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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노래 하 많은 사연 해운대 엘레지 외 /그리고 ‘못 잊어’
♪♫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세월이 가고 너도 너도 또 가고 나만 혼자 외로이/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 잊어(1)’ 내가 운다// ♬ 백사장에서 동백섬에서 속삭이던 그 말이 오고 또 가는 바닷물 따라 들려오네 지금도/ 나는 가련다 떠나가련다 아픈 마음 안고서/ 정든 백사장 정든 동백섬 안녕히 잘 있거라// ♫울던 물새는 어디로 가고 조각달만 외로이/ 바다마저도 잠이 들었나 밤이 깊은 해운대/ 이제는 다시 두 번 또 다시 만날 길이 없다면/ 못난 미련을 던져 버리자 저 바다 멀리 멀리♫♬
‘해운대 엘레지’다. 해운대가 참 좋았다. 조선 비치 호텔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바지에 한 해 살았다. 거기서 아내랑 아이들이랑 개구리 소리도 듣고 노랑 장다리 밭에서 나비 호호 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늦은 밤 대문을 열고 나와, 쏴아 섞여서 몰려오는 바다 냄새며 파도 소리를 가슴으로 맞받으며 이 노래를 불렀다. 엄마의 ‘애청곡(愛聽曲)’이어서였다고 하자. 이듬해 나는 근무지를 양산에서 부산으로 옮기고 여름 되기가 무섭게 <한국 수필>을 통해 문단에 데뷔(83년), 아직 말석에 앉아 있다.
그로부터 서른 해가 지난 뒤 나는 내륙 깊숙이 자리 잡은 경기도 용인에 여생을 보내려고 와 있다. 서른 네 해 동안 길러 온 아들을 잃은 채. 딸집이다. 손가락으로 달 수를 꼽아 보니 어느덧 여섯이 가깝다. 아직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내가 이럴진대 하물며 본래 나보다 더 심약한 아내이랴.
해운대, 내가 ‘부산 노래’ 19곡을 유품으로 여기고-시민들을 위한 선물로까지 확대 해석하기도 하면서- 녹음실을 들락거릴 때도 틈만 나면 지팡이에 의지한 채 해운대를 찾았었다. 갖가지 추억이 서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부산 노래’ 가사를 여기 적어 보기로 하자.
맨 먼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부른다. ♪♫보슬비가 소리가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 잘가세요 잘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2)’ 판자 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의 아가씨가 슬피 우네 이별의 부산 정거장// 서울 가는 십이 열차에 기대앉은 젊은 나그네/ 시름없이 내다보는 창밖의 등불이 존다/ 쓰라린 피난살이 지나고 보니 그래도 끊지 못할 순정 때문에/ 기적도 목이 메어 소리 높이 우는구나 이별의 부산 정거장//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말 한 마디를/ 유리창에 기대 보는 그 마음 안타까워라/ 고향에 가시거든 잊지를 말고 한두 자 봄소식을 전해 주소서/ 몸부림 치는 몸을 뿌리 치고 떠나가는 이별의 부산 정거장 ♭♫♫. 부산 시민은 ‘이별’을 가슴에 예견하면서 살아왔는지 모른다. (가사 중에 ♥를 참조하렴, 아들아. ‘못 잊어’가 부산 노래에 몇 군데나 나오는지 세어 보자꾸나.) 이 노래야말로 온 국민이 매달려 절창했던 명곡이었다고 기억한다. 1953년에 발매된 이 노래는 두말할 것도 없이 6.25 한국 전쟁과 관련이 있다.
같은 해, ‘굳세어라 금순아’가 나와, 강산이 여섯 번이나 바뀔 지금에 이르기까지 풍미(風味)했다는 표현을 갖다 붙여도 괜찮을 정도가 되고 말았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울어 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 몸은 국제 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에 너와 난 곳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남북통일 그날이 오면/ 손을 잡고 웃어나 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보자♬♬. 마음이 조마조마한 상태에서 몇 번이나 불러봐야 ‘못 잊어’가 안 나온다는 데서 오히려 안도의 숨을 쉬게 된다.
