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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관적 묘사와 객관적 묘사
작가의 심리가 투영되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우리는 암시적 묘사도 주관적 묘사와 객관적 묘사로 나누어 고찰해볼 수 있다.
A) 전당포에 고물상이 지저분하게 늘어슨 골목에는 가로등도 켜지는 않었다. 죄금 높드란 鋪道도 깔리우지는 않었다. 죄금 말 쑥한 집과 죄금 허름한 집은 모조리 충충하여서 바짝바짝 친밀하게는 늘어서 있다.
구멍 뚫린 속내의를 팔러 온 사람, 구멍 뚫린 속내의를 사러 온 사람. 충충한 길목으로는 검은 망토를 두른 주정꾼이 비틀거리고, 인력거 위에선 車와 함께 이미 하반신이 썩어가는 기녀들이 비단 내음새를 풍기어가며 가느른 어깨를 흔들거렸다.
-오장환,「古典」⁹
B) 毛髮을 날리며 오랜만에
바다를 바라보고 섰다.
눈보라도 걷히고
저 멀리 물거품 속에서
제일 아름다운 人間의 女子가
誕生하는 것을 본다. -김춘수, 「봄바다」¹⁰
A)는 "전당포에 고물상이 지저분하게 늘어슨 골목”의 풍경이다. 이 풍경을 시인은 사실적인 정황들만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려 한다. 그러니까 객관적 묘사이다. 위의 작품에서 그 풍경은 켜지지 않은 가로등, 조금 높다란 포도, 조금 말쑥하거나 허름한 집, 구멍 뚫린 속내의를 팔러 온 사람과 사러 온 사람, 검은 망토를 두른 주정꾼, 썩어가는 하반신 위에 걸친 비단 냄새를 풍기며 인력거를 타고 가는 기녀로 구성되어 있다. 그만큼 황폐한 삶의 한 현장인 골목 풍경이다. 시인은 선택한 한 국면(이 국면 선택 자체가 바로 세계에 대한 시인의 해석이다)의 객관적 묘사를 통해 현장성 또는 사실성reality으로 말하고자 하는 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A)가 객관적 묘사라면 B)는 주관적 묘사이다. 표면에 드러나 있지 않지만, 숨은 시적 화자(詩的話者)¹¹인 '나'는 오랜만에 모발을 날리며 바다를 바라보고서 있다. 그 바다는 "눈보라도 걷히고", 그러니까 시야가 트이고 '저 멀리' 하얗게 부서지는 '물거품'이 보인다. 여기까지는 시적 화자 또는 시인의 심리가 투영되어 있지 않은 객관적 정경이다. 그러나, 그 '물거품' 속에서 "제일 아름다운 인간의 여자가/탄생하는 것을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인의 심리적 세계에서이다. 그뿐만 아니라 "제일 아름다운 인간의 여자"는 시인이 본 심리적 영상이므로 이른바 개인적 상징¹²이기도 하다.
B)에서 본 바처럼 모든 작품이 전적으로 객관적이거나 전적으로 주관적인 형태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대체적으로 B)와 같이 복합적이라고 해야 옳다. 주관적 묘사든 객관적 묘사든 그 묘사의 정신은 감정과 설명을 배제하고 대상의 지배적 인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러나 작가가 현장과 사실을 그 바탕으로 하여 표현한다고 할 때는 객관적 묘사가 적극적으로 요구되고, 심리적 또는 감각적 대상 파악이 그 기조를 이룰 때는 주관적 묘사의 중요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a-1) 전철 안에서
누군가 잠이 들었다
아무도 그를 깨우지 않았다.
눈을 뜨면 그는 종점에서 허둥댔다.
처음엔 늦게 집으로 향하고
어느 날은 아무렇게나 잠이 들었다.
나는 집으로 향할 때마다
깡통을 찼다 -「집으로 가는 길」
객관적 묘사라 할 수 있는 예의 하나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작가는 감정의 개입을 억제하고 시적 정황(詩的情況)을 심리적으로 왜곡하지도 않고 축어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도 불투명하다. 왜 그럴까? 그 불투명성의 가장 큰 이유는 끝까지 나를 객관화시키지 못한 데 있다. 조심스럽게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1연의 '누구' 2연의 '그' 3연의 '나'는 같은 인물이다. 그러니까 '나'의 다른 명칭들이다. 만약 위의 시적 정황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려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면 다음과 같이 되어야 바람직하다.
