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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天國과 지옥地獄
‘천국과 지옥’의 기억
고등학교 시절 조계사 불교학생회에 나갔을 때 이야기다. 갑자기 법문 요청을 받은 무진장(혜명)스님이 설법을 하러 자리에 앉으시더니,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으라고 하셨다. 학생들은 가만히 있었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필자는 답답한 마음에 “모르는 것을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쓰윽 보시더니 냉소적으로 한마디 하셨다. “뭘 모르는지도 몰라?”
그리고는 또 긴장의 시간이 흐르고 “뭘 아시는데요?” 라고 말하는데, 동시에 보다 못한 선배가 벌떡 일어나더니 “저희는 학생이니 (중략) ‘천국과 지옥’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스님은 지긋이 필자를 노려보시다가 좌중을 둘러보며, 차분하게 “학생들이 그런 허망한 것에 관심을 가져서 되겠느냐!”라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 주셨다. 다음은 그 대강의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한 일본 순사가 스님을 찾아온다. “스님이 도가 높다고 하던데,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는지 한 번 말해 보시오.” 짚신을 삼고 있던 스님은 못 들은 척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스님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순사는 “날 무시하시오?” 하며 시퍼런 칼을 뽑아 스님의 목에 대고는 금방 찌를 기세로 다그쳤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순간, 스님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순사는 “저 놈 잡아라!” 하면서 스님의 뒤를 쫓기 시작하였고, 산으로 도망치던 스님은 막다른 길에 다다라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고 잡히고 말았다.
그러자 순사는 칼을 높이 들고 “네 이놈! 오늘이 마지막인 줄 알아라!” 하면서 칼로 내리치려는 순간, 스님 왈, “이곳이 지옥이니라.” 이 말에 깜짝 놀란 순사는 칼을 내려놓으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사죄하고 절을 하니, 그때 스님 왈, “이곳이 바로 천국이니라.”
나중에 보니 이 이야기는 백은혜학(白隱慧鶴, 1685~1768) 선사의 일화1를 당시 상황에 맞게 바꾸어서 말씀하신 것이었다. 발상이 기발하시다.
어쨌든 처음 마음은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설법은 필자에게 강렬하게 남아, 이후에도 ‘천국과 지옥’이란 말이 나오면 언뜻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곤 하였다. 그리고 댓글에서 천당과 지옥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필자는 다시 그 기억을 떠올렸고, 지금 나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 묻게 되었다. 그 명제는 항상 내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국과 지옥’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이리 우리를 붙잡는가?
천국과 지옥은 생겨났다
이 글에 앞서 필자는「하늘은 우주의 역사이다」, 「우리는 별의 자손이다」 그리고 「생명의 탄생과 의식의 진화」라는 글들을 통해 우주의 기원과 지구의 탄생 그리고 생명의 탄생과 의식의 진화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왜 ‘천국과 지옥’을 물었는데 이렇게 장황하게 글들을 쓰게 되었느냐?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방법으로 접근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국과 지옥은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의식 속에 자리 잡았을 뿐이다. 즉, 천국과 지옥은 우주가 생기고, 지구가 생기고, 생명이 생기고, 인간이 생기고, 그리고 의식이 발달하면서 인류 역사 어느 한순간부터 우리 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또한 같은 과정을 통해 생겨났을 것이고, 이 또한 의식이 진화 발전하는 과정에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정리되었을 것이다.
비교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 (2006년)』2 라는 저서에서 대략 기원전 900년경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 대부분의 철학과 종교 등이 탄생하였다고 말한다. 이 시기 석가모니, 공자, 맹자, 노자, 소크라테스, 엘리야, 예레미야 등 종교적, 철학적 현자들이 등장하여 영원히 잊히지 않을 말씀들을 남겼고, 그들의 출현으로 유대교, 유교, 도교, 힌두교, 불교 등 종교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 또는 이 시기 전후, 종교의 탄생과 더불어 천국이니 지옥이니, 혹은 욕계니 색계니 무색계니 하는 기본 개념들이 생겨나고 이론적으로 정립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어떤 개념들은 이 보다 오래전부터 있어 왔겠지만 이론적으로 체계화된 시기는 이때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자의 서死者의 書』
그럼 다음 의문이 떠오른다. 그럼 어느 시기인가 우리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천국과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물론 의식 속에만 존재한다고 하면 실재實在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성립된다. 그러나 앞선 글에서 살펴보았듯 우리는 이 세상으로 끝나는 존재가 아닌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아무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죽음의 문제에는 영원히 자유롭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동물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다 know’라는 지성적인 행위이다. 동물도 자신의 죽음을 ‘느낄 sense’ 수는 있다. 그래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발버둥 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는 도살장에 가까이 왔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죽음을 감지할 뿐이지, 그전에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와 달리 인간은 전 생애 동안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최준식 지음, 『죽음, 또 하나의 세계』 p 29~30.)