그러나 세쌍둥이 중 하나인 ‘경상도 아가씨’에선 다시 ‘못 잊어’가 얼굴을 내민다.♭♬ 사십 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 피난살이 처량하게 동정하는 판잣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이 우는구나/ 그래도 대답 없이 슬피 우는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고향길이 틜 때까지 국제 시장 거리에/ 담배 장수 하더라도 살아 보세요/ 정이 들면 부산항도 내가 살던 정든 산천/ 경상도 아가씨가 두 손목을 잡는구나/ 그래도 대답 없이 슬피 우는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영도다리 난간 위에 조갈달이 뜨거든/ 안타까운 고향 얘기 들려주세요/ 복사꽃이 피던 날 밤 옷소매를 부여잡던/ 경상도 아가씨가 서러워서 우는구나/ 그래도 가고 깊은 ♥‘잊지 못할(3)’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사십 계단 문화관에 가면 박재홍 선생 대신 지금도 내 노래가 울려퍼진다. 중구청 총무국장이 내가 처음 취입했을 때의 테이프를 장착했기 때문이란다, 개가 들어도 웃겠다. 박재홍 선생의 미망인이 한번 왔더란다. 그러나 바꿀 수가 없어 지금까지 버텨내고 있다.
내게는 정말 사연이 있는 게 ‘울며 헤진 부산항’이다. 선종하신 내 바깥사돈(박노일 안젤로)의 애창곡 바로 ‘울며 헤진 부산항’, 당신의 칠순 잔치 때도 당신은 그 노래를 청하실 정도였으니…….지금은 밀양 성당 천상 낙원에서 영면에 드신 그분 앞에 가면 속으로 부르는 1940년 발매, 남인수의 대표곡.♫♯ 울며 헤진 부산항을 돌아다보니/ 연락선 난간머리 흘러온 달빛/ 이별만은 어렵더라 이별만은 야속더라/ 더구나 정들인 사람끼리 음음음음음//달빛 아랜 허허 바다 파도만 치고/ 부산항 간 곳 없는 수평 천 리 길/ 이별만은 무정터라 이별만은 야속터라/ 더구나 ♥‘못 잊을(4)’ 사람끼리 음음음음음 ♯♭♫♬…… 못 잊을 사람, 눈시울이 젖는다.
백야성의 ‘잘 있거라 부산항’엔, ‘못 잊어’를 작사가가 두 번씩이나 넣었다. ♯♬ 아아아아 잘 있거라 부산 항구야/ 미스 김도 잘 있어요 미스 리도 안녕히/ 온다는 기약이야 잊으랴마는 / 기다리는 순정만은 버리지 마라 버리지 마라/ 아아아아 또 다시 찾아오마 부산 항구야// 아아아아 잘 있거라 부산 항구야/ 미스 김도 ♥‘못 잊어(5)’ 미스 리도 ♥‘못 잊겠소(6)/ 만나면 즐거웁고 그리워해도/ 날이 새면 헤어지는 사랑이지만 사랑이지만/ 아아아아 또 다시 찾아오마 부산 항구야♭♬
부산 노래를 찾아 헤매다-인터넷을 모를 때였다- 노인 학교 학생한테서 천금 같은 보물을 넘겨받았던 곡, 집안 형님이기도 한 이○우. 불행하게도 형수가 먼저 작고하고, 동성동본인 누나뻘 되는 60대 중반 여인과 사련에 빠져 있던 중인데 노인 학교 교장으로서는 모든 걸 눈감아야 할 형편이었다. 어쨌거나 윤일로 노래 신세기 레코드 발매 ‘추억의 영도다리’! ♫♪울었네 소리쳤네 몸부림쳤네/ 안개 낀 부산항구 옛 추억이 새롭구나/ 몰아치는 바람결에 갈 길이 가로막혀/ 영도다리 난간 잡고 나는 울었네// 울었네 소리쳤네 몸부림쳤네/ 차디찬 부산 항구 조각달만 기우는데/ 누굴 찾아 헤매이나 어디로 가야하나/ 영도다리 난간 잡고 나는 울었네// 울었네 소리쳤네 몸부림쳤네/ 눈물진 부산항구 이슬비반 내리는데/ 마디마디 사무치는 그 옛날 과거사가/ 오늘밤도 애처로이 나를 울리네♫♫♬. 후문에 의하면 누님도 유명을 달리했다더라. 다행히(?) 여기도 ‘못 잊어’는 없다.
