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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과 두 명의 소녀
The full moon and Two girls
눈을 뜨니 내가 지금 다니는 학교와는 조금 다른 공간이 들어왔다. 이곳이 내가 다녔던 중학교라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 또 이 꿈이다. 1년동안 나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는 악몽이다.
학교가 떠들썩했다. 얼핏보면 학교에 좋은 일이라도 생긴 줄 알겠지. 당시에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다 서서히 수군거림 사이에서 불쌍하다느니, 안타깝다느니 하는 연민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그 목소리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안다. 더는 듣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어 방향을 틀어버리려고 해도 절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아날로그 시계의 침이 흘러가는 소리와 함께 저절로 발걸음이 움직여졌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씩 교실로 들어서게 되면, 반 친구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나의 앞으로 달려온다.
“저.. 민진아. 너도 그 소식 들었어?”
그 애는 조심히 물었다. 그리고 내가 대답할 타이밍도 주지 않은 채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그.. 왜 그 친구 있잖아. 너랑 전에 잠깐 붙어다녔던 8반에 그 애.. 이름이 정채윤이었던가…?”
친구는 이번엔 내 답을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뜸을 들였다.
“......정채윤이 왜..?”
“글쎄 걔가, 며칠전에 자살했대!!”
내가 마지못해 대답을 하면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외친다. 그 탓에 아무 관심도 없던 교실 안의 다른 친구들의 시선까지도 이쪽으로 집중된다. 순식간에 우리반 교실도 다른 반처럼 떠들썩해졌다.
더는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귀를 막으면, 눈이 떠지고 다시 주변을 살폈을 땐 내 방이 보인다. 그러면서 나의 지독한 악몽은 막을 내린다.
*
1년전에 죽은 옛날 친구가 나오는 꿈에서 해방되면 급하게 등교 준비를 해야한다. 침대에서 터덜터덜 일어나 머리를 감고 말리려고 거울에 서면 그 안에 비춰지는 내 꼴이 영 말이 아니다. 끼니를 자주 거르면서 수척해진 얼굴과 악몽으로 인해 잠을 자주 설치면서 생긴 다크서클 등이 나의 상태를 대변했다.
그 아이가 죽은 이유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나는 그 애랑 꽤 오랜시간동안 친하게 지냈지만 그 애가 죽기 반년전에 인연을 완전히 끊었기에 그 뒤로의 소식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이따금씩 그 애의 교실을 지나갈 때 그쪽 반 친구들한테 둘러쌓여있는 모습을 보았던 적은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인연을 끊어버린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에는 같은반이어서 친했다가, 반이 갈라지는 경우가 많아지며 자연스럽게 거리감이 생기게 되었고, 중학교 3학년 초반. 나에게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리고 그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애, 그러니까 정채윤을 향한 전교생의 평판이 영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새로 사귀었던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누가 말을 걸어도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흔히 말하는 인싸라는 애들한테도 그 태도가 변함이 없어 아예 배짱이 글러먹은 애. 그래서 나도 그 애랑 같이 지내는건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어쩌면 나까지 안좋게 보여질 수 있다고 그랬다. 그래서 나는 채윤이와의 인연을 정리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계속 연락은 하면서 지냈을 것이다. 지금처럼 밤마다 매번 악몽을 꾸고, 무거운 마음으로 겨우겨우 일어나 하루를 시작할 줄 알았다면. 나는 오늘도 마음 속에 큰 짐을 진 채 하루를 시작한다.
*
교문 근처에 도착할 즈음에 종이 울렸다. 고등학교 입학 이래로 등교를 제시간에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처음엔 나한테 은근히 눈치를 주시던 담임 선생님도 이제는 거의 포기한 모양인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반 애들도 익숙한 상황이라는 듯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오직 중학교 때 친구 한 명만이 나를 걱정스럽게 한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조회가 끝난 뒤에 그 친구가 내 자리로 찾아와 말을 걸었다. 기척이 너무 없었던 탓에 내 곁으로 온 줄도 몰랐다.
“야 너 오늘 방과후에 시간 있냐? 있겠지 뭐.”
“....... 나한테 원하는게 뭔데.”
