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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기의 황금시대
명대는 환관들의 막중한 세력과 부패로 혼란되면서 1616년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운 만주족에게 1644년 수도 북경이
함락되면서 그 화려했던 시대를 마감하게된다.
이렇게 해서 19세기 초까지 중국을 다스리게 된 만주족은 중국 고유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나름데로 독특한 문화를 창출하여
유럽등과 활발한 무역으로 중국을 세계에 알리게 된다.
화려했던 명대의 채자시대에서 더욱 완벽해지는 절정의 자기시대를 맞이한다.
유상채로는 분채, 법랑채, 만화채의 새로운 방법이 출현하며 단색유도 더욱 발달되어 랑요홍, 강두홍, 제홍, 취홍등의
홍유 계통의 다양한 창조와 청유의 완벽한 성취, 흑색의 빛나는 오금유등을 생산하면서 자기의 황금시대를 이룩한다.
청대자기의 절정기는 강희, 옹정, 건륭시기로 정치력이 강력했던 때와 같다.
강희시기의 도자는 청화가 여전히 제작되었고 명대의 청화보다 색택이 선명하고 아름다운데 어떤 청료를 사용하였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강희식청화는 간혹 흑색, 자색, 흑홍색이 생기며 강희관지는 없고 명대의 선덕, 성화관을 한 것이 많은데
이것은 선덕 성화시기의 청화를 모방하려고 한 의지로 풀이되며, 명대 중기에 쇠퇴하였던 유리홍이 부활되어 명대의 담홍색 빛이 선명한 선홍색을 얻으면서 성숙하였다.
경덕진은 명대에 이어 여전히 명성을 누리면서 관요와 민요가 활발하게 운영돠었고, 관요는 내무부조판처에서 관리 감독들 파견하였다.
청대 경덕진 자기의 성취는 당시 지식있는 파견 감독들의 노력으로 평가되기도한다,
강희시기의 경덕진 관리 감독이었던 장응선에 의해 취홍, 취청, 요황, 요자, 요록등이 시도되었고, 역시 강희시기의 관리 감독이었던 랑정극에 의해 랑요홍이 성취되었다.
옹정시기에 오면서 분채, 법랑채,가 출현하여 화려한 유상채의 절정을 이룩했고
건륭시기에는 기묘하고 찬탄할 만한 제자기술로 기교 넘치는 조형이 자기에 시도되면서 완벽한 경지에 도달하게된다.
또한 서양과의 활발한 교류와 주문자기가 시작됨에 따라 서양풍의 문양도 유행하게되며
유럽왕실까지 중국풍의 바람을 일으키게된다.
2. 청대의 유상채자
1)오채
청대의 오채자기는 강희시기가 절정이다. 청대의 오채가 명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백색 바탕에 채회 한 것 외에 각종 바탕색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즉 황색, 녹색, 흑색, 미색등을 바탕색등으로 이용했으며 특히 산호빛 홍색바탕의 오채기는 아주 아름답다.
이런 바탕에 황색, 녹색, 남색, 자색, 흑색, 금채등의 안료를 사용해서 다양한 색채를 구사하였다.
2)유상채에 사용된 색채
오채나 또는 각종 유상채에 사용된 색채의 성분은 다음과 같다.
홍채- 홍채는 반홍과 금홍의 두 종류이다. 반홍의 주요 착색제는 산화철호이며 중국의
전통적인 홍채이다.
반홍의 시작은 송대에서 시작되며 송대이후의 유상홍채는 모두 반홍에 속 한다.
반홍의 색조는 채료가 섬세할수록 고우며 소성온도가 너무 높거나 길면 산화철이
유에 녹아들어 황색을 띤 홍색이 된다.
금홍은 국외에서 수입된것으로 강희시기의 법랑채자에서 볼수있으며 이를 연자수
라고도 한다.