그러나 가슴을 무너지게 하는 ‘용두산 엘레지’가 내 누선을 자극하더니, 끝내 눈물을 쏟게 한다. 딸과 아들이 나를 따라 용두산에 올라가서 비둘기에 모이도 주었고, 내 노인 학교 학생들도-전라도에서 온 단가(短歌)/판소리 전에 목을 축이는 노래를 부르러 오던- 만나던 곳이었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 말자/ 한 발 올려 맹세하고 두 발 디뎌 언약하던/ 한 계단 두 계단 일백 구십 사 계단에/ 사랑 심어 다져 놓은 그 사람은 어디 가고/ 나만 홀로 쓸쓸히도 그 시절 ♥‘못 잊어(7)’ 아아아아 ♥‘못 잊어(8)’ 운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그리운 용두산아/ 세월 따라 변하는 게 사람들의 마음이냐/ 둘이서 거닐던 일백 구십 사 계단에 즐거웠던 그 시절은 그 어디로 가 버렸나/ 꽃 피던 용두산 아아아아 용두산 엘레지♪♪♯♭. 아들 딸 아내와의 사연이 있다. 미화당 백화점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에 찍은 사진이 천하일품이라 그걸 확대하여 지금도 내 서재에 걸어 놓은 것. 그런가 하면 노래를 취입한 뒤 갓 태어난 손주 종빈이를 데리고 와서 키우다가 가끔 용두산에서 비둘기 모이를 주던 추억을 재현했는데, 녀석이 그 노래를 얼마나 또 구성지게 잘 부르는지……. 영호남 지역감정을 타파하자는 내 콘서트 준비 때문에 악보를 배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콘서트에 문정수 전 부산 시장이 우정 출연했다.
‘못 잊어’가 각각 1 ‧ 2절에 세 개나 균배(均配)된 노래, 김수희가 부른 것은 블루수의 ‘블’자도 모르는 내겐 오히려 충격이다. ‘남포동 블루스’. 교직에 있을 때 동료 여교사가 블루스를 추자면 팔짱을 끼고 나서는 바람에 얼마나 우스갯거리가 되었던가. 어떤 신부(神父)도 남몰래 스텝을 밟는다던가? 에라 모르겠다. 그때도 그랬었지만 지금도 변조(變調)하여 흉내나 내어보자. 네온이 춤을 추는 남포동의 밤/ 이 밤도 ♥‘못 잊어(9)’ 찾아온 거리/ 그 언젠가 사랑에 취해 행복을 꿈꾸던 거리/ 사랑을 잃은 내 가슴 속에 추억만 새로워/ 이 밤도 불러보는 이 밤도 불러보는 남포동 블루스// 이슬비 부슬 부슬 내리는 이 밤/ 첫 사랑 ♥‘못 잊어(10)’ 찾아온 거리/ 어디선가 부를 것 같은 다정한 임의 목소리/ 사랑이었네 행복이었네 첫사랑 ♥‘못 잊어(11)’/ 이 밤도 불러보는 이 밤도 불러 보는 남포동 블루스♪♯♫
꼭 빼닮은 듯한 블루스가 또 있다. 내가 최고의 가수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 천하의 나훈아가 작사 작곡 노래까지 도맡은.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은 국회의원인 유재중 전 구청장과 한자리에 앉아 담소를 하고 있었다. 혹시 ‘남천동 블루스’를 아느냐고. 배상도 전 북구청장, 정흥태 부민병원장 등과 함께였다. 그는 고래를 가로저었다. 내가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 ‘못 잊어(12)’ 다시 찾은 거리 남천동 밤거리/ 밤 파도는 여전한데 사랑은 오간데 없고/ 물거품에 네온불이 산산이 부서지듯이 사랑도 꿈도 잃어버린 남천동 블루스//추억이 살아 있는 거리 남천동 밤거리/ 밤바다는 조용한데 네온은 밤을 태우고/ 한쪽 날개 잃어버린 동백섬 외갈매기/ 버 바다 따라 떠난 사람 남천동 블루스// 사랑이 춤을 추는 거리 남천동 밤거리/ 이름 모를 밤 나그네 바닷가 달빛 줍고/ 사랑 잃은 저 여인은 추억의 커피 한 잔/ 시작도 여기 끝도 여기 남천동 블루스♬♬……. ‘해운대 엘레지’의 노랫말을 극찬한 원로 스님이 있었는데, 참 대비가 된다. 나훈아의 한계를 보는 건 내게 아픔이다.
