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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70인을 각 동네에 보내심
누가복음 10장 1-16절 / 1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2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3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4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5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8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9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10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11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12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3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4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5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16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것을 갈릴리로부터 시작해서 유대 온 땅에 전파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지닌 능력을 나타내시어 알리시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십자가의 구속의 때가 가까이 이르자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일로 자신의 교회를 세워가시게 될 것을 알게 하시며 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받들어 따름에는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자기의 부인에 있으며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함으로 자기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가고자 하시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여 거부하고 나서는 것을 보면서,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푸실 것을 구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신들의 악한 생각을 돌이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뜻을 순종함으로 예수님을 영접함에 있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예수께 말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름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있게 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행동에 분노하며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태워 멸망케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자고 예수께 말함으로“너희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나,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름에 있지 못하고 자기들에게 해가 미친다면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자기들을 위하는 육체의 본능에 민감히 반응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만 분출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시고는 길을 돌아 다른 길로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 길을 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며 함께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며 그 깨달음에 있게 해 주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은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제자들 앞에 세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것에 그렇게 자신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나 하고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말이냐는 것에서 예수께서 해 주시는 말씀에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로 오셨지만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이 없이 그들로부터 배척을 당함에 있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렇게 머리 둘 곳이 없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말이죠. 영원한 생명이 아닌 부친을 장사 치르는 것을 비롯하여 세상 일은 이것에 관심을 갖고 이 일을 해 나가는 사람들이 할 것이지만,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의 나라로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 나가는 것은 사람들이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해 나가야 할 가장 중요한 일보다도 더 우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자는 자신들의 손에 잡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봄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자는 이것에서 시선을 놓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붙들고 바라보는 바인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길을 다 마칠 것입니다(빌 3:14).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그들이 믿음으로 있어온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것을 알게 해주시는 가르침을 주셨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에 이르기까지에 있어온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칠십 명을 제자로 세우시고는 예수께서 방문하려는 동네와 마을로 둘씩 짝지어 앞서 보내시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습니다. 한글 개역 및 개역개정 성경은‘칠십 인을 세우사’라고 되어 있으나, 또 다른 어떤 사본에는‘칠십 이 인을 세우사’로 되어 있습니다.1) 여기에서는 개역 및 개역개정 성경을 따라‘칠십 인’으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칠십 인을 세웠다는 것은 칠십 명의 제자들을 뽑으셨다는 것입니다. 또는 칠십 명을 제자로 삼으셨다, 칠십 명을 제자로 임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칠십 인의 제자’는 앞서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동네를 지나가려고 하실 때 그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이곳을 돌아 다른 길로 가셨습니다만, 그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중에서 칠십 명을 제자로 세우시고는 자신에 앞서 그들을 각 동네와 마을로 둘씩 짝지어 보내시면서“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가거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전대도 자루도 신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아라.2)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만일 그 집 사람이 네가 빈 평화를 받을 사람이라면 그 평화가 그에게 내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네가 빈 평화가 너희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다. 