전철 안에서
그는 잠이 들었다
아무도 그를 깨우지 않았다
눈을 뜨면 그는 종점에서 허둥댔다
처음엔 늦게 집으로 향하고
어느 날은 아무렇게나 잠이 들었다
그는 집으로 향할 때마다
깡통을 찼다
혹은 마지막 연을,
나는 집으로 향할 때마다
깡통을 찼다
라고 해도 좋으리라. 이때 3연의 '나'는 1·2연의 '그'를 나로 해독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1·2·3연을 '그'로 표현할 경우는 '집으로 가는 길'의 '그'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3인칭화된 '나'일 수도 있지만, 3연의 '그'를 '나'로 할 경우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일 수는 없다. 그러나, 보는 바처럼, 고쳤다고 해도 이 작품은 큰 감동은 없다. 그것은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작품이 싸안고 있는 세계가 지친 삶이라는 단순성만 드러나 있는 까닭이다.
정황의 핵인 3연이 지친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1·2연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는 3연이라기보다 자조적 행위 이상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a-2) 비듬낀
중년남자 몇이서
꾸려가는 복덕방
그 앞 도로에는
“공사중 출입금지"라는
표지판 붙어 있고,
그 사이를 비집고
질퍽한 진흙을
묻히며 들어가는
사람들
삼원색으로
썬팅된 출입문
곁에 세워둔 자전거
바퀴에도 세상때처럼 진흙이 묻어 있고,
깃발처럼 창가에 걸려 있는
매매, 전세 시세표
다세대
단독
아파트……
그 맨 마지막 줄에
빨간색으로 써 있는
삯월세방 시세표
누군가의 손에
잡혀져서
말없이 삭제되고 있다 -「복덕방 풍경」
이 작품도 객관적 묘사로 된 작품이다. 그러나 앞의 집으로 가는 길」보다는 깊이가 있다. 그 이유는 선택되고 묘사된 정황들이 우리들 삶의 그늘진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객관적 묘사로 된 작품들은 그 작품이 수용하고 있는 한 국면을 구성하고 있는 정황들이 얼마나 깊이를 드러낼 수 있는 구체적 정황들로 이루어져 있는가가 중요하다. 구체적 정황들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 국면을 흐리게 하는 사소한 것들을 선택한다면 작품은 산만하게 되고 깊이도 물론 훼손된다.
이 작품에서는 '비듬낀' '그 앞 도로' '그사이' '세상' '그 맨 마지막'이라는 표현에 문제가 있다.
첫째, '비듬낀'은 청결 상태를 나타내는 단순한 수식어이다. 그런 까닭에 그 뒤이어 나오는 '중년남자'의 외모를 밝혀주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 만약이 '비듬낀'을 '느슨하게 옷을 걸친'이라고 바꾸어보라. 그럴 경우에는 외모 이외에는 느슨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의 형상을 첨가하게 된다.
둘째, '그 앞 도로' '그사이' '그 맨 마지막'에서 보여지듯 지시관형사'그'의 남용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사이'를 제외한다면 구태여 '그'라는 표현이 필요하지가 않다.
셋째, "세상때처럼 진흙이 묻어 있"다는 직유의 표현은 너무 상투적이다. 그리고 '복덕방'이 있는 그곳 변두리의 삶을 나타내는 데는 그렇게 적절해보이지 않는다. 가령 '변두리의 하루하루처럼'이라는 직유로 비유해보라.¹³ 그리고, 개작한 시를
느슨하게 옷을 걸친 중년남자 몇이서
꾸러가는 복덕방
앞 도로에는 "공사중 출입금지"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고
그 사이를 비집고 질퍽한 진흙을 묻히며
들어가는 사람들
삼원색으로 썬팅된 출입문
곁에 세워둔 자전거 바퀴에도
변두리의 하루하루처럼 진흙이 묻어 있고
깃발처럼 창가에 걸려 있는
매매, 전세 시세표
다세대, 단독, 아파트……
맨 마지막 줄에 빨간색으로 써 있는
삯월세방 시세표
누군가의 손에 잡혀져서 말없이 삭제되고 있다
라고 행갈이를 바꾸어보라. 원작과 다른 느낌과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원작은 지각 대상(중년남자・복덕방・표지판 등등)이나 현상(꾸려가는 질퍽한・묻히며・썬팅된 등등)을 각각 강조하고 있는 형태의 행갈이여서 그 개별적인 이미지는 강조되나 국면이 전체적으로 다소 흐려져 있다. 그러나 개작은 이와 반대로 개별적인 지각 대상이나 현상은 다소 약화되어 있지만 국면은 전체적으로 강화되어 있다. 어느 쪽의 행갈이를 선택하느냐는 개개인의 취향 문제이다.