아들은 자갈치가 꼭 장소명만은 아니라는 걸 안다. 내가 아들에게 일러 준 적이 있어서다. 어려서다.
“얘야, 자갈치라는 고기가 있단다. 그러니 우리는 자갈치를 먹을 수 있거든?”
사실이다. 자갈치는 고기 이름이기도 하다. 그 ‘자갈치의 아지매’의 평생을 그린 노래가 있다. 이번에도 앞서처럼 나훈아가 작사 작곡 노래. 어려워서 아내가 배울 수 없을 거라 했지만 나는 거뜬히 소화해 냈다. 불러보자, 여기서.♫♯ 자갈길을 밟으며 어찌 살까 하루를/ 울면서 헤매던 지난날도/ 입술을 깨물면서 뱃고동의 반평생 부산의 자갈치 아지매/ 싱싱한 아침 햇살 저무는 저녁노을/ 이제는 자랑스런 자갈치 아지매/ 어서어서 오이소 웃음으로 반기는 부산의 자갈치 아지매// 해와 달이 바뀌어 이마의 주름살을 쳐다보면 쏟아지던 눈물도/ 저 푸른 파도 따라 흘러 보낸 반평생 부산의 자갈치 아지매/ 한맺힌 인생살이 갈매기 눈물 따라/ 이제는 억척스런 자갈치 아지매/ 어서 어서 오이소 웃음으로 반기는 부산의 자갈치 아지매♫♭. 다행이다. ‘못 잊어’가 안 나오니.
그러나 ‘못 잊어’는 부산 노래의 꿰미와 다름없다. 여담이다. 작곡가 김정우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못 잊어’를 자칫하면 ‘모디저’로 소리낼까 봐 염려스럽다고 하는 소릴 들었다. ‘몬니저’가 맞다는 유권 해석은 한글학회 부산 지회장 류영남 박사한테서도 들었다.
다음. 프로 야구장 어디서든 가을 하늘을 수놓은 ‘부산 갈매기’를 들어보라. ♫♭♬지금은 그 어디서 내 사랑 잊었는가/ 꽃처럼 어여쁜 그 이름도 고왔던 순이 순이야/ 파도치는 부둣가엔 지나간 일들이 가슴에 남았는데/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너는 나를 정녕 잊었나// 지금은 그 어디서 내 모습 잊었는가/ 꽃처럼 어여쁜 그 이름도 고왔던 순이 순이야/ 그리움이 물결치는 오늘도 ♥‘못 잊어(13)’ 네 이름 부르는데/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너는 벌써 나를 잊었나/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너는 벌써 나를 잊었나♪♯♬…… 문정수 전 부산 시장이 총선에 출마했었을 때, 내 노인 학교에 와서 간청을 해서 불렀던 노래다. 비록 낙선했지만. 그는 몇 년 뒤 콘서트에 우정 출연으로 보답했다. 그 장소에서.