너희가 어느 마을에 들어가든지 이집 저집 옮기지 말고 한 집에서 머무르라. 주인이 주는 것을 먹고 마시며 그가 베푸는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여라. 일꾼이 자기의 품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환영하거든 이 두 가지 규칙을 지켜라. 첫째로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은 무엇이나 먹고, 둘째로 병자를 고쳐 주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을 전하여라. 그러나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거절하거든 거리에 나와서 이렇게 말하라. `우리 발에 묻은 너희 동네의 먼지를 여기 떨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심판날에는 소돔이 이런 동네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전체적인 내용에서 이전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각 동네에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 동네를 다니시면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고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주시면서, 자신에게 모여든 무리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기시고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심히 적으니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 9:35-38). 그리고 열 두 제자를 부르셔서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자와 약한 사람을 고치는 권능을 주어 각 동네에로 보내시면서 본문에서 하셨던 것과 거의 같은 말씀을 하셨었습니다(마 10:1-15).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가 70명의 제자들을 각 고을과 지역에 보내시는 것에서 다시 말씀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내용별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본문에서 예수님은 먼저 칠십 명의 제자들에게“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에 앞서 열 두 명의 제자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제자 공동체인 칠십 명의 제자들을 예수님이 가실 각 동네에 먼저 보낸 것은 목자 없는 양떼와 같은 자들에게 목자로 함께 하며 그들을 죄에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이는 일을 시작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알게 하실 것에서입니다. 병든 자와 약한 자들을 비롯하여 목자 없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모여들고 있는 것은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이시는 때가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들을 거두시는 추수하는 일을 예수님은 하십니다. 예수님은 각 동네에로 보내는 70명의 제자들이 바로 그 추수꾼으로의 부름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는 것에서“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라고 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70명의 제자들이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각 동네에로 보냄을 받은 지를 인식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에서‘적다’는 말은 범위, 정도, 수, 기간, 가치에 있어서“아주 작은”또는“거의 없는”을 뜻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이 일을 맡을 예수님의 제자들을 염두에 두시고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이죠.“그러니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복음을 듣게 하시는 때가 이르렀으며, 그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은 참으로 많은데, 그 일을 하는 사명을 맡게 될 예수님의 제자들의 수는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자들로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맡아 일하는 추수하는 일에 속한 일군들을 추수하는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어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선포하게 해 달라는 기도에 있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말이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으며, 그 나라에 들이는 추수기가 시작되었으므로 예수님은 목자가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이는 추수를 하실 것에서 그 일을 하는 일꾼들이 사람들의 집들을 찾아 방문하여 평안의 인사를 빌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에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자와 약한 사람을 고치는 권능을 행하는 것을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보낸 제자들에게서 그런 일을 볼 때 그들을 반갑게 맞이한다면, 제자들이 그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빈 그대로 평화가 내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전한 주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전한 주님을 자신들의 주님으로 맞이하여 들이므로 주님의 나라가 임한 평화에 그들의 집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비는 평화를 거부하며 제자들을 배척한다면 그들의 집 밖에서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리는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서 그들이 밟는 먼지가 그들에게서 제거되지 못하고 그들의 머리에로 뒤집어씌워질 것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말을 함으로써 그들이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악한 죄에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였습니다.
(3) 이러한 그들의 악한 행동은 심판 날에는 소돔이 이런 동네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의 악한 행동은 그들을 주님의 심판대에 서게 할 것이며, 이때 당하는 심판은 소돔이 당하였던 형벌보다 더욱 클 것이니, 곧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고 음부에 떨어질 것이었습니다(눅 10:15).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권능을 많이 행하셨던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이 그렇습니다. 만일 이곳에 베풀었던 권능을 옛 도시 두로와 시돈, 그리고 소돔에 베풀었더라면 그 도시 사람들은 요나서의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이 벌써 오래전에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서 깊이 회개하였을 것이어서 심판 날에는 두로와 시돈과 소돔이 오히려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이 받을 형벌보다 가벼울 것이란 표현에 의해서 이들이 받을 형벌의 엄중함이 얼마나 크며 무거운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처럼 평안에 있게 하시는 주님의 긍휼을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를 배척하는 자들이 받을 화는 예수님이 보내신 제자들을 반대하는 모든 지역에서 있게 될 것이었습니다.