“학교 끝나고 잠깐 나랑 어디 좀 가자. 너 이대로는 못 지켜보겠어.”
친구는 갑자기 통보하는 식으로 말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정채윤의 자살 사건 뒤로는 별로 대화를 하지 않고 지내던 친구의 모습에 의아해하기도 전에 수업이 시작되었다.
늘 그렇듯 얼렁뚱땅 수업이 끝났다. 아침에 말을 걸고 그 뒤로는 아무런 말이 없던 친구가 금새 하교 준비를 마치고 내 자리 앞으로 찾아왔다. 날 어딘가로 데려가겠다는 말은 진심인 모양이었다. 나도 준비를 평소보다 빠르게 마치고 친구를 따라 나섰다. 우리가 향한 곳은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천막이었다. 활기차고 시끌벅적한 양 옆의 다른 가게들 사이에서 진한 보랏빛이 감도는 시커먼 천막의 존재감은 상당했다. 시내로 오는 내내 별 말이 없던 친구는 이 천막 앞에 멈춰선 뒤에야 다시 말을 꺼냈다.
“전에 지인이 그러던데, 여기서 보는 점이 그렇게 잘 맞는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다시 튀어나온 말은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이 친구가 예전부터 영 뭔 생각인지 파악하기가 힘들고, 알기 힘든 소리도 자주 하던 친구였지만 영문도 모른 채로 이상한 곳에 끌려온 상태에서도 전혀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말을 하니 어이가 없었다.
“이상한 거 시킬 생각이면 난 그만 돌아갈게.”
“왜?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기분 전환한다 치고 한번만 봐봐.”
“아니 그러니까 나는—”
“솔직히 말해봐. 너 요즘도 전에 죽은 그 애 때문에 고생하고 있잖아?”
내 의심의 목소리들은 친구의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에 그대로 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혹시 모르잖아? 어쩌면 오늘 여기에 왔던 게 계기가 되어서 그날의 기억에서 좀 해방될지도 모르고.”
마음을 돌리려고 그냥 한 말이란 걸 어느정도 느꼈음에도 이상하게 그 말이 썩 괜찮게 들렸다. 결국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조심히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는 키가 작은 중년의 여성이 천을 머리에 두른 채 책상을 앞에 둔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 여자는 우리가 들어온 것을 곧바로 확인한 후 자신의 앞에 놓인 책상을 몇번 두드렸다.
“어서오세요. 간만에 온 손님이군요~”
어째 목소리가 영 꺼림칙해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도망칠 뻔했다.
“제게 볼 일이 있으신 분은 어느 쪽인지.. 혹시 알 수 있을까요? 저쪽에 있는 의자를 가져와서 앞에 앉아주시겠어요?””
그 여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친구는 나를 슬쩍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재촉하는 듯한 태도에 나는 마지못해 의자를 가져와 그 여자의 앞에 앉았다. 내가 앉은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녀는 책상 아래에서 카드 몇 장을 꺼낸 뒤 뒤집어진 채로 앞에 늘어놓았다.
그녀는 나한테 책상에 놓여있는 네 장의 타로 카드처럼 보이는 카드들 중 딱 한 장만 골라서 뒤집어 달라고 했다.
대충 아무 카드나 골라 뒤집으니 크고 노란 보름달과 그 앞에 여자아이 두 명이 손을 맞잡고 있는 그림의 카드를 뽑았다. 카드를 뽑은 순간 어딘가 굉장히 꺼림칙함을 느꼈다. 채윤이가 살아있을 때, 타로 카드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의 기억에 따르면 이런 모양의 타로 카드는 없었다.
“흠흠.. 뒤집으셨으면 저한테 주시죠..”
내가 카드를 뽑은 채 멍하니 있자 여자는 헛기침을 몇번 하면서 자신한테 카드를 주기를 재촉했다. 그 여자는 카드를 돌려받고 잠시 말이 없다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마음에 변화가 생길 아주 큰 일이 한 번 있을겁니다. 그 한 번의 큰일이 너무나도 터무니없고 현실감이 없게 느껴지실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일을 겪으신 뒤에는 지금보다 한결 나은 나날이 펼쳐질 것 입니다. 당신 마음 속의 가장 큰 짐도 사라질 겁니다.”
