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듣는 협주곡
최 화 웅
세계 3대 바이올린협주곡을 베토벤, 맨델스존, 브람스로 꼽지만 나는 차이코프스키와 시벨리우스, 파가니니와 부르흐도 가리지 않고 두루 듣는다. 그 중에서도 맨델스존 바이올린협주곡과 친숙하다. 그 이유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맨처음 만난 클래식곡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유치원을 다니던 60여 년 전. 당시 세브란스 의대생이었던 큰형이 손으로 태엽을 감는 수동축음기로 맨델스존 바이올린협주곡을 들을 때면 온가족들이 그 주위에 둘러앉는다. 나는 맨델스존 바이올린협주곡을 다양한 연주자와 오케스트라가 협연한 레코드와 CD를 가지고 있다. 그 덕에 일찍이 프리츠 크라이슬러와 야사 하이페츠, 아이작 스턴과 소아마비의 장애를 극복한 이작 펄만은 물론 나탄 밀스타인과 정경화, 안네-소피 무티와 지네트 느뵈,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6살 때 맨델스존 바이올린협주곡을 연주했다는 신동 예후디 메뉴힌과 폴란드 출신의 헨릭 셰링, 루마니아가 낳은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온 보이쿠까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접할 수 있었다.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을 여러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곡을 두루 가지고 바흐의 무반주첼로 모음곡을 연주자별로 가졌듯 맨델스존의 협주곡도 여러 장을 가지고 있다. 음악은 연주자에 따라 그 맛이 다르고 듣는 이의 감정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요즘도 맨델스존 바이올린협주곡을 들을 때면 그리운 큰형의 얼굴이 떠오르고 옛 가족의 추억에 빠져든다. 넓은 방 한 편에서 수동축음기의 뚜껑을 열고 레코드를 올려놓은 뒤 바늘을 골라 끼우고 태엽을 감던 손길이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레코드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선율에 취해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에 잠겼던 큰형의 프로필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눈에 보이는 것, 들리는 소리로 가을은 무르익는다. 하늘이 높아가는 만큼 가을은 다양한 선율의 풀벌레 소리를 선사한다. 부드러운 햇살이 감미롭게 내려앉는 가을날, 스치는 바람결에 황금빛 나뭇잎은 하나 둘 소리 없이 떨어지고 들려오는 풀벌레소리가 여름보다 더욱 풍성하다. 잎 진 나뭇가지 사이로 간간이 기러기 떼 날고 밤이면 까만 화폭에 달과 별 그리고 바람과 구름이 낮은 목소리로 자연을 노래한다. 음악을 듣는데 굳이 계절을 가릴 건 없지만 협주곡을 듣기에는 깊어가는 가을밤이 안성맞춤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숨 가쁘게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듯 연주하는 피아노협주곡에 비해 바이올린협주곡은 아리따운 시골처녀가 가슴 넓은 사내의 프로포즈에 젖어드는 듯 로멘틱한 정경을 연출한다. 흔히 베토벤의 바이올린협주곡이 남성적인데 비해 맨델스존의 바이올린협주곡을 여성적이라고 한다. 그만큼 맨델스존의 바이올린협주곡은 도입부에서 현악기의 화음을 타고 나오는 바이올린의 독주가 계절의 감성을 충분히 불러일으키고 청순한 시골처녀의 수줍음과 순수함, 그리고 아름다운 시정이 가슴 가득 파고든다. 그럴 때면 어린 날 깨어지고 낡은 기억의 조각들을 모자이크한다. 협주곡은 독주악기의 빼어난 기교와 다양한 표현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깐다. 협주곡은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가 숨을 몰아쉬듯 조화를 이뤄나간다. 맨델스존 협주곡에서는 시작과 동시에 현악기의 화음을 타고 나오는 바이올린의 독주가 아름다운 주제를 연주하면서 곡 전체를 이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여섯 살 때의 일이다. 명동성당 안에 자리 잡은 유치원을 다니던 때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기억이 잘리고 낡은 필름처럼 훼손이 많이 되었지만 부분 부분의 쇼트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유치원에 다니던 6살 때와 1.4후퇴 때 보름 넘게 피난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오던 그 춥고 무섭던 전쟁의 기억을 회상할 때마다 많은 장면이 디졸브된다. 유치원에 다닐 때는 아침이면 남산 기슭의 병원으로 나가시던 아버지와 등교 길의 큰형이 나를 데려다 주곤 했었다. 성당의 넓은 마당에 들어서면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고 그 앞에 작은 연못이었다.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성호경을 바치고 교실로 들어가야 하는데 하지 않으려고 떼를 썼던 개구쟁이시절의 기억도 아련하다. 어둠이 깃드는 초저녁이면 큰형을 따라 남산으로 산보를 나가곤 했었다. 그 때 나는 달을 스치는 구름을 보면서 형에게 “왜 달이 저렇게 빨리 가느냐?”고 물었고 그럴 때마다 형은 애써 달과 구름과 바람의 관계를 설명해주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 선하다. 형은 그토록 자상하게 막내를 챙겼다. 그토록 그리운 형은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고 나만이 가을이면 맨델스존의 바이올린협주곡을 홀로 듣는다. 음악은 내게 끊임없는 플래시백을 통해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가며 삶을 되새기게 한다. 결코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선율 속에서 나는 어린 날의 기억에 녹아드는 것이다.