남채- 천연 고토광에서 남채와 남유의 착색제를 얻었는데, 고토광의 화학성분은
산지마다 다르고 함유된 착색원소인 코발트 외에 철, 망간 등의 함유량이 모두
다르다. 유상채에 사용도힌 남채는 빛깔이 짙고 요염하다.
황채- 황채는 철황과 안티몬황의 두 종류인데 오채는 철황을 사용하였고,
강희시기의 법랑채와 옹정시기의 분채는 안티몬황을 사용하였다.
철황은 산화철의 착색제이며 철황연유가 발전된것이다. 본래 철황의 시작은
한대이며 당삼채에도 사용되었다.
녹채- 중국전통의 유상녹채는 동록연유가 발전된것이며 모두 동 원소의 착색이다.
한대에 동록연유가 발명되어 당삼채에
채용되기도 했었다. 중국전통의 녹채는 다양하며 색조도 같지않다. 이것은 함유
된 동의 양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흑채- 흑색의 주요 착색제는 철, 망간, 코바트, 구리 등이며 고토광의 동화편의
배합으로 만들어진다.
흑채는 유상채로 주로 사용되었고 문양의 윤곽이나 앞사귀의 맥을 긋는 데
애용되었다.
금채- 금채는 일찍이 당대에 금박으로 사용되었고 사천에서 출토된 당묘용, 그리고
송대의 정요와 건요에서 금박이
채용되었으며 명대에는 더욱 성행 하였다.
청대에 오면서 금분을 사용하게 되며 붓으로 선묘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 방법은
금의 양이 많이 사용되므로 고급의 자기에만 사용하였다. 청대 후기 금수가 발명
되어 금채에 이용되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금의 수지산염으로 금의 양이 조금
들고 화려하여 많이 채용되었다.
법랑채자- 법랑채자기는 자태에 각종 법랑유를 채회 한 것으로 강희시기부터 시도되었
으며 유럽으로부터 상륙하여 중국에서 연구되어 성취되었다.
강희시기에 법랑기가 유럽에서 들어왔다는 사실이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이
고국으로 보낸 편지에서 증명되고 있다.
강희시기의 자태법랑은 소태, 즉 내부는 유를 입히고 외부는 입히지 않은 태와
자사태를 사용하였고 법랑색채는
황색, 남색, 홍색, 두록색, 지홍자색 등을 사용하였다.
태와 유층이 두꺼워 유화같은 느낌을 주나 점차 기술이 성숙되면서 태가 얇아
지고 유층이 얇아지는 현상을 보인다.
그러므로시도되던 단계의 기물에 보이던 법랑층의 균여과 기포가 적어지는
모습을 보이면서 성숙하게된다.
강희시기의 문양은 목단, 월계, 연꽃, 국화 등의 꽃 중심이 특징이며 기형은 소형의 반, 호, 합,완, 병 등으로 황제나 비빈들의 완상용이나 제사용 공기로 사용되었다.`법랑채자기는 강희, 옹정, 건륭식가 절정인데 주로 20cm 이하의 소형의 기물이 많은 것으로 보아 완상용으로 사용된 듯하다.
옹정시기에 오면서 법랑채는 완벽해져서 태는 대다수가 백자를 사용하게 된다. 경덕진에서 우수한 백자를 운송하여 소성과 채회는 내무부의 조판처에서 진행하였다. 이시기의 법랑자기는 어떤 것은 기물 외면을 녹색과 황색을 바탕색으로 바르고 내면에는 백색 바탕에 채회한 것이 있으며 벙랑채료 또한 증가되었다.
옹정시기의 문양은 화조, 산수, 죽석 등이 주류이며 이중에서 수묵산수와 청색산수풍의 문양이 특히 성행하였다. 또한 공간 부분에는 시를 쓰기도 하여 제시, 시, 화의 화면을 구성하였다. 이 시기의 옹정제가 산수문양을 특히 좋아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때문에 산수문양이 많이 유행하였다.
