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단법석에서 만난 두 스님 / 성전 스님
지리산에 가면 실상사 옆에 작은 학교가 있다.
그 곳에서 얼마 전 모임이 있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정신에 근거해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수행자는 어떻게 살아야하고
수행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재가와 출가가 하나가 된 그 자리는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수행자를 보았다.
손가락 6개를 소지하고 오직 깨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가는 스님의 모습은 보기에도 가슴을 울렸다.
누가 그렇게 자신의 길을 사무치게 걸어갈 수 있겠는가.
때로 태만하고 때로 길을 잃고 살아가는 내 모습 앞에서
스님의 소지한 손은 선명한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오직 깨치기 위해 손가락을 태워 가며 공부한 그 스님 앞에서
내 삶의 자취는 그저 부끄러울 뿐이었다.
잠이 올 때면 목에 밧줄을 걸고 졸음을 쫓아가며 공부했다는
그의 이야기 앞에서 피멍이 든 그의 목을 나는 떠올렸다.
피멍이 들고 들다 피가 터지면 그 목의 쓰림으로
잠을 쫓았다는 공부 이야기는 내 게으른 삶을 향해
내려치는 번개와도 같았다.
나는 감전 되었었다.
아직 저런 수행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이었다.
깨달음의 사회적 의미를 떠나서라도
그의 공부 여정은 커다란 가치를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
깨달음의 성과물을 내 놓으라고 하면 그는 서툴지 모르지만
이심전심의 미소를 지으라면
그는 능히 지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공부가 아니면 삶이 무엇인가라는,
삶에 대한 단호한 결단이 들어 있었다.
그는 맑고 평온 했다. 그는 전통적인 간화선의 수행자였다.
그는 나무가 되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아래 서면 그늘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또 하나의 수행자를 만났다.
그는 전통적인 간화선 수행자는 아니다.
젊은 시절 선방을 다니기는 했지만 선방에서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는 수행의 의미에 대해서, 선의 의미에 대해서
새로운 답을 제시 하고자 한다.
그는 스스로 선방이 아닌 거리를 만행하며 다녔다.
다니면서 그는 새로운 화두를 만났다.
사람도 자연도 자본도 종단도 그에게는 모두 화두로 다가왔다.
그는 그 화두를 진정성을 가지고 탐구하고 있다.
그의 화두는 그의 진정성을 타고 내게 다시 화두로 전해진다.
수행자라면 최소한 가난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봉암사의 수좌들이 봉암사 인근의 주민들 보다
부자로 살아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나는 그가 건넨 화두를 받았다. 나는 화두를 참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20년 전에 받은 화두보다도
내 가슴에 분명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 화두는 자비를 실종한 내 삶에 내리는 경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내 가슴에 자비가 회복되기까지 그것은 화두임에 틀림없다.
그는 바람과 같은 수행자이다.
그는 서서 나무와 같은 그늘을 드리우기 보다는
스스로 찾아가 시원함을 전하는 바람과 같은 수행자로 살아가고 있다.
남루한 옷으로 권위를 지웠고
까맣게 탄 얼굴로 수행자의 고고함을 지웠다.
그에겐 턱이 없다. 인생 뭐 별 것이 있나.
비싸게 굴지 말고 빨리 사인 해줘. 하며
웃던 그의 말처럼 그는 '나'를 스스로 버렸다.
어쩌면 거울을 봐도 그는 그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삶의 자리 역시 내게는 동경이기도 하다.
흑자는 나무와 바람의 우열을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무는 나무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원만구족 하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는 아름다운 삶의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그들은 거울처럼 우리들의 삶을 비추어 주기 때문이다.
나는 두 수행자의 거울을 통해서 나를 보았다.
나의 모습은?
여러분도 선지식의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기 바란다.
- 성전스님 (남해 용문사 주지, 불교방송 '행복한 미소' 진행)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