나한테 마음의 짐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은 신기했지만 나머지 말은 나조차도 할 수 있을 법한 말들이라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이런 사이비 같은 거에 돈을 내야한다고 생각하니 화가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이런 내 기분을 눈치채기라도 한 모양인지 간만에 온 손님이니 특별히 요금을 받지는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뽑았던 그 카드는 기념이라면서 선물로 받았다.
친구랑 시내에서 나온 뒤 나는 다시는 이런 것 때문에 나를 부르지 말아달라고 누누히 통보를 한 뒤 헤어졌다. 기분 전환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기분이 더 나빠져버렸다.
집 앞 횡단보도에 서서 그 천막에서 뽑았던 카드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도대체 어느 면에서 그 카드가 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호가 바뀌고 나는 그 카드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길을 건넜다. 그 여자가 했던 말도 한번 되짚어보았다.
“.....마음에 변화가 생길 아주 큰 일이 한 번 있을겁니다…..”
말을 한마디 한마디씩 할 수록 걸음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졌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차 한 대가 내 쪽으로 빠르게 돌진하고 있었다. 놀라서 뭐라 반응도 하기 전에 그 차는 나를 빠르게 치고 지나갔다. 신호는 아직 바뀌지 않았고 이쪽은 어린 아이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곳이라 원래 차들이 빠르게 달리지 않는 곳인데. 요즘은 드라마에서도 거의 그런 전개가 나한테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었다.
의식이 사라져가는 순간, 치이기 전에 되뇌이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음에 변화가 생길 아주 큰 일이 한 번 있을겁니다.’
내가 겪은 큰일이라는게 이 사고라는 뜻인걸까? 내가 이렇게 죽음으로 인해서 모든 근심과 걱정들이 사라질 거라는 뜻이었던 걸까.
*
눈이 다시 번쩍 떠졌다. 그리고 어째선지 몸이 가볍게 일으켜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내 방이었다. 근데 몇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의자에는 중학교 때 교복의 넥타이가 걸려있었고 책상 위에는 중학교 3학년 때의 학사력이 놓여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충전 중이던 폰을 켠 뒤에야 조금은 상황이 파악되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은 1년전 과거이다.
아직은 정채윤도 살아있을 때.
조금 더 생각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았지만 이른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은 학교를 가기로 했다.
중학교 3학년 때의 교실을 찾아 들어가니 그 당시의 무리 친구들이 나를 반겨줬다. 밝은 목소리로 웃으면서 반기는 그 당시 친구들의 모습이 고등학생이 된 후 등교했을 때의 싸늘하고 적막한 분위기랑 너무나도 반대되는 나머지 그 인사를 받아들이는 게 어색했다.
다행인건 그 모습이 많이 티가 나지는 않았는지 반기는 친구들 중에서는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딱 한명만 빼고.
“지율아!! 너도 와서 민진이한테 인사해야지!!”
내 앞에 있던 친구 중 한 명이 혼자 자리에 앉아서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그 애의 시선이 거둬지질 않자 나도 똑같이 그 애를 빤히 쳐다보았다.
박지율.
당시에도 말 수가 적고 가끔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독특한 친구.
등교한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네는 친구들 하고는 다 고등학교가 갈라지고 난 후에 헤어졌지만,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아직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친구. 그리고 나한테 그 점을 보라고 한 친구.
박지율의 눈빛은 그 점쟁이의 천막에 들어가기 전에 나를 쳐다보던 눈빛이랑 똑같았다.
그래서인지 나도 눈을 차마 떼지 못하고 계속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박지율이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너.. 조민진 맞지?”
“지율아..? 갑자기 왜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매일 보는 친구를 까먹으면 어떡해…”
“너한테 말 건거 아니야.”
불쑥 찾아와서는 이상한 말을 내뱉으니 다른 애들이 슬쩍 눈치를 주었다. 그럼에도 박지율은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똑같은 질문을 했다. 아무래도 내 답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당연한 소리 아니야..? 내가 조민진이지 아니면 누가 조민진이겠어..?”
“아 그래? 그럼 됐어..”
