 며칠을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던 주일 아침입니다. 우연히 피아노 위에서 놓여진 종이 하나를 발견합니다. 거기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금이나 은보다 차라리 주 예수를 가지라. 큰 재물을 갖느니보다 차라리 주 예수의 것이 되겠네. 큰 집과 넓은 땅을 갖느니보다 차라리 주 예수를 가지라. 못 박힌 손에 이끌림이 차라리 나으리라.”
어머니가 평소 애송하던 레아 밀러(Rhea Miller, 1894-1966)의 시였습니다. 종이에 적혀져 있던 시를 읽어 내려가던 그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세상과 하나님, 돈과 신앙을 놓거 저울질하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리고는 그 시에다가 바로 자신이 곡을 붙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찬송이 금세기 최고의 가스펠이라 불리는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그는 찬송을 부르면서 고백합니다. “긴 시간 동안 주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이제 주님만이 참된 행복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로서 삶을 살겠습니다.”
그 후 빌리 그레이엄 부흥단에 들어가 노래하는 전도자가 되어 찬송을 불러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1983년 74세가 된 백발의 조지 베버리 쉐아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전도대회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 설교 후에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찬양합니다. 이에 빌리그레함 목사님은 ‘조지 베버리 쉐아,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소개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존중(尊重)’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 뜻은 ‘의견이나 사람을 높이어 귀중하게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고, 사람이 동물들과 다르게 인격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이 바로 ‘존중히 여기는’ 모습이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작금의 대한민국을 보면 도무지 타인에 대한 배려라든지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발견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전장터에서 적군을 만난 군인처럼 ‘저 놈을 내가 먼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 있다’는 살벌한 의식이 전제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한솥밥을 먹는 동료에 대한 존중도 없습니다. 부부간에 존중도 없고, 가족 구성원간에 존중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담임목사와 당회에 대한 존중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의식보다는 내 것만 먼저 챙기는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전 한국 정치에는 비록 여당과 야당으로 나뉘어져 있어도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은 있었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존중이 있었고 여당은 야당에 대한, 그리고 야당은 여당에 대한 존중을 상식적으로 실천은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존중의 정치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길거리 깡패처럼 입에 담기 어려운 말로 대통령과 영부인을 거리 작부로 취급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개딸’이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들의 패거리에 들지 않으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죽이겠다는 극단적 혐오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런 더럽고 저열한 한국정치가 한국사회의 정신세계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을 존중하듯이 모든 것에 대해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성도가 보여야 하는 존중의 태도로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개성 존중(Respect for individuality) -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다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지구상 70억 인구 중에 똑같은 얼굴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한배에 동시에 태어난 쌍둥이조차 외모가 다르고 성격과 생각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나와 다르다고 해서 무시하고 배척하기 보다는 나와 다른 차이점을 인정하고 그 사람만이 가진 개성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입은 인간을 사랑하는 첫걸음입니다.
2)생명 존중(Respect for life) - 하나님의 사랑으로 태어난 모든 생명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연을 다스리고 정복할 대상으로 주셨지만, 자연의 모든 것을 마구잡이로 학대하고 사용할 권리까지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이름 모를 작은 잡초 한 포기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며 보존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만물에 대한 존중의 모습입니다.
3)인간 존중(Respect for human beings) - 인간 존중의 모습은 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상대방을 존중한다고 한다면 상대방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존중할 수 있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증오감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 5:44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철천지 원수라도 사랑해라는 말은 그 사람 또한 소중한 생명체이므로 인간 존중이라는 큰 바탕 속에서 살펴 보라는 말씀입니다.
4)인권 존중(Respect for human rights) - 오늘날 전 세계에 가장 화두가 되고 있는 단어입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억압을 받는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회교국가인 이란에서는 날마다 수 십 명이 죽어가는 데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성은 머리에 히잡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20대 젊은 여성이 사망한 사건이 시발점입니다.
단순하게 히잡 문제이지만, 근본적 문제는 회교나라에서는 여성과 어린아이에 대한 인권이 없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아무리 성인 여성이라고 해도 남성 보호자가 없으면 혼자서 바깥 외출이 안 됩니다. 자전거도 탈 수 없고 운전도 할 수 없습니다. 남자는 5명까지의 여자를 아내로 둘 수 있지만, 여자는 오로지 한 남편뿐입니다. 여기에 어긋나면 돌팔매로 죽임을 당합니다.
노동자의 인권이 보장받아야 되는 것처럼, 회사 사장이라고 해서 마구잡이로 비난해서도 안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모든 인권이 다 존중을 받는 것입니다. 장애인이 차별받아서도 안 되지만, 장애인을 먼저 챙긴다고 정상인이 역차별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장애인차별금지법)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존중하듯이 서로에 대한 존중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삼가 노력하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사무엘의 경건한 성장과 엘리 제사장 아들들의 패역한 모습을 대비하면서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가 하나님에게 존중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을 보고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존중받아도 좋은데 하물며 하나님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 복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존중히 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1. 예배를 귀히 여기는 성도가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입니다.
‘순종(under cover)’의 저자 존 비비어(John Bevere, 1959 ~ )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남동부 교회에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초청을 받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짜에 그 지역 교도소에서도 예배를 인도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옵니다. 교도소는 주일 오전 8시에 예배가 있고 교회는 11시에 예배가 시작되기에 예배시간이 겹치지 않아서 비비어 목사는 허락합니다.
주일 아침이 되어 교도소에 갔는데 100여명의 재소자들이 찬송하고 있었습니다. 죄를 짓고 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들이 드리는 예배에 비비어 목사가 큰 은혜를 받습니다. 말씀을 전하러 갔다고 도리어 자신이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100여명의 재소자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경청합니다.
