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 묵상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사 53:10-11)
⁋ 찬송- 467장 높으신 주께서 낮아지심은
⁋ 기도- 박희영 권사
⁋ 성경- 요한복음 13:31-35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말씀
고난주간 목요일이다.
이날 참 많은 사건이 있었다. 제자들과 유월절 저녁식사를 하시고, 그 자리에서 발을 씻겨 주셨다. 제자들과 찬양하며 감람산으로 가셨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다. 그리고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당하신 후, 가야바의 법정에서 밤을 꼬박 새셨다. 참 하루가 길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일러주신다. 제자 12명과 함께 하신 자리에서 발을 씻기신 후에 하신 말씀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34).
‘이웃 사랑’이 옛 계명이라면, ‘서로 사랑’은 새 계명이다.
새 계명은 옛 계명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하지만 율법에 기록된 옛 계명과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일찍이 선지자 예레미야는 새 계명에 대해 예언하였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 31:31).
새 계명은 옛 언약을 넘어 새 언약으로 바꾸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제 선민 이스라엘을 넘어 만민 모든 백성을 향해 구원을 약속하신다.
예수님은 말씀, 행동, 치유, 십자가의 길, 그 지극한 사랑을 통해 새 계명의 내용을 몸소 보여주셨다.
새 계명인 ‘서로 사랑’은 참 단순해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서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주님이 그 방법을 알려 주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34).
정말 주님이 사랑하시듯 사람들끼리 그 사랑이 가능한가? 도대체 이렇게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는 걸까?
새 계명과 옛 계명의 차이는 무엇인가? 새 계명 ‘서로 사랑’은 옛 계명 ‘이웃 사랑’의 정신을 이어받았지만, 둘 사이에 강조된 사랑의 차원은 다르다.
옛 계명은 “네 자신과 같이”(내 몸 같이)이다. 그런데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주님처럼)이다.
옛 계명인 “네 자신과 같이”가 인간의 상대적인 차원이라면, 새 계명인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차원이다.
물론 예수님은 제자들을 잘 알고 계셨다. 그들은 약점과 결점을 환히 알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진정한 사랑은 나쁜 단점을 알고 있음에도, 그래도 사랑하는 것이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우리 가족이 그렇지 않은가? 내 자녀와 부모,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많은 실수, 상처, 약점, 미움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이 결점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가장 사랑한다.
‘부부 간에 깊이 이해하고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부부는 누구보다 서로 사랑의 의무를 지고 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체포된 예수님을 버렸다. 열이면 열, 모두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쳐 버렸다. 베드로는 두려움 속에서도 심문 현장까지 따라갔지만, 결국에는 공개적으로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제자들은 맹목적으로 따랐고, 가장 가까이에서 가르침을 들었다. 그러나 대단히 비겁하게 처신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한 실패도 용서하셨다. 그들을 나무라지 않으셨다.
제자들이라고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말로 사랑해도 몸이 따르지 못했다.
“네 몸처럼‘은 얼마나 허약한 의지에 기반한 것인가?
새 계명인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곧 ‘주님처럼’ 사랑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사랑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르기가 쉽지 않다.
내가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내가 사랑에 대해 관심이 없구나, 이렇게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사랑받는 일에도 무심하다.
사랑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하기 어렵다.
사랑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줄 모른다.
그럴수록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더 깊이 붙잡으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가장 귀한 계명인 사랑을 더 뜨겁게 실천하라.
새 언약의 책인 신약성경은 시종일관, 거듭거듭 사랑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사랑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폴 투르니는 “세상에서 홀로 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결혼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살기를 원한다면, 그만큼 시간을 내어 열심히 사랑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이고, 그 부활신앙의 실천은 사랑이다.
부활은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미움에서 용서로, 분열에서 일치로, 폭력이 본성에서 궁극적인 평화로 건너가는 다리이다.
부활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바로 사랑의 환승역에서 갈아타는 것이다.
이러한 부활 신앙을 지닌 사람은 사는 동안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 깊이, 뜨겁게 사랑한다. 이미 부활의 삶, 부활 신앙을 살아가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이 나를 이끄신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주님의 제자요, 사랑의 사람으로 산다.
⁋ 주기도문
“오늘도 주님의 평화!”
첫댓글 주님의 우리를 향한 한없고 놀라운 사랑과 희생에 비하면 제 노력이 제 열정이 얼마나 부족하고 보잘것 없는지 느끼는 아침입니다. 주님 부족한 저를 찾아와 손잡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을 실천하게 하옵소서
"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이고, 그 부활신앙의 실천은 사랑이다."
모든 것이 새롭게 태어나는 봄날 부활의 신비를 찬양합니다. 그것의 색동빛 넓은사랑을 찬양합니다.
주님 사랑 본 받아 겸손히 섬기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을 실천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열어 주신 새 시대에 새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