제 볼일은 끝난건지 박지율은 고개만 끄덕이고 바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이런 모습이 고등학생인 지금이랑 똑같아서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도 이유 없이 하는 애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잠시 자리에 앉으려는 박지율을 붙잡았다.
“근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내 질문에 박지율은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금방 입을 열었다.
“그냥 너가… 평소랑 상태가 좀 달라 보였어.”
*
간만에 보내는 중학교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학교에 여자애들 밖에 없어서 잘생긴 남자애들은 왜이렇게 안보이냐면서 투덜거리는 모습은 현재랑 똑같았지만 그래도 그때만의 순수한 분위기가 있어서 보기 좋았다. 전에 봤던 점의 내용처럼 조금은 진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무언가가 꽉 막힌 듯한 기분이 계속 들었다.
출처를 전혀 알 수 없는 감정에 당황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와중에 우연히 복도 쪽 창문을 쳐다보니 익숙한 얼굴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교실 밖으로 뛰쳐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눈 앞에 보였던 그 애는 틀림없는 정채윤이었다.
급하게 뒤쫓았지만 결국 놓쳐버리고 말았다. 어디로 갔는지 감이 오질 않아 정채윤을 놓친 그 자리에서 급하게 고개만 두리번 거리고 있으니 어느새인가 무리 친구들이 따라와있었다. 걔네들도 나처럼 다급하게 뛰어나온 모양인지 숨을 계속 헐떡이며 오늘 갑자기 왜 이러냐면서 걱정아닌 걱정을 해주었다. 얼마 뒤 박지율이 천천히 걸어오더니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방금 봤던 애 정채윤 맞지..?”
“아마..도…?”
“걔랑 아예 연 끊었다고 하지 않았어…? 왜 갑자기 다시 다가가려고 한 거야?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거야”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방금 전의 일은 반사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에 나조차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민진아, 정말 갑자기 왜 그랬던거야? 진짜 정채윤인줄 알고 그렇게 급하게 나갔던 거야..?”
“우리가 이제 그만 걔 떨쳐 내라고 했잖아!!”
“맞아.. 걔 진짜 이상한 애라고 전교에 소문 다 났잖아…”
“우린 너가 진심으로 걱정되서 그래.. 넌 진짜 착하고 괜찮은 앤데 괜히 이상한 애랑 엮였다가 불똥이 너한테 까지 튀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 —”
이러한 반응을 보고 난 후에야 떠올랐다. 무리 친구들이 정채윤을 견제하는 정도가 내 기억보다 훨씬 심각했고, 이 친구들이 사실상 처음으로 만난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이었기에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 휘둘리듯이 그 말을 들어버렸던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소문도 소문이었지만 정채윤이 진짜로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친구였기 때문에 무리 친구들의 말을 그대로 따라버린 나의 탓이 가장 컸다.
정채윤의 자살 소식을 들은 이후로, 줄곧 이유없이 답답하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어서 정말 힘들었다. 답답한 이유를 몰랐고, 왜이렇게 죄책감이 드는 건지 몰랐기 때문에 받은 충격보다 훨씬 많이 고생한 걸 지도 모른다.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 바로는 나는 줄곧 후회하고 있던 거였다. 실제로 정채윤이 소문과는 다른 애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 소문만 듣고서 주변 사람들 말만 듣고서 그 애를 그대로 무시해 버렸다는 사실을.
나는 그 애를 잘 알고 있었고 내가 마지막으로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떠나지 않았을 걸 알았으니까, 그래서 뒤늦게 후회해 버린 것이었다.
짧았던 소동은 쉬는 시간을 끝내는 종소리에 의해 일단락되었다. 1층으로 내려와 있던 우리는 급하게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교실로 돌아가는 와중에 본능적으로 정채윤네 반으로 시선이 갔다. 이곳은 1년전 과거니까 분명히 살아있을텐데 어째서인지 저 교실 문을 열고 정채윤을 밖으로 불러낼 자신은 없었다.
결국 나는 정채윤을 불러내지도 보러가지도 못했다. 무리 친구들의 눈치를 봤던 것도 있었지만 내가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이 가장 컸다.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채로 시간만 흘러가 버렸다.