결국 천국과 지옥의 문제는 사후세계死後世界에 대한 의문이고, 곧 죽음에 대한 인간의 궁극적인 물음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 죽음 이후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두 권의 고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집트 『사자의 서』와 『티베트 사자의 서』가 그것이다. 이집트 『사자의 서』는 고대 이집트 시대, 관 속의 미라와 함께 매장한 ‘사후세계에 대한 안내서’이고, 『티베트 사자의 서』는 8세기 티베트 불교승인 파드마삼바바가 죽음과 환생의 중간지대인 ‘바르도’를 여행하고 쓴 여행기이다. 모두 죽음의 과정과 사후세계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집트『사자의 서』
지금으로부터 4,000여 년 전 쓰인 이집트 『사자의 서 Book of the Dead』는 인간이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인류의 첫 번째 저작이다. 서양문명사에서 가장 오래된 이 문서는 죽은 자를 위한 사후세계에 대한 안내문이며, 최후의 심판을 다룬 가장 오래된 종교 서적이다.
『사자의 서』는 고대 이집트 시대 관 속의 미라와 함께 매장한 사후세계에 관한 안내서이다. 파피루스나 피혁에 교훈이나 주문呪文 등을 상형문자로 기록한 것이다. 고 왕국 시대, 왕은 내세에서도 최고신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피라미드의 현실玄室과 벽에, 주문과 부적을 새겼다. 이를 피라미드 텍스트라고 한다. 중 왕국 시대에는 귀족이나 부자의 관 속에 죽은 후의 행복에 관하여 기록한 ‘관구문(棺構文, 코핀 텍스트)’이 쓰였다. (백과사전)
당시는 특권층만이 글자를 배우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글자나 글 자체가 바로 힘을 상징하였고, 지금의 부적처럼 문서자체가 힘을 발휘한다고 믿었다. 글이나 주문에 의지하여 내세의 행복한 생활을 얻으려 하였던 것이다. 신 왕국 시대는 문학과 예술이 발전하면서, 『사자의 서』는 보다 세련된 형태의 장례문화로 정착하였다.
한편 사자의 서는 고대 이집트의 내세관을 아는 좋은 자료이기도 한데, 후에 나온 유대교와 기독교 성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구약성서나 코란의 내용들이 여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초기기독교 사제들이 이집트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자에 따라서는 신약성서와 더불어 기독교가 모두 이 사자의 서의 영향을 받아 성립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신앙은 고대 이집트 신인 이시스와 오시리스3 그리고 아들 호루스와의 관계와 신앙의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성모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이 이시스가 아들을 상징하는 파라오를 안고 있는 모습과 같다든지, 혹은 오시리스 신이 부활한다든지 하는 등 많은 점이 비슷하다. 그리고 사자의 서에서 내세로 가는 심판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하는 ‘부정 고백(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고백)’ 또한 몇 백 년 후 십계명에 그대로 등장한다.4
사자의 서는 일종의 주문으로 죽은 자가 영생을 얻는 데 그 목적이 있는데, 이 역시 기독교에도 그 일단이 전해진다. 이런 영향은 문명사적으로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인류의 의식 또한 계속 축적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진화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신화종교학자이며 비교신화학자인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1904~1987)은 신화적인 요소나 신앙적인 요소들이 사실 어느 시대 어디에서 기록 됐든 간에 모두 공통점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티베트 사자의 서』
티베트 불교 경전인『티베트 사자의 서』는 죽은 자가 저승에서 겪게 되는 여정을 그린 책이다. 이를 쓴 이는 지금도 티베트인들에게 제2의 붓다로 추앙받고 있는 파드마삼바바이다.
이 책은 8세기 티베트 불교의 대성인大聖人 파드마삼바바가 죽음과 환생의 중간지대인 ‘바르도’를 여행하고 돌아와 죽음의 과정과 사후세계의 모습을 상세히 기록한 경전이다. 티베트인들은 사람이 죽은 후 49일간 시험을 거쳐 해탈과 윤회의 갈림길에 선다고 믿는다.
이 기간에 망자의 영혼이 떠도는 공간을 ‘바르도’ 또는 ‘중음’이라고 하며, 그곳에서 눈부신 빛이나 무서운 형상을 한 붓다와 여러 신들을 만나게 된다. 그때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임을 깨달으면 해탈을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다시 윤회의 업 속으로 빠져든다고 한다.