건륭시기에는 서양풍의 화면이 도입되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 화단에서는 서양화법의 원근과 명암이 일부 시도되었는데 서양여인과 서양풍물 등도 등장한다.
또한 산수, 화조 등도 옹정시기에 이어 애용되었으며 재미있는 것은 가을풍경이 있는 기물에 금성, 욱영 등의 인문을 하였고, 대나무 그림에는 군자, 빈연을, 산수그림에는 산고, 수장을, 매화에는 선춘 등의 화면과 부합되는 뜻의 글자를
인문한 것이다.
분채
분채는 오채의 기초 위에 법랑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방법으로 강희시기에 시작되었다.
분채는 고온소성된 백자에 도안의 윤곽을 그리고 한 층의 유리백을 입힌 다음 유리백위에 채회하여 소성한다. 그러면 문양의 농담을 얻을 수 있으며 부드러운 색채를 얻는다. 이런 유리백을 입히면 명암을 표현할 수 있고 입체감도 줄 수 있다. 부채의 소성 온도는 700c 좌우의 산화기분 중 저온소성으로 오채보다 다양한 색상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강희시기의 분채는 서투르며 옹정시기로 오면서 성숙된다. 옹정시기 분채는 문양의 꽃색으로 연지홍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금의 착색제로 법랑채에도 보이즞 것으로 옹정시기에 대량으로 사용된 것이 특색이라 하겠다.
이것은 옅은 장미빛과 짙은 연지색으로 표현되었고 두껍게 칠해져 입체감을 준다. 이것은 분채색료 중 유료 성질이 있는 것과 관계된다.
또한 옹정시기 분채는 백색 바탕의 채회뿐만 아니라 산화색, 담록색, 장색 등의 바탕색을 이용하기도 하여 분채의 절정을 보여준다. 문양은 주로 화조가 많다.
건륭시기의 분채는 더욱 정교해져서 연지홍 바탕에 분채, 금색 바탕에 분채, 다갈색 바탕의 분채가 제작되며 금으로 묘사하는 등 다양하게 시도된다. 문양은 도안화된 꽃문양이 많으며 건륭 말기에는 홍색 바탕과 녹색 바탕에 봉화 문양의 분채가 출현하며 가경초까지 성행하였다.
3. 청대의 색유자기
명대 중기 이후 소제되었던 동홍유는 쇠퇴되다가 강희시기에 오면서 새로운 회복이 시작된다.
빛나는 흑색의 오금유와 담황색 계통의 추규록등을 창출하면서 각종 색유자기가 제작되는 청대는 제작기술의 진보로 인하여 완벽한 색유자가 등장한다.
랑요홍
명대 선덕시기의 보석홍을 모방한 것으로 경덕진의 랑정극의 감독 아래 성취된것으로 색택이 피처럼 붉고 짙으며 요염하다.
동홍계로서 주둥이 부분은 유가 흘러내린 현상을 보이는데, 이것은 동 성분이 고온에서 쉽게 산화되는 현상 때문이다.
강두홍
랑요홍이 눈부시게 요염한 홍색이라면 강두홍은 고상하고 은은하며 온화한 느낌의 동홍계열이다. 홍색에 녹색의 이끼 같은 점이 강두(콩의 종류) 같아서 강두홍이라 칭해졌는데, 소성기술이 어려워 대부분 높이 20cm 이하의 소형 기물로 제작되었으며 주로 왕실에서 사용하였다.
제홍
동 착색의 홍색으로 짙고 불투명하며 유는 마치 오레지 껍질 같다. 이것은 겅륭시기 후 쇠퇴했으며 1300C의 고온에서 환원소성되었다.
산호홍
일종의 저온 철홍유로 강희시기에 시작되어 옹정. 건륭시기에 성행하엿다. 강희 .옹정시기에는 오채와 분채 등의 바탕색으로 이용되었고 건륭시기에는 산호홍에 금으로 문양을 그려 애용하였다.