‘못 잊어’가 열아홉 중 열세 군데 등장. 이래 놓고 보니 이젠 오히려 ‘못 잊어’가 안 나오는 부산 노래에 의아심과 섭섭함을 갖게 된다. ‘연락선은 떠난다’도 그렇다. ♪♫쌍고동 울어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잘 가소 잘 있소 눈물 젖은 손수건/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흘리면서 떠나갑니다 울지를 말아요// 파도는 출렁출렁 연락선은 떠난다/ 정든 임 부여안고 목을 놓아 웁니다/ 오로지 그대만을 오로지 그대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한숨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울지를 말아요// 바람은 살랑살랑 연락선은 떠난다/ 뱃전에 부딪는 안타까운 조각달/ 언제나 임자만을 언제나 임자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끝없이 지향 없이 떠나갑니다 잊지를 말아요♫♯♪.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못 잊어’를 피해갔다. 비교적 긴 수필 한 편을 이 ‘연락선은 떠난다’로 꾸민 적이 있어서 이렇게 묘한 정서에 휩싸이게 되는 걸까?
고등 학교 교과서에 실린 ‘돌아와요 부산항에’도 마찬가지.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오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그리워 그리워서 헤매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날의 꿈이었네/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은/ 부딪쳐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내겐 ‘함경도 사나이’에 대한 남다른 추억이 있다. 금강 예식장에서 주례를 서려고 앉아 기다리는데 시간이 좀 남았다. 취입 일자는 다가오고 조급한 마음에서 악보를 호주머니에서 끄집어냈다. 순간 카메라가 악보에다 앵글을 맞추는 게 아닌가? 그러나 어쩌랴 나는 허밍으로라도 박자를 익혀야만 했다. ‘이별의 부산 정거장’과 2년의 차이가 난다. ♫♬ 흥남부두 울며 차던 눈보라 치던 그 날 밤/ 내 자식 내 아내 잃고 나만 외로이/ 한이 맺혀 설움이 맺혀 남한 땅에 왔건만/ 부산 항구 갈매기의 노래조차 슬프구나/ 영도다리 난간 위에 누구를 기다리나// 동아극장 그림 같은 피눈물 젖은 고향 꿈/ 내 동네 물방아 도는 마을 언덕에/ 양떼 몰며 송아지 몰며 버들피리 불었소/ 농토까지 빼앗기고 이천 리 길 배를 곯고/ 남포동을 헤매도는 이 밤도 비가 온다♪♫
1년 뒤에 고고의 성을 울린 ‘항구의 사랑’. 우리 나라 국민 애창가요 20 걸 안에 들어가는 노래. ♫♪ 둘이서 걸어가는 남포동의 밤거리/ 지금은 떠나야 할 슬픔의 이 한밤/ 울어봐도 소용없고 붙잡아도 살지 못할 항구의 사랑/ 영희야 잘 있거라 영희야 잘 있거리// 네온불 반짝이는 부산 극장 간판에/ 옛꿈이 아롱대는 흘러간 로맨스/ 그리워도 소용없고 정들어도 맺지 못할 항구의 사람/ 영희야 잘 있거라 영희야 잘 있거라 ♪♯ 이영희라는 교직 선배가 노인 학생이어서 그와 만나면 버스 안에서도 이 노래를 불렀고, 그러다가 그와 나는 울고 웃었다.