망자의 영이 중음을 헤맬 때, 가족이나 친구가 『티베트 사자의 서』를 읽어주면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출판사 서평에서)
인간이 죽으면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새로 태어나기 전 머무는 일종의 중간계를 티베트어로 ‘바르도’라고 한다. 죽은 자는 처음에는 자신과 친숙한 곳, 집 주변, 사무실 등에 머무는데, 이때 가족들은 “여기는 걱정하지 말고 가서 네 할 일을 하라!”라고 말해 준다.
그럼 이때부터 죽은 자는 세 개의 바르도를 경험하게 된다. 죽음의 순간에는 ‘치카이 바르도’를, 그다음으로 평화의 신들과 분노의 신들이 있는 ‘초에니 바르도’에 들어가게 되는데, 죽기 전에 바르도에 대해 배워서 알고 있으면 죽은 후에 그 세계를 알아보고 두려워하지 않고 바르게 대처하게 된다.
그리고 끝으로 염마(염라대왕)를 만나 심판을 받는데 이때 승려의 낭송 소리를 들으면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 들어가는 곳이 환생의 순간으로 가는 ‘시드파 바르도’이다. 이때 명상을 통해서 얼마나 집중하느냐에 따라 좋은 부모를 선택하게 된다.
새로운 삶은 지은 업에 따라 결정되는데, 선행을 많이 쌓으면 신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자의 서는 신보다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가르친다. 고통을 겪어 보아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나야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면 그들을 돕는 선행을 베풀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모든 비밀을 파헤친 이 경전은 1350년 경 ‘카르마 링파’에 의해 다시 발견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는데, 20세기 들어 학자이면서 영적 구도자였던 월터 에반스 웬츠에 의해 서구에도 전해지게 된다. 그는 1919년 구도 여행 중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번역하여 출간한다.
이 책은 지혜를 갈망하는 이들을 위해 저술되었다. 이 책은 가장 높은 길로 나아가는 정수를 담고 있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밝히고 있다. (월터 에반스 웬츠 Walter Y. Evans-Wentz)
이 경전은 서구 기독교적 영혼 관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정신심리학자 카를 융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번역서는 1964년 하버드 대학 교수였던 티모시 리어리 Timothy Leary에 의해 다시 재해석되어, 환각체험을 위한 안내서 『환각경험』이란 책으로 재탄생되기도 한다.5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문제이다
이들 사자의 서의 핵심 내용은 항상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죽음을 직시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죽은 자가 더 나은 세계로 가는 방법과 그 기술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집트 사자의 서에는 사후세계로 가는 도중에 만나는 과정 중에서 살아남는 주문들이 나오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두려움에 떨지 말고 그 안내서가 시키는 대로 하면 난관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즉, 악마를 만났을 때는 “돌아가! 부정한 생물들아!” 라든지 “돌아가라! 네 진정한 모습으로 돌아가라!”라고 하는 등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지하세계에서 혼돈과 만날 때, 정신적인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도 정신을 잃지 말고 대처하라는 극히 현실적인 충고를 담고 있다.
이들 사자의 서는 죽음을 갈망하기 때문도 아니고 현세의 삶을 사랑해서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삶이 계속되길 바랐을 뿐이다. 결국 사자의 서는 삶의 안내서다. 그리고 사자의 서는 가장 축복받는 땅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곳임을
암시한다.6
사자의 서는 삶이 계속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어떻게 해야 다음 삶에 도움이 되는지를 가르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도달했을 지금 이 세상도 그 과정의 결과이므로 결국 가장 축복받는 땅은 바로 우리가 사는 이곳임을 암시한다. 죽음의 과정을 보여주고 현세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동시에, 최종적으로는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을 사는 너무나 보편적인 지혜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사자의 서
과학자, 철학자, 심리학자 그리고 신비가였던 스웨덴의 에마뉴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는 말년에 체외이탈을 통하여 영계를 다니는 체험을 하고, 이 체험을 바탕으로 『천국과 지옥 Heaven and Hell』이란 책을 남긴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는 하프를 치면서 할렐루야 노래를 부르는 날개 달린 천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죽었다면 - 이것은 기독교에 영향받은 보통의 서양인들이 주로 갖는 천국관일 것이다 - 새 영혼 주위에는 실제로 이런 광경이 펼쳐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모습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이 이것은 천국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고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 자연스럽게 이 광경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중략)
스베덴보리가 우리에게 알려주려 하는 것은, 죽은 뒤 우리가 지옥으로 떨어지지도 않고 천국에 올라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지금 여기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기질과 비슷한 다른 영혼들과 어울리게 되고 그 기질을 잘 발휘할 수 있는 환경에 끌리게 된다.
(중략)
이와 같이 영혼들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 다른 신적인 존재에게서 심판을 받고 그에 따른 과보를 받는 게 아니라 자신이 이루어낸 진보의 정도에 따라, 혹은 업보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에 맞는 영적인 환경이 생겨나는 것이다. (최준식 지음, 『죽음, 또 하나의 세계』p229~232.)