*
지금까지의 일을 정리하자면, 나는 반 친구와 엉터리 점을 보고난 뒤 집에 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눈을 떠보니 1년전 과거로 돌아와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어영부영 닷새를 지내버렸다.
노트에다 대충 끄적이다가 슬쩍 고개를 돌리니 사고를 당하기 전에 받았던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왜 과거로 돌아왔는데 저 카드는 같이 넘어온걸까 고민해보다, 카드 안의 보름달이 줄어들어 있는걸 발견했다. 어째 날이 흐를수록 조금씩 작아지는 것 같았는데. 두 눈으로 실감할 정도의 크기가 되고 난 후에야 기분탓이 아님을 인지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보름달은 점점 사라진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다 사라지고 난 후에 무언가 큰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보름달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내가 다시 1년 후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그 애가 살아있는 지금이 그동안 후회했던 것들을 풀어나갈 유일한 시간이니까.
이제부터는 제대로 용기를 내서 정면으로 부딪혀볼 필요가 있었다.
다음날 등교를 한뒤 나는 무리 친구들이랑 인사하지 않고 바로 정채윤네 교실로 향했다. 교실 문을 열고 정채윤 안에 있냐고 소리를 쳐대니 반 친구들의 시선이 나한테 쏠렸다. 나를 쳐다보는 그 시선이 생각보다 싸늘해서 순간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만 잠깐 과거로 온 게 맞다면, 그냥 이상한 사람으로 잠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교실 안을 둘러보니 정채윤의 자리는 의외로 문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고 본인은 그곳에서 가만히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채윤!! 할 얘기가 있으니까 일어나!!!”
내가 아무리 불러도, 걔네 반의 몇몇 애들이 흔들어 깨워도 반응이 없던 정채윤은 내가 조금 크게 소리치니 그제서야 눈을 비비면서 겨우 일어나서 내 앞으로 왔다. 1년 만에 보는 얼굴이 낯설었다.
“...조민진…? 그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더니 갑자기 무슨 일이야..?”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오늘 7교시 끝나고 우리반 앞으로 와줘. 부탁할게.”
*
정채윤은 정말로 내가 부탁한 시간에 우리반 교실 앞으로 와 주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곤혹스러워하는 무리 친구들과 어딘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박지율이 뒤에 서 있었다.
“민진아… 왜 쟤가…..”
“...내가 부른 거야. 할 얘기가 있었거든. 미안한데 오늘은 따로 가자.”
그 뒤로 나는 정채윤을 이끌고 학교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래서 조민진, 나한테 할 얘기란 건 대체 뭐야?”
“음.. 사실 안 정해놨어..”
“뭐? 그럼 갑자기 왜 부른건데…”
“그동안 대화를 너무 안하니까 그냥 오랜만에 말이나 섞고 싶었달까..?”
간만에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니 어색했지만 한참동안 쌓였던 마음의 짐이 서서히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색하게 주고 받던 대화도 어느새 과거의 느낌을 다시 기억한 모양인지 조금씩 풀려나갔다.
대화가 다시 틀이 잡히니 나는 마치 초등학교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만날 접점이라고는 자주 같은 반이 된다는 것과 서로 집이 가깝다는 것 밖에 없었지만, 그 덕에 우리는 학교가 끝나면 서로의 집을 마치 자기 집인 것 처럼 드나들고는 했었다. 갑자기 정채윤네 집에 오랜만에 가보고 싶어졌다.
“나 오랜만에 너네 집에 가보고 싶어.”
“괜찮은 생각인데? 바로 가자!”
그렇게 남은 기간의 대부분은 다른 무리 친구들과는 학교에서만 대화를 나누고 방과후에는 정채윤네 집에 놀러 가서 초등학생 때 자주 했던 놀이를 하거나 나랑 멀어진 이후의 정채윤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으면서 보냈다. 워낙에 남들보다 튀고 독특한 것을 좋아했던 정채윤은 다른 친구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애’로 보였고 설상가상으로 낯가림도 심했던 탓에 먼저 친구를 만드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이런 저런 이유가 쌓여 학년 내에서 조금 논다는 친구들에게도 밉보여서 곤란했던 차에, 갑자기 내가 말없이 자기한테서 돌아서기까지 하니 정말 눈앞이 캄캄해지는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너무 미안해서 하마터면 고개를 들지 못할 뻔했다. 진심을 알게 되었다 할지언정 내가 뭘 한다고 미래가 바뀌지는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후회밖에 없었다. 더 후회하지 않으려면 현재로 돌아가버리기 전에 알아차리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야만 했다.