연지수
일종의 분홍색의 저온유로서 유 중에 약간 섞여 넣은 금으로 인해 연지빛이 되며 금홍이라고도 한다.
강희시기에 서양에서 들어온 것으로 제작은 소성된 얇은 백자에 금이 함유된 색유로 시유해서 소성한다.
주람
고온남유로서 명대 선덕시기에 이미 출현하였다. 그러나 섬세하지 않고 기물도 많지 않으므로 완전한 제작은 청대 강희시기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것은 유색이 옅은 남색 바탕에 출현한 짙은 남색점으로 마치 술이 떨어진 것 같은며 남색 물방울 같아 주람이라 칭하였다.
천람
산화코발트가 1% 이하인 고온유로서 유색이 산뜻하고 고상하다.
강희시기에는 소형의 문방도구, 옹정. 건륭시기에는 병, 관 등이 있으나 전해오는 기물은 많지 않고 대부분 관요에서 소제되었다.
제람
코발트가 2% 함유된 불투명 유로 색택이 고르고 윤이 난다. 유면은 귤껍질 같은 것이 제홍과 비슷하다.
동청유
중국도자사상 청유의 최고봉은 남송의 용천요였다. 그러나 원대의 청화와 명대의 채자가 성행함에 따라쇠퇴하다가 청대 강희시기에 와서 시도되면서 청사과빛 같은 청유를 성취하게 되는데 이것이 도청유이다.
그러나 청유 소제기술의 완벽성은 옹정시기이며 특히 옹정제가 경덕진에 동청유기를 제작하라고 명했던 것이 이러한 성취의 한 원인이기도 하다. 옹정시기의 청유의 색택은 아주 침착하고 동청 위주의 색조로서 철의 함량과 소성시의 황원기분이 완벽하게 조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자금유
장색유라고도 하며 철 착색제의 고온유로서 산화철과 산화아철의 함량은 5% 이상이다.
본래 송대의 북방요와 명대의 경덕진에서 소제되었으나 청대에 오면서 성행하였고 금 과 같이 병행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오금유
빛나는 흑색으로 강희시기에 발명되어 성행하였다.
이것은 자금유와 농도가 높은 청료의 혼합으로 얻는다. 그러므로 대량 함유된 철분 외에 망간, 코발트의 착색원소가 있다. 순수한 오금유기는 극히 적고 대부분 금채와 함께 사용하였다.
다엽말
철 결정유 중의 하나로 철, 마그네슘, 규소의 결정이다. 이것의 기원은 당대 흑유로서 우연히 소성되었다. 유는 불 투명하고 황록색이 나며 마치 차의 분말과 같아서 소박한 느낌이다. 이런 결정유로서 적갈색의 철수화유도 있다.
자유
색이 마치 가지빛 같고 주요 착색제는 망간, 철, 코발트의 조색 작용이다.
공작록
산화동의 석회유는 화원할 때 홍색이 나며 산화기분에서는 녹색으로 된다.
고온으 동 녹유는 청대 전기에 소위 랑요록과 사과록 등의 색이 있었고, 저온 동 녹유는 공작록, 과피록, 추규록 등이 있다. 공작록은 일종으 투명한 취록색으로 명대 경덕진에서 시작했고 청대 강희시기가 극성기이다.
과피록
한대 연녹유와 비슷한 것으로 명대 중기에 출현하여 청대 전기에 발전하였다.
경덕진에서는 매끄럽지 않은 태 위에 시유하여 저온에서 2차 소성한 연녹유를 괴피록이라 하였다.
4.그 밖의 도자
이 외에 복건성의 덕화요, 강소의 의흥요, 광도의 석만요에서 각기 독특한 도자생산이 있었다.
덕화요는 명대에 이어 여전히 백자를 제작하였는데 다른점이 있다면 백자의 색이 명대는 아백색인데 비해 청대의 백자는 유층에 미미한 청색을 띤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 중에 산화철 함량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조형상의 변화도 보이는데 명대는 주로 불상과 궁정용 제기를 제작하였는데 청대에 오면서 일상기물을 제작하였다.