앞서 사자의 서와는 다른 느낌인데, 사후세계는 환상이고 생각만 바꾸면 그 세계 또한 바로 바뀔 수 있다는 논리이다. 간단히 말해 지옥에 갔을 때 여기는 천국이야 하고 의식의 전환을 하면 바로 천국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지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다.
하나의 예로 소개하였는데, 현대로 들어오면서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서양에서 오히려 죽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고 이론 또한 현란하다. 다른 많은 사례에 대해서는 최준식 교수의 위의 책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기원전에 성립된 이집트『사자의 서』와 8세기에 나온 『티베트 사자의 서』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은 출현한 시간의 차이만큼 죽음에 대한 인간의 인식 변화를 시대별로 보여준다.7 뒤에 쓰인 『티베트 사자의 서』가 이집트『사자의 서』보다 더 구체적이고 무엇보다 체험 수기라는 면에서 보다 과학적이라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현대에 밝혀진 임사체험과 내용적으로 비슷한 점들도 발견된다.
그러나 이 체험은 단지 한 사람의 체험이다. 그리고 영적인 스승들의 체험으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를 수도 있겠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경우 유체이탈을 통한 특이한 체험을 기술하였다. 보편적인 체험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넓게 보면 한 사람의 체험기라기보다는 당시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과 세계관이 녹아들어 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현대판 사자의 서, 『임사체험』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사후세계란 알 수 없는 곳이지만, 죽음의 문턱에 넘어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나마 그 너머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현대는 이 죽음의 체험들을 수집하여 분석하는 방법으로 사후세계로 접근한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1991년 방영된 일본 NHK 특집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는 그 다큐를 위해 1990년부터 일본은 물론 미국, 캐나다, 이탈리아, 인도 등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임사체험자들과 국내외의 연구자들을 만난다. 이 내용은 1991년에 NHK에서 다큐멘터리로 방영되었고, TV 프로그램에 포함시키지 못한 내용들을 합하여 『임사체험』이란 책으로 나온다.
1982년,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갤럽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일반 성인 1,500명 가운데 죽음에 처한 적이 있다고 대답한 약 14%의 사람들 가운데, ‘비현실적인 죽음의 체험’을 했다는 사람이 35%(전체에서는 5%)였다고 한다.
이 수치를 미국 성인 인구에 대비시켜 추정해 보면, 죽음에 처한 경험자가 2,300만 명이고, 그 가운데 비현실적 체험을 한 사람은 800만 명이나 된다. 결국 비현실적 체험, 이른바 임사체험은 우리들의 생각과는 달리 실제로는 정상적이고 흔한 체험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저자는 이러한 임사체험에 대해 이제껏 과학적인 접근이 소홀했으며, 미국 등에서도 1970년대에 들어서야 과학적인 탐구가 시도되었다고 지적한다.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임사체험』출판사 서평에서)
어렸을 때 저승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다 다리가 무너져 깨보니 관 속이라느니, 저승사자에게 끌려 저승에 갔다가 착오로 밝혀져 다시 돌아왔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누구나 한 번쯤 들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통계에 따르면 신비하게만 여겨졌던 그 이야기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자주 일어나는 일반적인 체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일어나는 체험인데 자신만의 체험으로 넘기거나 그냥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무시해 왔다는 것이다.
책의 전반부에서 다양한 임사체험자의 인터뷰를 그대로 옮기면서, 임사체험은 왜 일어나는가? 임사체험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패턴은 어떠한가? 임사체험은 육체적 위기 상황에서 인간의 뇌 속에서 일어난 환각의 이미지인가(뇌내 현상설), 아니면 실제로 사후세계를 잠시 엿본 사실적인 체험(현실 체험설)인가? 등의 문제에 관해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지의 거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이 책에서 지금껏 초자연적인 심령현상, 신비체험의 영역으로만 치부되었던 임사체험과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넘어, 그 속에 숨은 ‘뇌’와 의식의 메커니즘, 그리고 현대 과학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날카롭고 거침없이 분석하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임사체험』출판사 서평에서)
저자는 사후생을 믿지 않는 입장에서 모든 사례들과 연구들을 과학적으로 하나하나 철저하게 파헤치고 있는데, 임사체험이 실제로 사후세계의 존재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근사체험만으로는 사후세계의 존재유무에 대한 증명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임사체험이 사후세계의 증거인가? 아니면 단지 뇌에서 일어나는 환각인가?
사후세계가 없다는 <뇌내 현상설>은 임사체험 중 나타나는 모든 체험을 단지 뇌의 작용으로 본다. 임사체험 이미지는 단지 뇌의 측두엽에서 일어나는 환각 작용의 일종으로, 꿈을 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뇌 속의 어떤 화학 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환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뇌가 멈추었다 회복되는 과장에서 나타나는 유전자에 프로그램되어 있는 일련의 이벤트라는 주장이다.
