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割禮
할례는 어떻게 기원되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까? 할례는 본디 고대 근동 여러 나라에서 행해지던 사회적 관습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 제도를 종교 사회적으로 확대 적용하였다. 하느님 백성인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준수하고 계승하는데 가장 탁월하고 적절한 제도라고 판단한 것이다. 할례에 대한 그들의 기본적 이해는 자신들은 ‘하느님의 것 하느님 백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 따라 남자아이 생식기인 음경에서 포피를 제거하는 할례를 베풀었다. 유대인들에게 생식기는 생명을 상징하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여기고 이 할례로써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고 여겼다.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시행하였다. (창세 17,12; 레위 12,3). 그리하여 몸에 새긴 이 표징으로 하느님의 사람임을 기억하였다. 할례는 또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임을 드러내는 주요한 행위로도 수용되어 대대로 계승하였다. 신약시대 예수께서도 여드레가 되자 할례를 받았다(루카 22,21).
정결례淨潔禮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정결례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 법이 생긴 목적은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니 사람도 정결하고 거룩하게 되어 죽게 되는 일 없이 살도록하기 위한 것이었다.(레위기 11,44-45). 한처음 인간은 하느님을 닮아 완전한 무결점 존재 즉 정결하고 거룩한 존재였다. 이 부분에서 정결함은 거룩함의 동의어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과 그분의 명령을 어기고 죄에 떨어지고 추방되어 하느님을 대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고통과 죽음을 초래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잃어버린 것 즉 거룩함과 정결함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부정 불결함에 떨어졌다면 정결례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 이는 구약성경과 전체를 관통하며 특히 레위기 전체에서 규정과 법으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로 이어졌다. 정결법의 적용 범위는 종교적(제사와 제물 제관) 사회 일반 모든 영역에 해당된다.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과 인간 종교와 사회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결례와 할례는 어떤 것이 먼저 기원되고 선행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
세례洗禮
세례는 그리스어(βαπτισμα)에서 파생된 명사로 '물에 잠그다', '적시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세례 용어와 행위는 신약시대에 나타난다. 그러나 그 기원은 구약시대로부터 기원한다. 구약시대 모든 정결례 규정과 법규를 집행할 때 물이 필수로 작용했다. 가령 경신례를 집행하는 사제는 물로 몸을 정결하게 씻었고 각종 제례와 제물에 물이 사용하였다. 사실 물은 모든 종교예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먼저 세례를 시작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마르 1,4-8). 그러나 인류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보면 이러한 일, 가령 세례 운동 같은 것이 그저 한 사람 요한을 통해 단번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에는 침례 운동이라 할 수 있는 일련의 움직임들이 있었다. 가령 ‘아침의 잠수부들’과 ‘에세네파’등이 이었다. 에세네파는 정결만을 목적으로 날마다 목욕을 했다고 한다. 요한은 에세네파를 알고 있었고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요한과 예수시대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이라는 외세의 위협 앞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강박관념처럼 정결례법에 의지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 공동체의 종교와 사회는 하느님과 정결함 거룩함에서 멀어지고 구원은 요원했다. 그러니 더욱더 끊임없이 정결례를 행해야 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 요한이다. 그는 단 한 번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구원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요한은 이스라엘에 구약시대부터 면면히 계승되어온 정결례와 할례를 하나의 ‘세례로 통합하였다. 예수께서도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으셨다. 세례란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무죄하신 하느님이신데 왜 죄 많은 사람들이 받는 세례를 받았을까? 이에 대해 가장 권위있는 해석이 마태오 본문에 있다. 요한은 예수의 세례 요청에 겸손되이 사양한다. 그러자 예수께서,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 라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인류 구원 계획을 이루어지기 위해 상명하복 군림하는 자세가 아닌 인간과 똑같은 사실은 더 열악한 환경과 조건을 취하셨다. 가장 탁월하고 적절한 방법이다. 그럼에도 혹시나 발생할 우려 때문에 공관복음 저자들은 한 대목을 더 추가한다. 그 때 하늘이 열리면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계시한다.
초대교회 신자 중엔 유대인이 많았다. 그들은 다 여드레만에 할례 받은 자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히브리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를 유대교 분파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할례를 당연시했고 입교하는 이방인에게 세례와 함께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사도들은 명확한 입장을 제시하지 않고 혼란할 때 바오로는 명확하게 지침을 제시한다. 구원은 예수에 대한 믿음에 있는 것이지 할례나 율법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갈라 5,6).
세례는 신약시대부터 시작하여 당시 유대 사회에 엄청난 사회적 종교적 파장을 일으켰고 그리스도교에 계승되어 현대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세례의 가장 정확한 본질은 무엇일까? 사도 바오로는 간단 분명하게 대답한다 “세례란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이다”(로마 6,3;갈라 3,27). 바오로의 이 대답은 구약시대 할례와 정결례의 기원 그 목적과 같은 선상에 있다.
이 시점에 문득 궁금한 것? 구약시대에서 시작한 할례와 정결례가 본 의미를 잃어 요한과 예수 시대 세례로 대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교의 그 세례는 이천년이 지난 오늘나라 시작때의 그 열정과 순결함을 간직하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