‘동백섬 그 사람’,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발굴(?)한 것인데, 가사만 있지 다른 자료는 노래방 기기뿐, 음악 전담 교사에게 부탁하여 채보(採譜)를 하는 등 수선을 떨어 겨우 마이크 앞에 설 수 있었다. 미리 밝히는 게 순서가 아니지만, 구하나라는 가수는 꽤나 이름이 있는데, 오늘 그의 홈피를 보다가 너무 야하게 몸매를 드러낸 걸 보고 일순 당황하기도 했다. 희한하게도 1절과 2절 가사가 똑 같다. ♭♬나를 두고 동백섬을 떠나간 그 사람/ 동백꽃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더니/ 어느 새 한 잎 두 잎 바람에 지는데/ 꽃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져 내리는데/ 돌아올 줄 모르는 돌아올 줄 모르는 첫 사랑 그 사람을/ 주야철야 그리네 주야철야 그리네 동백섬 그 사람을♭♬
‘부산 행진곡’이 있다. 1958년생. ♬♫동서양 넘나드는 무역선의 고향은/ 아시아 현관이다 부산 항구다/ 술취한 마도로스 남포동의 밤거리에는 꽃 파는 젊은 아가씨들의 노래가 좋다// 우뚝 선 영도다리 갈매기의 놀이터/ 달마중 해운대도 부산 항구다 가느니 못 가느니 종열차의 벨이 운다/ 경상도 사투리 아가씨들의 인사가 좋다♫♫……이번 열네 번째 수필집 <죽어서 개가 되어도>에 그 옛날 ‘경상도 사투리’ 대신 ‘파자마 입은’으로 불렀다는 추억담도 곁들여 놓았었는데, 오늘 보니 그 파자마의 실체(實體) 3절을 구할 수 있었다.♪♫ 봄바람 동래 온천 여름 한 철 송도요/ 물에 뜬 네온 불도 부산 항구다/ 메리킹 부두에서 내일 다시 만나 주세요/ 파자마 입은 아가씨들의 인사가 좋다. 뒤죽박죽이라 가사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나 같은 장삼이사의 몫이기도 하다. 도대체 파자마를 입은 묘령의 아가씨들은 누구였을까, 완월동의 몸 파는 아가씨?
마지막은 ‘못 잊어’가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없을 만큼 빠른 템포의 ‘아메리칸 마도로스! ♫♫ 무역선 오고 가는 부산 항구 제이부두/ 술 취한 마도로스 이별이 야속터라/ 닻줄을 감으며는 기적이 울고/ 뱃머리 돌리며는 사랑이 운다/ 아아아아아아아 항구의 아가씨 울리고 떠나가는 울리고 떠나가는 아메리간 마도로스// 꽃물결 넘실대는 부산 항구 제2부두/ 한 많은 마도로스 항구가 야속터라/ 깃발을 올리며는 기적이 울고 테프가 끊어지면 사랑이 운다/ 아아아아아아아 항구의 아가씨/ 버리고 떠나가는 울리고 떠나가는 아메리칸 마도로스♫♪
막을 내리기 전에 한 마디만 더. 취입 전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낫다. 참깨 방송 김종환 대표의 이야기마따나 한 번만 더 취입을 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대신 ‘저무는 국제 시장’과 ‘고향의 그림자’, ‘부산 마도로스’ 등 겨우겨우 찾아낸 곡으로 대체하고 싶다. 뺄 거 세 곡은 고심을 거쳐야 하리라.
아들은 제 어미아비의 결혼기념일 며칠 전 이승을 떠났다. 기가 막힌다. 종교가 아니면 우리도 죽었을 거다. 내 목이 어떻게 성하겠는가? 늘 잠겨 있다. 그러나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엘레지 한 곡을 만들고 싶다. ‘해운대 엘레지’와 같은 정말 엘레지다운 가사를 내가 붙이고. 첫사랑을 얼마 전까지도 못 잊어 ‘구포역 엘레지’를 그리고 있었는데, 이제 해운대 언저리를 파고들어야 할 땐가?
아내와 난 한 학교에 3년 동안 근무하다 면사포를 억지로 씌우고 다시 3년을 견뎌냈었다. 결혼 당시 돈이 없어 해운대에서 하룻밤만 자고 다시 학교로 올라갔다. 첫딸을 낳고, 둘째를 벴을 때 워낙 입덧이 심해 소파 수술을 하러 밀영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아내가 멀미를 너무 심하게 했다. 아내가 위속에 든 것을 남학생 새 옷에 토하는 바람에 팔자에 있는 아이라 생각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강물로 입을 씻고 돌아와 억지로 참아내 낳은 아이가 그렇게 무심히 갔다. ‘부산’의 이름이, ‘해운대’의 한 모퉁이가 들어가는 엘레지를 만들어야 하는 당위성도 거기에 있다. 혹자는 그 알량한 콘서트는 어쩌겠느냐 하리라. 그의 노파심에도 이해는 가지만, 이 낯선 거리 전체가 내 무대다. 하염없이 걸으며 나는 ‘부산 노래’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