그 이유로 인도인의 경우 대부분 저승사자를 경험하는데 미국인은 아무도 저승사자를 경험하지 못하는 등 사후체험이 그 사람의 현실경험이나 종교 문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그 증거로 내세운다. 만일 사후세계가 실재한다면 사람마다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사후세계가 있다는 <현실 체험설>을 주장하는 쪽은 단지 뇌의 환각으로 넘기기에는 무리가 있는 다양한 증거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죽은 다음 그 사람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옆에 있었던 것처럼 자세히 말하거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직접 본 것처럼 말하기도 하고, 또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현 세상을 임사체험 후 정확하게 묘사하는 등등이다.
저자는 그 대립적인 견해를 각각의 입장에서 자세히 소개하고 꼼꼼하게 분석해 들어가기는 하지만, 끝내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다. 이 책이 임사체험과 관련된 모든 것이 수록된 독보적인 저작이긴 하지만, 아직 현대과학으로 설명이 안 되는 몇몇 사례들 때문에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유보하는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증명된 명쾌한 결론을 제시하지는 못하였지만 이 책이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저자는 임사체험 증언들을 취재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부분의 임사체험자들이 한결같이 ‘그것은 대단한 체험이었고, 그 이후 인생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체험 이후 인생관과 종교관 자체가 변화하고, 삶에 대해 대단히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임사체험을 취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어느 쪽이 옳은지 빨리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죽음에 대해 상당한 공포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하나 취재해 나가면서 체험자들 거의 대부분이 이구동성으로 죽는 게 두렵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사이에 나도 죽는 게 두렵지 않게 되었다.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임사체험』출판사 서평에서)
이슬람 신비주의 시인 루미의 시처럼 ‘죽음이 나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체험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사후세계와 죽음에 대한 관념이 결국은 삶에 대한 문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로 연결된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2002년 우리나라에 소개된 『우주로부터의 귀환』이란 그의 또 다른 책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우주인들, 즉 지구 밖에 나가 지구를 본 사람들을 인터뷰해 보면, 그들의 체험이 지구를 떠나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인간과 지구와의 총체적인 관계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이 푸른 지구에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며 이 좁은 땅에 살면서 가졌던 편협한 이기심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던가를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에서의 정치, 종교, 사상의 대립 항쟁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인식이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이기심을 버리고,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충실하게 살뿐 아니라, 직업을 바꿔 종교인이 살거나 나누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사후의 세계를 보고 나면 기존의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생을 즐기면서 자진해서 나누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사자의 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의 이해
근사체험의 내용이 문화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뇌내 현상설>의 주장을 보면,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에는 빛이나 신의 존재가 자주 나타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그러한 체험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아름다운 꽃밭 체험이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한다. 죽음을 경계하는 것도 한국이나 일본인의 경우에는 강江인데, 미국의 경우에는 벽이나 문, 터널 등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천사가 나타나기도 하고, 부처가 나타나기도 하며, 염라대왕이 나타나는 등 관습이나 종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사자의 서의 동서양의 차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데, 죽음 이후의 세계를 지구처럼 하나의 일정한 세계로 보는 오류 때문이 아닌가 한다. 왜 죽음 이후의 세계가 문화에 따라 다른가? 이를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부분과 문화적으로 다르게 구현되는 부분의 이중구조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어차피 그 세계는 산 자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실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과학자들은 의식 속에 존재하는 영적인 세계를 뇌에 한정해서 과학의 잣대로만 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의식의 발달과 더불어 영적인 세계가 생겼다면, 생겨나는 세계 또한 다양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종류의 지옥과 수많은 종류의 천국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식의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완전한 과학적인 해석은 아직은 불가능하다.
당신이 ‘의식(Consciousness)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당신은 과학에서 벗어난 셈이 됩니다.
(디펙 초프라 지음, 정경란 옮김 『죽음 이후의 삶』 p. 40.)
그럼 죽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는 먼저 갈 곳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이와 같이 죽음에 대해 알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 이유는 현재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일은 죽음을 직면하기 싫어서 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죽음이라는 명제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 빠져든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아무리 큰 회사를 운영한 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고 한들 모두 아이들이 구슬치고 인형이나 우표를 모으는 따위의 일과 본질적으로 같다.
(중략)
다른 점이 있다면 규모의 문제인데 성인일 때에 하는 일들이 규모가 큰 것은 성인들이 느끼는 죽음의 공포가 더 강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증거가 될지 모르겠다.