또한 청대의 덕화요는 백자외에 청화자기와 채자도 제작하였으나 청대 중기에 오면서 서서히 쇠퇴한다.
강소의 의흥요는 자사기라는 독특한 도기를 제작하여 유명하였다.
자사기란 철의 함량이 높은 섬세한 도토로서 시유하지 않고 1100~1200c에서 산화소성한 도기를 말한다. 사용되는 도토는 자사점토로 옅은 자홍색이며 고령, 운모, 석영류의 성분에 특히 철 함량이 높다.
소성후의 발색은 적갈색, 담황색, 자흑색을 주조로 각 안색토의 배합에 따라 다양한 색채를 보여준다.
본래 자사기는 일상용기인 대형 항아리의 우너료인데 견고성이 높아 철갑이라 불렸으며 송대부터 사용했었다. 송대는 청자와 백자의 명성에 밀려 주목받지 못햇고 일부 문인들이 서민적이고 소박한 풍격에 취해 문방용구와 자사기의 실용성이 입증되면서 발전하고 청대는 번영의 시대를 맞는다.
자사기의 실용성이란 배체에 시유하지 않음으로 소성후 흡수율과 기공율이 크고 그러므로 투기성과 흡착기체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사기는 다른 자기류보다 차의 향기와 맛을 높여주고 꽃병이나 화분의 꽃은 쉽게 시들지 않는다.
기형은 차도구, 필통, 꽃병, 화분 등이며 장식은 주로 인각과 부조로 하였고 문양은 꽃, 시 등을 하였다.
공동의 석만요는 서민적이며 소박함이 특징이다. 역사적으로 석만요는 송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여러 개의 석만요가 있다. 송대에 시작한 불산의 석만요, 양강의 석만요, 명대의 박라 석만요가 그것이다.
석만도기의 전통은 기체가 두껍고 무거우며 태골이 암회색이고 유층이 두껍고 윤이 난다.
5.제작기술의 전성기
청대자기의 풍격은 화려함의 극치라 할 수 있다. 강희. 옹정시기에는 다양한 단색자와 채자의 생산이 있었고 건륭시기에 오면서 기형의 조형성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착상과 기발함이 요구되면서 각종 공예품을 모방한 전심, 전경, 영롱 등니 출현하였다. 자기위 호도, 연밥, 밤, 대추, 석류, 소라, 게 등의 각종 모형을 만든 제작 방법은 감탄할 정도로 정교하며 사실적이다. 이런 것들은 작은 기물을 완상용으로 제작하면서 자기를 예술적 단계로 끌어 올렸다.
건륭시기의 영광은 당시 경덕진의 관요 감독관리였던 당영의 열정에서 태어났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는 자기에 대한 지식과 문학, 그림 등에 능했다고 전해지며 자신의 지휘 아래 수 많은 단색유를 소제하였고 법랑채와 분채도 건륭시기 작품이 가장 우수하다. 그리고 그는 끝없는 탐구의 정열로 각종 공예품 즉 칠기, 목기, 동기 등의 질감을 자기에 대입시켰고 전대의 아름다웠던 자기들을 재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송대의 여요, 균요와 명대 선덕시기의 청화를 모방하여 더욱 완벽하게 재현하였다.
조형적으로 특별한 것은 우선 누공투병을 들 수 있다. 이 양식은 명대에 시도된 것이나 청의 건륭시기에 와서 완벽해진다.
병안에 겹친 장식을 하여 안쪽의 병이 빙글빙글 돌게 했으며 병의 내부는 분채로 영희도나 사계절을 묘사하였고, 병의 외부가 누공(조각하여 구멍을 뚫음)인 까닭에 내부의 병이 외부의 병 틈으로 돌면서 각기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또 다른 전경병은 목부분이 돌도록 한 것이며 어떤 것은 목 부분에 천간을 쓰고 고정된 병체에는 지지를 표시하였다.