정채윤은 자신의 이야기를 다 마치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도 덩달아 말이 없어서 지금 상황이 마치 며칠 전 갑자기 다시 둘이서만 하교했던 그때처럼 느껴졌다.
정적을 깨고 정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는 학교 끝나고 너네 집에 가도 되지?”
*
집에 도착한 뒤 나는 바로 엄마께 내일 정채윤이 우리집에 올 것이라는 사실을 전해드린 뒤 바로 방으로 들어왔다. 방 문을 닫은 순간 책상에 세워놓은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보름달은 거의 다 사라졌고 딱 하루 정도만이 남아있었다.
정채윤은 익숙하게 우리집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걔네 집에 놀러가서 어색했던 나와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발걸음을 재촉해서 내 방으로 들어가는 정채윤의 모습이 어째선지 엊그제까지만 해도 자기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았던 모습과는 확실히 달라보였다.
정채윤은 내 방에 들어와서 잠깐 두리번 거리다가 책상 위에 세워 놓았던 카드를 집어 들었다.
“네가 내가 알던 애가 아닌 것 같다 싶었는데… 미래에서 넘어와서 그런 거였구나..?”
어떻게 알았냐고 말도 꺼내기 전에 정채윤이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내가 그 엉터리 점을 본 그곳에서 받았던 그 카드랑 똑같은 것이었다.
“너도 ‘그 아줌마’한테 점을 봤구나..”
정채윤의 말을 정리하면 이러했다. 늘 그렇듯 학교의 생활에 지쳐 항상 가던 곳에 점을 보러 갔는데 원래 자기가 가던 곳은 없었고, 수상한 천막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랑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마음에 변화를 가져다줄 큰 일이 있을 거라고.
아 그리고 딱 하나 정채윤만 들었던 얘기가 있었다.
“나랑 똑같은 카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했어. 근데 그 사람은 나보다 앞선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이고, 나만큼 힘들고 괴로운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거라고…… 그게 너였구나..”
정채윤은 잠깐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사실.. 네가 갑자기 날 무시해서 정말 힘들고 원망스러웠어…”
“... …”
“근데 이렇게 널 보니까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한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 너도 사정이 있었을텐데..”
“... …”
“....미래에서 네가 뭐 때문에 힘들어 하는 건지는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지만 잘 털어내고 마음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너는 내가 특별히 아끼는 친구니까.”
나는 계속 말없이 정채윤의 얘기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힘들어하는 이유가 본인의 자살 때문인지는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마음 편하게 지내라는 얘기가 왜인지 이제는 그만 나를 용서하겠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제대로 사과조차도 못했는데.. 그렇지만.. 네가 그렇게까지 말해 준다면..
“알았어.. 노력해 볼게.”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병원 침대였다. 내가 드디어 깨어났다며 소리치는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과 안도의 눈물을 흘리시는 부모님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 과거인지 그냥 무의식이 만들어낸 꿈이었는지 모르는 곳에서 내가 보름동안 지내는 동안 현실에서도 똑같이 보름이 흘러가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나는 계속 의식이 없던 상태로.
다행이 교통사고의 충격이 크지 않아서 금방 퇴원이 가능했다.
퇴원을 하니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물론 마음도 마찬가지지만.
덕분에 등교도 고등학교 입학 이래로 가장 이른 시간에 등교하게 되었다.
교실에 들어가니 먼저 와 있던 박지율이 급히 내 자리로 찾아왔다.
“... 조민진.. 내가 진짜 미안하다.. 점 보러 가자고만 안했어도 사고는 안당했을텐데….”
나는 박지율을 보며 웃었다.
“상관없어. 그 점 덕분에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됐으니까.”
모든 것이 달라진 기분이었다.
크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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