치과의사였던 어머니는 딸 하나에 아들 넷을 낳으셨다. 큰 아들의 이름이 원(元), 둘째 웅(雄), 셋째 철(哲), 그리고 막내인 내 이름을 훈(勳)으로 지었다. 의과대학을 나온 큰형과 경기중학을 다니던 둘째형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고 띠 동갑인 누나와 4살 위의 형과 나 그렇게 셋이 남았다. 형이 고등학교 다닐 때 콩쿨에 나가기 위해 레슨을 받으면서 열심히 연습하던 플로토우의 오페라 <꿈결과 같이>의 ‘마파리’를 듣던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형은 가곡 보리밭을 감성적으로 노래하는 감미로운 벨칸토 창법을 가진 테너였다. 형의 18번은 플로토의 오페라 ‘Martha(마르타)' 3막에 나오는 아리아 ‘M'appari tutt'amor(꿈과 같이)다. “꿈같이 사라진 아름다운 임이여! 이 마음의 괴로움 남기고 간 그대여! 당신은 해같이 빛나고 어여쁘며 속삭이는 사랑은 항상 즐거웠도다. 그대와 나 함께 하면 이맘의 괴로움을 이날에 즐거이 잊겠네. 그대 위해 그대 위해”라는 서정적인 가사를 이탈리아어로 노래하곤 했었다.
가진 것 없는 내게 음악은 크나큰 축복이었다. 가을은 부드러운 빛이 더욱 깊은 사색의 늪으로 이끈다. 눈을 감으면 아름다운 선율이 부드러운 가을햇살처럼 온몸을 감싸고돈다. 흩어지는 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지기 전 마지막 햇살을 품은 가을에 듣는 맨델스존의 바이올린협주곡은 포근하면서도 애잔하다. 젊은 날 일에 쫓겨 계절을 깊이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나에게 가을은 조락의 의미를 함께 보고 듣고 느끼며 즐기자고 꼬드긴다. 보도(步道)에는 큼직한 프라타나스 낙엽이 두 발로 게걸음을 치는 이 좋은 계절, 가을은 침묵 속에 놓인 풍요와 결핍이 삶의 도가니를 끓어 넘치게 한다. 어느새 밤이면 가을바람을 타고 오는 맨델스존의 선율이 더 맑고 투명한 가을을 펼쳐놓는다.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려는 가을의 협주곡에 나를 맡긴다. 그리고는 상상과 비약의 일탈을 꿈꾸는 것이다. 그것 또한 너그러운 사랑의 감정, 뜨거운 삶의 열정으로 넘쳐흐르게 하리라.
첫댓글 어린시절 단란하고 품격 높았던 집안의 여유가 느껴집니다. 거기에 클래식 음악이 빠질 수 없겠죠! 그러한 성장과정을 거쳤기에 비오님의 클래식에 대한 애정과 깊이가 남다른가 합니다. 저 도 뒤늦게나마 협주곡을 좋아하게 됐는데, 바이올린 협주곡의 경우는 브람스와 브루흐의 것이 좋더군요. 마르타 중에서 '꿈과 같이"는 저 또한 애창하는 아리압니다. 고맙습니다.
음악과 가을은 정말 멋지게 조화가 되는 것 같습니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의 멜로디는 전에 들은 적이 좀 있습니다만 카페에 음악을 올리면서 비로소 정확한 곡명을 알았습니다. 애잔한 선율이 아름다워 자주 듣고 있는 곡입니다. 해박한 음악지식을 잘 배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