(중략)
우리의 생각 밑바탕에는 내가 죽으면 인생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는 본질적인 허무가 항상 자리 잡고 있다. (최준식 지음, 『죽음, 또 하나의 세계』 p 56~57.)
이 본질적인 허무를 피하기 위해 바깥으로만 관심을 쏟게 된다고 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 시도는 구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회피하지 말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1930년대 나온 이상의 시집 『오감도』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한다.
모든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은 기교를 낳고, 그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
앞에서 다치바나 다카시는 ‘임사체험자들 거의 대부분이 이구동성으로 죽는 게 두렵지 않게’ 되었다고 하면서 저자는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죽는 게 두렵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또 하나 임사체험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임사체험을 한 후 삶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더욱더 잘 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멋진 사후세계를 체험한 사람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모두 더욱 잘 살고 싶다고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왜 그런가. 체험자의 말을 들어보면 ‘어쨌든 죽을 때는 죽는다. 사는 것은 사는 동안에만 가능하다. 살아 있는 동안은 살아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임사체험』p 410.)
임사체험을 하고 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 죽음에 대한 관심이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되어 오히려 삶에 몰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책을 끝낸다. ‘살아 있는 동안은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앞서 보았던 사자의 서와 같은 결론이다.
또 하나의 사자의 서, 불교
싯다르타는 출가를 막는 아버지에게 말한다. “나에게 생로병사가 없게 해 줄 수 있는가?”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인간 육신의 무상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싯다르타의 출가는 생로병사의 해결에 있었다.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더러움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열반)을 얻기 위해서이다.
(<증아함> 권 56, 라마경)
이 세상에 만약 늙고, 병들고, 죽는 이 세 가지가 없었다면 여래(如來, 붓다)는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잡아함> 권 14, 346경)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 싯다르타는 인간적 고뇌에 빠진다. 그러나 생로병사라고는 하지만 왜 늙고 병들고 죽는가라는 ‘죽는가’에 초점이 있다. 결국은 죽음의 문제에 그 시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싯다르타는 죽음에 대해 고뇌했고 그 의문을 풀려고 출가하신 것이다.
싯다르타가 그 어려운 수행을 하며 얼마만큼 죽음에 문제에 접근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일상적인 지각이나 감각으로 알 수 없는 주제에 대해서는 침묵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제각기 해답을 제시했다. 부처님 당시 사람들은 물론 동서양의 종교가들 또한 다양하게 그 해답을 제시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의 대답은 과학적 지식과는 전혀 별개의 독단적인 대답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런 미묘한 문제에 대해 신중하고 합리적으로 접근한 부처님의 태도는 특히 돋보인다. 부처님은 언제나 자신의 가르침이 인간의 사유로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임을 제자들 스스로 확인하도록 가르쳤다. 인간의 사유를 뛰어넘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하고 조심하는 합리적인 자세를 취했다.
신중한 철학적 자세와 합리적인 사유태도를 보여주는 부처님의 무기설無記說8은 250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신선하게 느껴지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이태승, 「불교란 무엇인가 - 무기설」, 불교신문 2116호.)
현실에 대해서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사자의 서의 결론처럼 죽음의 문제에서 시작하였지만 삶의 문제로 귀결歸結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문만 나서면 곳곳에서 도를 외치고 자신의 종교를 찬양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지만, 현대와 마찬가지로 부처님 시대에도 수많은 다양한 사상과 종교 그리고 수행법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그런 수행들을 경험하고 나서도 의문이 해결되지 않자 자리에 앉아 사색에 들어간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정각의 내용은 다양하게 설명되지만, 근본적인 내용은 연기緣起의 도리이다. 깨달음으로 인해 삼명육통三明六通이 생겨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은 연기다.
연기는 모든 것이 서로 조건 지워져 생겨난다는 것으로, 우리의 삶은 모두가 인과 연의 관계로 서로 연결돼 있다는 도리다. 인간의 한계적 삶을 제공하는 죽음에 대한 의식도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과 애착을 원인으로 생겨난다고 연기는 가르친다.
연기의 이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12 연기설에 의하면 인간의 고통은 근본적으로 삶의 이치 즉 연기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된다.
연기법이야말로 부처님이 인류에게 던지는 지혜와 자비의 메시지인 셈이다. (이태승, 「불교란 무엇인가 - 연기」, 불교신문 2106호.)
그는 사색을 통하여 모든 의문을 해결하였고 편안해졌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에게 실천과 믿음의 대상이 되었고 불교라는 종교로 체계화되었다. 그리고 불교는 중국에 들어와 독특한 종교적인 기능으로 기존의 중국사상과 융합하면서 중국에도 뿌리를 내린다.