그들의 행동 속에서 하나님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신들을 찾아와 말씀을 주신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예배를 귀히 여기는 마음이 넘칩니다. 범죄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날에 성령이 충만하고 병이 낫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교도소 예배가 끝난 후, 비비어 목사는 초청받은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놀랍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고 출발합니다. 초대받은 교회에서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분위기가 너무 굳어 있었고 숨이 막히는듯 한 시간을 보냅니다. 설교 말씀은 벽에 부딛쳐서 다시 돌아오는 느낌을 계속 받습니다.
교인들의 얼굴을 보니 마치 비비어 목사를 이렇게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은 이미 다 들어본 얘기다. 유명한 강사의 설교도 많이 들어봤다. 당신이라고 뭐 다른 내용이 있겠는가?”교인들의 얼굴에는 설교와 목사에 대한 존중감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같은 목사에 의해 드려진 같은 예배인데 교도소와 교회가 왜 이렇게 차이가 났을까요?
그것은 예배를 존중히 여기는 태도의 차이였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에게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싶다면, 먼저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를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29절,“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네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하게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를 살지게 하느냐.”
여기의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는 원어로 ‘티브아트 뻬지브히 우베미느하티’인데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사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사제물을 마구 대하면서 자신들의 욕심만을 먼저 드러내었습니다. 예배를 가볍고 우습게 여기는 이런 행동에 대해 성경은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예배를 더럽히는 사람들입니다.
‘예배의 수준을 능가하는 삶도 없고, 삶을 능가하는 예배도 없습니다.’ 이 말은 성도의 삶에 있어서 예배가 가장 소중한 기본적인 모습이라는 점입니다. 예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숫자가 많다고 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고, 숫자가 적다고 해서 하나님이 거부하는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예배를 가장 소중한 헌신의 모습으로 생각하고 예배를 드리는 성도의 모습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를 소중한 헌신의 모습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존중하는 모습이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복이 나에게 임하는 축복의 선순환이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존중의 모습입니다.
30절,“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약속하고 확인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보증서고 하나님께서 확증한 것이므로 아무런 이의나 잘못이 없다는 뜻과 같은 말입니다.
얼마 전에 사상구에 있는 사회복지법인에 제가 사외이사로 추천이 되어 서류를 준비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 인감도장이 필요해서 동사무소 가서 인감증명을 발급받으면서 제목을‘사외이사 추천용’이라 적고 발급받은 적이 있습니다.
인감증명은 재산상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에 발급절차와 내용이 매우 까다롭습니다. 그렇게 발급받은 인감증명서는 위조를 방지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장치가 부착된 체 발부됩니다. 즉 공식적으로 발급된 모든 서류는 국가에서 보장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증서고, 하나님이 증명하기 때문에 아무런 하자가 없이 완벽한 증명이라는 뜻이 됩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보증하는 빽보다 더 쎈 것이 하나님의 말씀 보증입니다. 지금 더불어 민주당에서는 이재명대표가 최고 빽이라고 말합니다. 말하기 더러운 수많은 죄를 짓고도 이재명 빽이 무서워서 다들 눈치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헛된 사람의 빽은 한순간 무너지고 사라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악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행위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이라고 책망 받았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제사 드리는 사람이 가져야 할 부분까지 빼앗으며 하나님의 것마저 가로챘습니다.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내 감정대로, 행동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길 때 하나님이 존중히 여겨주십니다.
13세기 페르시아 신비주의 시인 루미 (Jalal ad-din Rumi 1207-1273)가 들려주는 우화입니다. 중국인과 희랍인이 누가 더 훌륭한 예술을 하는지 말다툼을 벌이다가 시합을 하기로 했습니다. 왕은 두 사람에게 방을 하나씩 주어 누가 더 예술적으로 꾸미는지 알아보기로 합니다.
큰 방 가운데 휘장을 쳐서 방을 나누어서, 방의 이편과 저편에서 각자의 벽면을 꾸미기로 합니다. 중국인은 왕에게 100여 가지 물감과 붓을 요구하여 밤낮으로 벽에 그림을 그립니다. 그런데 희랍인은 물감에 손도 대지 않습니다. 다만 벽을 닦아 광을 내기 시작합니다. 날마다 벽을 닦고 또 닦아, 마침내 하늘처럼 순수하고 깨끗하게 만듭니다. 중국인은 여러 가지 색깔로 벽을 장식하는 길을 택했지만, 희랍인은 아무 색도 그려지지 않은 무색의 길을 택합니다.
마침내 약속된 날이 왔습니다. 중국인은 작업을 마치고 행복해 합니다. 완성의 기쁨에 취해 큰 북을 치기까지 합니다. 그의 방에 들어간 왕은 현란한 색깔과 세밀함에 감탄합니다. 중국인의 자화자찬이 끝난 후, 가로막혔던 휘장을 걷어 버립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중국인이 그려놓은 온갖 형상이 그대로 희랍인이 말갛게 닦아놓은 벽에 비치는데, 거기서 그림은 빛에 따라 몸을 바꾸며 더욱 아름답게 살아납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벽에 비치는 그림이 천만가지 모습으로 탈바꿈하면서 희랍인이 우승합니다.
아름다움의 길은 인위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깨끗이 닦는 길임을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기본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충실히 살면 삶은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존중히 여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예배를 귀하게 여기는 모습이며, 하나님을 존중하는 모습이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을 너무 어렵고 힘들게 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의 길에서는 항상 부족한 모습만을 발견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에게 존중을 받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즐겁게 신앙생활하면서 다가오는 12월을 아름답게 사용하는 모든 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면 하나님이 존중히 여길 것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는 내가 경멸하리라”는 말씀을 가슴에 담고 생활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