또한 영롱자가 특별히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자태 위에 선택하여 청화 도안을 배합한 부위를 누조로 화문하고 양면을 통하게 한 후 내 외 모두 율를 바르고 누공문 장식 부분을 투명하게 한 것이다. 건륭시기의 영롱자의 도안은 대나무잎과 꽃술 부분이 이런 종류의 장식 수법으로 이용되었는데 이것은 청화문양과 반영되어 우아한 감각을 준다.
6.청대자기의 기형과 장식문양
1)기형
청대의 기형은 섬세한 작품이 끊임없이 연구되었으며 일용용기에서 장식용까지 다양한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특히 다양한 형태의 병이 출현하며 작은 술잔, 호(병), 좌돈(의자), 침9베개), 반(쟁잔), 완(작은 사발) 등의 일상용기와 장식용으로는 화병, 화준(술잔)등과 병풍,벽병(벽에 거는 병모야의 장식품), 화분, 화분받침 등이 제작되었고 문구로는 필통, 벼루, 물그릇, 인주합, 붓걸이, 바둑기구 등이 제작되었다.
(1) 병
목이 짧고 몸체보다 가늘며 몸체는 필통 같으며 전체적인 형이 마치 방망이 같다.
복부가 둥근 유추병과 각종 소형 병이 유행하였는데 버드나뭇잎을 연상케 하는 유엽병 외에 자연물의 형태를 다양하게 모방하였다.
건륭시기에 오면서 화려함의 절정을 보여주는데, 병에 쌍귀를 부착시키거나 귀대신 뿔없는 용, 사슴, 양, 코끼리 등의 각종 동물을 부착시킨 절묘한 병이 등장한다. 또한 병을 서로 붙여 만든 삼련병, 사련병, 오련병, 육련병 등이 성행하였다.
(2) 준
술단지나 물그릇으로도 사용되었고 장식용도 있다.
몸체가 사발을 엎어 놓은 것 같으면서 하부가 넓은 태백준, 주둥이와 어깨가 넓고 목이 짧으며 몸체의 하부가 좁고 굽이 바깥쪽으로 삐쳐진 관음준, 종 모양의 종준 등이 있다.
(3) 자소
자기로 만든 인형으로 청개구리, 앵무새, 귀가나팔 같은 형태 등이 유행하였다.
불교적인 것으로 관음상, 달마상 등이 응용되었고 곤륜산에 있다는 곤륜팔선상이 유행하였는데, 팔선은 한종리, 장과노, 한상자, 철괴리, 조국구, 여동빈 등의 여섯 신선과 남채화, 하선고 등의 두 여신선을 말한다.
2) 문양
청대의 장식문양은 다양한 유색이 출현하면서 채회의 방법도 아름답고 화려해진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산호빛 바탕에 오채, 황색 바탕에 홍채, 녹채, 청화, 녹색 바탕에 자색채와 두청 바탕에 유리홍의 배합 등을 조합시킴으로써 색채의 조화를 염두에 두게 되었다. 또한 강희시기부터 자기에 시를 쓰기도 하였다.
(1) 동물문
용, 봉황, 도철, 학 등이 애용되었고 구름, 번개 등이 보조문양으로 함께 사용되었다.
이외에 사슴, 물고기, 까치, 메추리 등이 있다.
(2) 식물문
목단, 국화, 연꽃, 매화, 월계, 장미, 수국, 해당화, 포도 등이 주로 사용하였다.
(3) 산수문
오채로 산수의 풍경이 묘사되었으며 강희시기에는 부벽준을 , 옹정식에는 피마준을 사용한 산수도가 유행하였다.
(4) 인물고사도
팔선도와 서상기, 전당몽 등의 소설을 극화한 내용의 희곡도가 유행하였으며 어린 동자들이 평화스럽게 노는 영희도도 또한 꾸준히 애용되었다.