(4)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예수님이 보낸 제자들을 환영하는 사람은 그들을 보낸 주님을 환영하는 것이요, 반대하는 사람은 곧 그들을 보낸 주님을 박대하는 것인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면 주님을 반대하는 사람은 그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박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예수님이 보낸 제자들이 전하는 평안의 인사를 받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거부하며 예수님을 박대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자비 받기를 거부하는 것에 있는 것이니, 그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들이 받을 음부에 떨어질 화를 그대로 당하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전하는 말을 듣는 자는 곧 그들을 보낸 주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니 그들에게는 평안의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과 정반대의 현상에 있는 사람의 생각인‘극과 극’을 봅니다. 사람의 악한 죄와 하나님의 선한 의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의의 끝에는 사람의 악한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악한 죄의 끝에서 하나님의 선한 의가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출현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이 보낸 아들을 통해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 뜻을 알려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하여 주님을 배척함으로써, 그분을 보낸 하나님을 배척하는 악함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권능을 많이 행하신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이 그렇다면 모든 지역에서 동일한 악한 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마저 외면하여 거부하는 것에서 사람의 악의 절정을 봅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극에 있는 사람의 실상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악한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의는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심판 날에 사람들이 행한 악한 죄 그대로의 값음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행해짐은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자들을 위하여 계획하시고 그 준비에 있어온 자비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70명의 제자들을 각 동네로 보내셔서 예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행하는 것을 통해서 사단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게 하셨습니다(눅 10:18-20). 70명의 제자들에게 이를 말씀하셨다면, 이들과 함께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모든 자들은 동일한 기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들과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려고 아들이 택한 사람들 밖에는 참으로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며, 열 두 제자를 향하여“너희는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되었으니 참으로 복 있다.”(눅 10:23-24)라고 하였습니다.‘12명의 제자 - 70명의 제자 -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 이들은 하늘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된‘한 무리/한 백성/한 자녀’로 묶여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믿음의 형제’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말입니다.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으로 복 있는 자들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우리에게 날마다 행복이 제공되고 있는 복의 근원입니다.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이것뿐입니다. 우리에게 복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으로 기뻐하는 것에 우리의 만족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힘이 되고 있는 것은 우리 이름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육으로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참으로 닿을 수 없는 높고 높은, 멀고 먼 곳인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몸이 이 땅에 있으면서도 바라보며 그 나라를 다스리시는 주님을 의존함에 있는 것은 야곱이 토로한 바와 같이 130년을 살았어도 인생이 슬픔뿐이요 탄식뿐인 험난하고 험악한 세월 속에서 가져나가고 있는 것입니다(창 47:9). 그렇게 우리를 살게 하는 유일한 기쁨인 것이요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과 함께 함에서 우리 이름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해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므로 그분을 보는 눈에 있고 그분을 듣는 귀에 있어 우리 마음에 만족감을 주는 이 행복함이 갖는 복 있음에 있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알아가는 기쁨에 있는 우리입니다. 이 기쁨은 말이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영이 주는 기쁨으로서 육이 갖는 기쁨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이 갖는 기쁨은 행복한 웃음이나 행복한 눈물로 잠시 잠간이나마 행복한 때에 있는 유익이 있습니다. 가령, 올림픽 경기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사람은 메달이 확정되는 그 순간에 환호하며 환희에 젖어 있습니다. 올림픽 경기와 무관한 국민도 마치 자신이 경기에 임하여 메달을 획득한 것처럼 환호하며 크게 기뻐합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뿐이지, 이것이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모 기사에서 어느 메달리스트가 혼자 외롭게 지내다가 아무의 돌봄도 없이 쓸쓸하게 죽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한순간 환호하며 환희에 있었던 메달은 그가 죽자 그 가치를 알지 못한 사람에 의해서 고물상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것을 발견하고서는 되찾아 시(?)에서 관리하여 보존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메달이 그렇게 메달을 딴 사람과 국민에게는 기쁨이 되었었는데, 그 메달을 따기 위하여 경기에 임한 누군가에게는, 그리고 그를 바라본 수많은 사람의 국민에게는 결코 웃지 못하고 한순간의 안타까움으로 아쉬움을 가지며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분해하며 분노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말이죠. 이러한 것으로 영원히 함께 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기뻐하는 기쁨을 놓치며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말이죠. 이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육이 갖는 기쁨이 영이 주는 기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이...어둠이 빛을 몰아내고 빛이 있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정복하고 어둠이 있던 자리를 차지하여 다시는 어둠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닌 영원히 빛이 지배하는 세계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참조. 요 1:5). 이것이 말해지며, 이것으로 위로 받으며, 이것으로 사는 것이 있는 것이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의 생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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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0인으로 번역한 성경은 개역 및 개역개정, 우리말성경, 한글킹제임스성경 이다. 그리고 72인으로 번역한 성경은 공동번역, 표준새번역성경, 현대인의성경, 현대어성경(현대어성경은 72명으로 번역하고서는 보충 설명으로 어떤 사본에는‘70명’으로 되어 있다고 표기하였다. 반면에 바른성경은 칠십으로 번역하고선 ( )에 보충적으로 2를 추가하였다. 즉 칠십(이)라고 번역하였다. 새번역성경도‘일흔(두) 사람’이라고 번역하였다.
2) 길에서 사람을 보고도 아는 체 하지 말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다. 길에서 인사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즉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인사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것으로 인사하는데다가 시간을 다 쓰느라고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