b-1) 아침에 구두를 닦는다
종각에서 묻은 먼지
봉천동 산동네를 오르며 묻은 먼지
먼지 속에서 구석 먼지를 털며 윤을 만든다
비틀거리며 길 위에서
돌멩이에 채이고
재수없는 날에는
만원버스 속 발에 밟혀
구두부리가 흠이 나
패어진 곳마다 구두약을 바른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 오래 문지르고
햇볕에 말리기도 하고
닳아진 시간을 꿰매기도 하면서 -「구두닦기」
위의 「구두닦기」는 마지막 행 "닳아진 시간을 꿰매기도 하면서"가 주관적 묘사이다. 이 시구는 실재의 그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어떤 심리 상태를 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는 어떤 행위(구두 닦기)의 객관적 묘사이다. 그러니까 객관적 묘사와 주관적 묘사가 어울려 있는 보기이다.
그러나 2연에 비해 1연이 지나치게 요약되어 있다는 인상을 즉시 받는다. 다시 말하자면 2연에 비해 시적 정황이 단조롭다. 2연의 흠이나 상처를 관찰하고 묘사하는 것만큼의 배려를 1연에서는 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그 결과 1·2연은 균형이 깨어지고 작품의 구도가 약해져 있다.
아침에 구두를 닦는다
출근길의 광화문 네거리에서
종각에서
퇴근길의 봉천동 산동네를 오르며
묻은 먼지를 닦는다
어제 닦을 때 보지 못한
구석의 먼지까지 닦는다
윤을 낸다
정도만 되었다고 하더라도 원작과 같은 느낌을 받지는 않으리라. 이 개작에서 가장 중요한 시구는 물론 "어제 닦을 때 보지 못한"이다.
b-2)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물 한모금 먹고
집 한 채 지었습니다.
또 하룻밤을 지새우고 보니
지붕이 휑하니
날아가버려
하늘 보기 좋습니다
밤새 하늘이 뭉쳐지고
터진 지붕으로
비가 옵니다
빗물 따라 한참을 흘러가서
집 한 채 짓습니다
그리움 기둥삼아 집 한 채 짓습니다 -「불면증」
이 작품은 위에서 살펴본 보기들과는 다르다. 현실적으로 또는 사실적으로 볼 때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물 한모금 먹고/집 한 채 지었습니다"라는 행위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볼 때, 그런 행위의 묘사로 된 이 시는 억지스럽다.
그러나 이 작품이 묘사하고 있는 것이 현실적 또는 사실적 세계가 아니라 심상의 그것이라면 가능하다. 실제로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것은 심상의 세계이다.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물 한모금 먹고/집 한 채 지었습니다"라는 표현에서 '집 한 채'를 '꿈 하나' '희망 하나' '생각 하나'쯤으로 읽으면 그것을 즉시 알 수 있다. 즉 이 작품 속의 '집'은 '꿈' 또는 그와 유사한 생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집'을 꿈으로, '지붕'을 꿈의 지붕으로, 비를 그'꿈'을 씻어버리는 어떤 존재로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읽도록 작가가 충분히 고려하여 써놓은 것이다.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사라져버리는 어떤 꿈 하나를 집. 지붕. 빗물 등을 동원하여 구상화(具象化)해놓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심상이다. 심상의 한 국면을 실재하는 사물 현상을 빌려 시적으로 조립해놓았으므로 이 작품도 주관적 묘사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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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최두석 편, 『오장환전집·1』, 창작과비평사, 1989, p. 24.
10 『김춘수 전집. 1』, 문장사, 1982, p. 190.
11 작품 속에서 말하고 있는 화자. 「시와 화자」 참조.
12 비유법의 하나인 상징의 한 종류, 원형적 상징, 공중적 상징과는 달리 개개의 시인이 독자적으로 사용하는 상징. 「비유와 활용」 참조.
『현대시작법』 오규원
2024. 11. 17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