(5) 서법문
각종 서법의 모양을 문양으로 장식하였고 시문이나 인각을 함께 사용하였다.
(6) 길상문
중국인들은 현실의 쾌락을 중요시했다고 생각되는데 따라서 각종 문양도 그런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었다.
즉, 목단은 부귀를, 복숭아는 긴 수명을, 송학은 장수를, 앵무새는 사랑의 표현을, 까치는 기쁜소식을, 사슴은 높은 지위를, 물고기는 재물을 , 메추리는 평안을, 국화는 인내를, 박쥐는 복을 의미하였다. 또한 석류는 다산을, 연꽃은 고귀한 인품, 소나무, 대나무, 매회는 고결한 인격 등을 상징하였다.
결론
인간의 역사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듯 중국 도자의 역사도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였다. 근대로 오면서 중국은 격동적인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는데 청대 말기 영국과의 아편전쟁이 그 시작이다.
청조의 몰락으로 중국도자역사의 중심적인 맥이었던 관요자기의 생산은 일단 막을 내린다.
1949년 대륙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고 국민당은 대만에 정착함에 따라 일단전쟁과 혼돈은 끝이 난다.
중국 근대도자의 시작은 1950년대부터 태동하는데 이전의 유명 도자지역을 중심으로 서서히 부활된다. 근대도자는 이전 도자의 특색이 관요 중심의 귀족성이 우세한 반면 민간도예의 활발한 부흥으로 소박하며 서민적인 정신이 우세하다는 것이다.
중국의 현대도자는 강력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체제나 이념이 아닌 중국 고유의 전통을 잘 보존시키고 발전시킨 것이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전통과 근본은 고수하고 이국의 취향을 중국적으로 재해석하여 왔다.
각 지역마다 특징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거의 전통의 틀 속에서 현대성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청자, 백자, 채자, 석기, 자사도 등 그 지방 특유의 점토에 따라 그 지역으 특수성을 고수하면서 새로운 재료와 안료로 현대적인 시도들이 이루어진다.
이들의 전통고수는 중국인 본래의 가치관인 중화사상과도 관계가 깊다. 중국인들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 믿으며 모든 것을 그들의 전통에서 찾으려 한다.
화려했던 중국 도자역사의 완성을 보기 위해 그 맥을 잇고 있는 중국 현대도자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우선 원. 명. 청대에 화려한 명성을 누렸던 경덕진은 1958년 경덕진 도자대학을 창설, 16만권의 장서를 구비한 도서관 등을 가지고 전문적인 도예인을 배출하면서 옛 전통의 부활을 시작한다.
같은 해 도자공업연구소를 창설하여 연구원 200명이 조형설계, 성형, 내화재료, 각종 유색의 창출 등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강서성 도자연구소, 도자박물관, 현대도자공장등이 50년대에 창설되어 현재까지 수백 종의 도자를 창출하고 있다.
경덕진은 하나의 도자도시로 옛 명성 그대로 현재도 남방지역 최고의 도자지역으로 군림하면서 전통을 살린 청화, 분채, 오채자기와 종이처럼 얇은 박태자기등 예술자기와 현대화된 찬구, 다구, 서양식기, 벽돌 등 산업도자가 동시에 제작되고 있다.
이렇듯 중국의 현대도자는 1950년 이후 활발히 전통도자지역에서 복원되어 옛 전통을 살리고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 새로운 도자창출에 전념하고있다.
도예작가들은 각 지역의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고 직책이 있으면서 체계적인 연구와 자유로운 창작활동으로 자기세계를 구축하고 개인 작업실을 가지고 활발한 도자창출이 이루어지고 있다.
풍부한 전통이 있으며 또한 그 전통은 고루함으로 치부하지 않고 존중하면서 그 막을 바탕으로 잠시 단절되었던 중국 도자역사를 복원하고 새로운 장을 이어가는 것이 현재 중국 도자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