천태종, 삼론종, 법상종, 선종 등 다양하게 변화하였으며, 내세來世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없었던 중국에 기존의 불교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믿음에 의거한 종교적 정토신앙도 심어 놓았다. 애초에 죽음의 문제로부터 시작된 불교는 수많은 변용과 방편을 만들어 내며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다른 말로 하면 불교도 현재진행형인 사자의 서인 것이다.
남북조 시대 중국에 온 보리달마菩提達磨를 시작으로 홍인弘忍, 혜능慧能 등에 의해 성립된 중국 선종은 이후 불교를 대표하는 종파가 된다. 그런데 죽음보다는 현실의 삶에 훨씬 더 무게를 두고 있는 선종도 죽음의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향엄상수香嚴上樹나 도솔삼관兜率三關 (『무문관無門關』) 등 죽음에 관련한 화두 속에 죽음의 문제가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간화선 수행을 통해 선의 황금시대 선사들의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해결에 있어서 조사들은 부처님보다 낫다는 자신감을 표출한다. 1,000여 년 전에 이미 조사선을 여래선보다 우의에 두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보다 그리고 선의 황금시대보다 훨씬 더 풍부한 그리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많은 지식들을 지니고 있다.
양자역학이나 현대물리학에서 새롭게 발견한 이론들이 불교나 힌두교에서 주장했던 교리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이제 결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전에는 이런 천기天機에 대해 극소수의 성자들만 알았는데 이제는 과학이 발달한 덕분에 누구든 알 수 있는 공적인 진리가 되어 버렸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인류의 지혜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상승했다. (최준식 지음, 『죽음, 또 하나의 세계』 p 215.)
선과 죽음
죽음의 문제는 결국 죽은 다음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연장선상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죽음은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또 다른 모습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연장선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선 공부는 사람을 단순하게 만든다. 잡다한 생각을 쉬게 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필요한 생각만을 집중해서 그것도 필요한 만큼만 하게 한다. 생각이 많을수록 우리가 겪는 세상 또한 복잡해진다. 순일무잡純一無雜, 망상에 의한 삿된 생각을 쓸어버리고 항상 맑고, 적고, 담백한 마음을 유지하면 혼란도 없고 원하는 방향으로 망설임 없이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사후세계일지라도……. 이는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열심히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수행을 통한 의식의 고양高揚으로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수행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천국이 없으면 지옥도 없다.
천국이 있으면 당연히 지옥도 생겨난다.
참고한 책과 글
1. 어느 날 선사에게 한 무사가 찾아와서 물었다. “지옥과 극락은 정말 있는 것입니까?” 선사는 대답 대신 그에게 되물었다.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인가?” “저는 무사입니다.” 선사는 무사를 훑어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무사라고? 어느 주군主君이 자네를 데리고 있나? 내가 보기엔 꼭 거지대장 같은데 말이야.”
무사는 분노가 치밀었다. 무사로서 모욕을 당하는 것은 죽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무사는 벌떡 일어나 칼을 빼들고 선사의 목을 겨누었다. 선사의 목이 곧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찰나였다. 그러나 선사는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지, 당신은 칼을 갖고 있지. 그래, 그 칼이 내 목을 벨만큼 예리한지 어디 한번 시험해보게.”
칼을 빼들긴 했으나 선사의 초연함에 무사는 칼을 거두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다. “조금 전에 지옥의 문이 열렸었다.” 이 말에 무사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무사는 무언가 깨달음이 있어 칼을 던지고 선사 앞에 꿇어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이때 선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는 극락의 문이 열렸다.”
2. 축의 시대 700여 년의 역사를 돌아보는 여정은 현란할 정도로 역동적이지만 이를 꿰뚫는 저자의 시각, 그러니까 그의 종교관은 명료하게 일관돼 있다. 이 시대 현자들이 발견한 정신적 혁명이란 타인과의 공감, 동양식으로는 역지사지易地思之에서 우러나오는 자비라는 결론이다.
이 원리를 명료히 한 경구가 도덕의 황금률로 불리는 ‘네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마라’는 것이다. 공자의 ‘기소불욕己所不慾 물시어인勿施於人’이나, “당신에게 가증스러운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라. 그게 토라(모세오경)의 전부이다”라고 말한 유대 랍비 힐렐처럼 고대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최고의 도덕률로 받아들여졌다. 무아無我를 통해 나와 네가 다르지 않음을 역설하는 불교는 말할 것도 없고,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이 공감과 자비의 정신을 체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고난의 인정과 자기 비움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자신의 고통을 인정할 때에만 타인의 고통을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으며, 그 지점에서 변화를 이끌 행동을 시작한다.” 축의 시대 역시 전쟁과 폭력, 증오가 난무한 고난의 시대였으며 현자들은 그때 인간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 그 안에서 폭력의 원인을 찾아내 극복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축의 시대』, 책 관련 신문 기사에서 옮김)
3. 이시스(아세트, 에세트 Aset/Eset)는 고대 이집트의 가장 중요한 여신 중의 하나이다. 이시스라는 이름은 ‘왕좌’를 뜻하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그리스어로 바꾼 것이다. 왕좌는 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그 화신은 여자, 즉 왕의 어머니였으며 사실상 왕의 창조주였다.
