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계(法階) / 민순의의 조선의 스님들
법계 수여와 판사 임명은 국가권력이 좌우
도대선사·도대사는 선교 양종 도회소 소재 사찰 주지 맡아
승직은 일종의 공무로 간주 국가 공식 행정절차 거쳐 임명
주지 임기 30개월…인력 양성·관리 위해 일정 사찰만 관리
법계(法階)는 사전적 의미로 ‘불도를 닦는 사람의 수행 계급’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승계(僧階)라고도 한다.
현재 조계종의 ‘법계법’에 따르면
승랍 10년 미만의 승려로서 4급 승가고시에 합격하면 견덕/계덕(비구/비구니, 이하 순서 동일),
승랍 10년 이상인 견덕으로 3급 승가고시에 합격하면 중덕/정덕,
승랍 20년 이상인 중덕으로 2급 승가고시에 합격하면 대덕/혜덕,
승랍 25년 이상인 대덕으로 1급 승가고시에 합격하면 종덕/현덕,
승랍 30년 이상의 종덕 법계 수지자는 종사/명덕,
승랍 40년 이상의 종사 법계 수지자는 대종사/명사의 법계를 품서 받는다.
견덕/계덕에서 종덕/현덕까지는 승가고시 전형을 거쳐야 하지만,
대종사와 종사는 특별전형으로 품서된다.
‘승가고시법’은 중앙종회의 동의를 거쳐 교육원장이 위촉한 고시위원회에서
승가고시의 시행을 관장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조계종법의 내용은 스님의 법계가
승단 내부의 규정과 절차에 의해 주어지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과거에는 사정이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승과에 합격한 스님에게 제일 먼저 대선(大禪)이라는 법계가 주어졌다.
이후 선종에서는 중덕(中德)-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로,
교종에서는 중덕-대덕(大德)-대사(大師)로 법계가 올라갔고,
선종의 대선사와 교종의 대사들 중에서 각각 한 명씩을 뽑아
도대선사(都大禪師)와 도대사(都大師)의 법계를 주고
종단을 통솔하는 판사(判事)의 직책에 임명하였다.(성현, ‘용재총화’ 9권.)
선종의 도대선사와 교종의 도대사는 선교 양종 도회소 소재 사찰의 주지가 되었다.
앞선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조선시대 승과의 시행은
국가 행정력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법계 수여와 판사 임명의 주체가 된 것도 어디까지나 국가 권력이었다.
법계의 첫 번째 단계인 대선 취득이 승과의 합격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승과가 국가제도에 따라 시행된 것이었으므로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성종 8년(1477)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대선, 중덕, 선사, 주지와 같은 승직(僧職)을
이조(吏曹)로 하여금 하비(下批)하여 대간(臺諫)에서 서경(署經)하게 하였다”라는
언급이 나온다.(‘성종실록’ 78권, 성종 8년 3월4일.)
주지하다시피 이조는
관료의 선임과 훈봉, 포폄 등 인사고과를 주관하였던 중앙 행정기관이다.
하비란 신하가 올린 상소문 등에 대하여 임금이 가부를 결정하여 대답하는 일을 말하며,
서경이란 임금이 관리를 임명하거나
법령을 설치 또는 폐지할 때 신하의 동의를 얻는 절차이다.
조선시대의 서경 기관은 관료조직의 감찰과
임금에 대한 간쟁을 주무로 한 사헌부와 사간원이었는데,
이 두 기관을 합하여 대간이라고 불렀다.
결국 이는 이 시기 법계와 주지 등의 승직이 일종의 공무(公務)로 간주되어
그 임명에 국가의 공식적인 행정절차가 개입되었음을 보여준다.
사실 승과 시험과 법계 승진의 국가 주도적 시행은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제도이기도 했다.
고려 광종 때 최초로 승과를 도입하면서 법계 제도도 함께 확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 시대의 선종 법계는
대덕(大德)-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로,
교종 법계는
대덕-대사-중대사-삼중대사-수좌(首座)-승통(僧統)으로
조선시대보다 좀 더 세분화되어 있었다.
중덕의 법계는 고려 후기에 추가되어 조선 초까지 존속된 것이었다.
이때에도 간관(諫官)의 서경을 거쳐야 했고, 공식 임명장인 관고(管誥)를 수여하였다.
‘동문선’에는 고려 시대의 승려 임명 관고가 여러 편 전한다.
이렇게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국가권력이 직접 나서서 운영한
승려의 법계 제도는 사실상 승직을 임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령 사찰의 주지 자리에는 중덕의 법계를 받은 스님이라야 오를 수 있었다.
특정 사찰에 주지를 임명해야 할 때가 되면
그 사찰을 관할하는 선종 또는 교종에서 (아마도 양종의 판사 자격으로)
3명의 승려를 예조에 추천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 추천 명단에는 바로 중덕 법계자만이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예조에서는 추천받은 명단을 이조에 전달하고,
이조에서는 다시 이 내용을 임금에게 상주한 뒤
임금의 낙점을 받는 구조로 주지의 임명이 이루어졌다.
이 사실은 성현(1439~1504)이 지은 ‘용재총화’ 9권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경국대전’ 예전 도승(度僧) 조에도 같은 방식으로 주지 임명 절차가 명시되어 있다.
다만 ‘경국대전’에서는 “양종에서 여러 명을 천거하여 예조에 보고하면,
이조에서 이 안건을 전달받아 심사를 통해 적임자를 선정한다”고만 되어 있어
그 절차에 대한 설명이 다소 소략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용재총화’를 지은 성현이 ‘경국대전’ 최종 반포 시기인
1485년 당시 왕성히 활동했던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용재총화’의 내용이 ‘경국대전’에 실린 법제도의 실상을 보다
자세히 보충하여 전한 것이라고 보는 쪽이 옳을 것이다.
‘경국대전’에는 이에 더하여 “주지로 파견한 인물은 30개월이 되면 교체한다”는
내용이 덧붙어 있다. 즉 양종의 3배수 추천, 예조의 접수,
이조의 인수인계 및 국왕에 대한 상신, 국왕의 최종 재가라는 공식 절차를 거쳐
임명된 주지는 그 임기도 30개월로 정해져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라 안 모든 사찰의 주지를 한결같이 이런 과정에 따라
임금이 임명해야 하는 것이었을까? 그럴 리도 없고, 그럴 수도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었다. 선종과 교종에서 주지 적임자를 추천해야 하는 절은
어디까지나 각 종단에서 관할하는 사찰이었다.
성현은 같은 글에서 이러한 사찰이 선교 양종 각각 15개씩이라고 말한다.
이는 세종 6년(1424) 불교계의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통합할 때
“서울과 지방에 승려들이 머무를 만한 곳을 가려서 (각각 18개씩)
36개의 절만을 두어 양종에 분속시킬 것”을 아울러 결정했던 것과 상통한다.
그리고 이렇게 선정된 36개의 사찰에는 “전지(田地)를 넉넉하게 지급하여…
(소속 승려들이) 불도(佛道)를 청정하게 닦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4권)
국가권력의 입장에서는 모종의 필요에 따라
일정 숫자의 사찰만을 공인하여 관리하였으며,
오직 관리 대상이 되는 사찰에 대해서만 주지를 임명하고 승직을 허가하여
사찰의 원활한 운영과 유지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승과와 법계의 제도를 국가가 나서서 주도적으로 운영하였던 것은
바로 그 사찰 관리에 필요한 인력의 양성과 관리를 위해서였다.
2022년 4월 13일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