고대 이시스 숭배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며, 피라미드 원문(BC 2375경~2200경)에서도 이시스가 살해된 자기의 남편 오시리스 신을 애도했다는 언급을 제외하면 그에 관한 기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시스에 관한 전설은 이시스가 본래 독립된 신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시리스의 아내로서 이시스가 주역을 맡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시리스가 죽은 후이다.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시신屍身 조각을 발견하여 그것들을 재결합했으며, 그의 장례식에서 상주 역할을 했고, 자신의 권능으로 그를 소생시켰다. (백과사전)
4. 다큐멘터리「죽음의 가이드 북 이집트 사자의 서」와「티베트 사자의 서」, 히스토리 채널.
5. 이 책이 환각체험을 위한 안내서, Timothy Leary, Ralph Metzner and Richard Alpert 공저인 『환각경험, Psychedelic Experience, A Manual Based On The Tibetan Book Of The Dead』이다.
그는『티베트 사자의 서』의 죽은 자의 경험이 환각경험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책을 쓰게 되는데, 이로 인해 교수직에서 쫓겨나 영적인 지도자로 변신하게 된다.
이 책은 서구 사회에서 젊은이들에게 환각제를 통한 경험을 영적인 경험으로 바라보게 하였고, 음악이나 독립영화 등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6. 캐롤 폰태인, 앤도버 뉴튼 신학교 종교사, 「죽음의 가이드 북 이집트 사자의 서」, 히스토리 채널.
7. 죽음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시 저승에 간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아니 여기는 언제 이렇게 변했지?” 혹은 “여기는 왜 매번 바뀌는 거야! 헷갈리게! 내비를 사던지 원......”
8. 부처님이 무기로써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않은 대표적인 질문은 『중아함경』 ‘전유경箭喩經’에 보이는 우주와 인간에 대한 문제다. 일반적으로 14 무기로 표현되는 14가지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세계는 ①상주(常住)인가 ②무상(無常)인가 ③ 상주이며 또 무상인가 ④상주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가.
2) 세계는 ⑤한계가 있는가 ⑥한계가 없는가 ⑦한계가 있거나 또는 한계가 없는가 ⑧한계가 있지도 않고 한계가 없는 것도 아닌가.
3) 영혼은 신체와 ⑨같은가 ⑩다른가.
4) 여래는 사후(死後)에 ⑪존재하는가, ⑫존재하지 않는가 ⑬ 존재하며 또 존재하지 않는가, ⑭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이 14가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것을 14 무기라 하며, ③④와 ⑦⑧의 질문을 제외한 경우를 10 난무기難無記라 한다.
14 무기로 표현되는 질문은 우주와 인간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을 보여준다. 먼저 (1)은 이 자연 세계가 영원히 존재하는지 아닌지의 문제로써 시간적인 영속성의 여부를 묻고 있다. 그리고 (2)는 이 세계가 한계가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으로, 공간적인 끝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3)은 영혼과 신체가 같은지 다른지의 문제로서, 인간의 정신적 본질과 신체의 구체적 관계를 묻고 있다. (4)는 부처님의 사후 문제로서, 이것은 인간이 죽은 뒤 윤회(輪廻)를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 질문들은 모두 미묘하고 심오한 문제를 담고 있는 것으로 긍정과 부정의 단정적인 답변으로 그 의문을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들이다. (이태승, 위덕대 불교문화학부 교수, 불교신문 2116호)
첫댓글 예! 한번 잘 읽었읍니다! 고생 하셨읍니다!
득로 합장
장문의 글 잘 읽었습니다._()()()_
몇 년전 티벳 사자의 서를 읽고,
그 다음 티벳 해탈의 서를 사서 조금 읽다가 어려워 나두었는데
다시 꺼내어 읽어 보려고 꺼내 봅니다.
다시 한번 여러 장르를 요약하여 읽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감사 드립니다._()_
예~ 저도 오래 전에 읽어서 내용은 알 것 같아 쓴다고 했는데
막상 쓰려니 모든 책들을 다시 보기가 엄두가 안나 종합적인 책 몇 권과 서평 등을 연결해서 썼습니다.
전체적으로 크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우리가 하고 있는 수행의 중요성을 또 다시 실감합니다.
전원 합장
..()..
저도 몇 년 전에 티벳 사자의 서를 읽었는데..다시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
푸린터에 종이 떨어지기 망정이지, 19페지 짜리가 19부 인쇄될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