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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고학의 역사
Thomsen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Christian Jürgensen Thomsen, 1788년 ~ 1865년)은 덴마크의 고고학자이다. 코펜하겐의 북방 고물 박물관장을 지냈다. 박물관에 수집된 옛날의 유물을 정리하기 위하여 유명한 3시기법을 고안하였다. 이 법은 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로 구분한 것으로 고고학 연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3시대법의 시작
17·18세기 유물 수집가들의 업적은 대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그 결과로 유럽의 주요 도시에 있는 박물관들은 수집물이 풍부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풍부하게 수집된 유물들을 어떻게 배열하는가에 있었다. 이때에는 3시대법이 확립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결과를 3시대법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석기·청동기·철기의 3시대법은 오래 전부터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고고학은 이러한 3시대법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발굴이 필요하게 되었다. 즉 야외기념물들은 스스로 말할 수도 없었으며 고전작가들과 성서도 그러한 것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덴마크의 니에럽(Rasmus Nyerup; 1759-1820)은 {고문화의 입장에서 본 유물 개관}(1806)을 출판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고대 유물을 수집하여 코펜하겐 대학교에 작은 박물관을 설립하였다. 니에럽의 책이 출판된지 1년이 지난후 덴마크 정부는 국내 유물의 보존과 수집을 위한 왕립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이 위원회의 목적은 덴마크의 고대 및 역사적 기념물의 보존에 힘쓰면서 덴마크 국립 고대유물 박물관을 구성하는 것이고, 또한 일반 대중들에게 고대 유물의 중요성과 가치를 인식시켜 주는 일이었다.
실제 니에럽 이전의 덴마크 역사학자 섬(P.F.Suhm)은 {덴마크, 노르웨이와 홀스타인의 역사}(1776)에서 이 지역의 무기들은 돌이 맨 처음이고 그 다음은 동, 그리고 그 다음은 철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한 역사학자의 사색에 불과한 것이고 이러한 것들은 고고학적인 증명이 필요하였는데 이것을 증명한 사람이 톰센과 윌사애였다.
톰센(C.J.Thomsen; 1788-1865)은 니에럽을 계승하여 위원회의 간사가 되었으며 동시에 국립초대 박물관장에 임명되었다. 톰센은 무기와 도구들을 만드는데 사용한 재료를 가지고 박물관 소장품들을 석기, 청동기, 철기의 3시대법으로 분류·정리하였다. 그리고 이 분류가 연대순으로 계속되는 3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즉 문헌자료에 의존하지 않고도 통제된 편년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1819년에 덴마크 국립박물관은 일반에 공개되어 일반인들도 박물관이 3시대 분류법에 기초하여 편제되어 있음을 알았다. 즉 덴마크 박물관은 최초로 편제된 박물관이었다. 1836년에 {북구 고대 유물들에 대한 안내서}(1848년에 영어로 출간)가 출간되었다. 이 3시대법은 고대 유물·유적연구에 처음으로 방법론을 제시하고 학문적으로 체계를 잡는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톰센은 한 젊은 법학도에게서 도움을 받고 있었다. 이 법학도는 유틀란드의 자기 집에서 한동안 고대 유물들을 수집하였고 분묘도 발굴하였다. 그가 바로 윌사애(J.J.A.Worsaae; 1821-85)였다. 그는 톰센을 계승하여 국립박물관장이 되었으며 코펜하겐 대학교의 고고학 교수가 되었으며 최초의 전문가적 고고학자로 칭송받고 있다. 윌사애는 3시대법을 야외에서 확립하였다. 그의 경험적 증명은 스위스 호상가옥의 발굴에 의했던 것이었다. 즉 야외조사에서 그는 층위발굴을 통해 출토 맥락이 확실한 많은 유물들을 제공함으로써 톰센의 편년을 입증하였다. 층위발굴은 순서배열법보다 시간에 따른 문화변화를 더욱 잘 논증해 주었다. 그래서 3시대법은 주변으로 확산되어 갔으며 3시대법은 "선사시대의 기초", "근대 고고학의 초석"으로 불리우고 있다. 러복(John Lubbock; 1834-1913)은 석기시대를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로 분류하여 3시대법이 4시대법으로 확장되었다.
이와같이 선사고고학은 스칸디나비아, 스코틀랜드, 스위스에서 1859년 이전에 윤곽이 뚜렷한 학문으로서 발전하고 있었다. 이런 새로운 학문의 기반은 순서배열법이나 층위학을 사용하여 고고자료만으로 상대편년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톰센은 박물관에 있는 양이 많고 대표적인 수집품을 사용하여 순서배열법을 구축하였으며, 한편 윌사애는 층위학을 써서 톰센의 틀을 확증해 주었다. 따라서 처음으로 상대편년을 통해 모든 선사시대 자료를 배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3시대법의 확산
이러한 3시대법은 점차 세분화되고 재분류되었다. 구석기시대의 경우를 보면 라르떼(E.Lartet; 1801-71)는 전기를 해마의 시기, 중기를 동굴곰과 맘모스의 시기, 후기를 순록의 시기로 나누었다. 이러한 분류법의 기준은 동물의 화석이라는 비고고학적 자료를 기초로 하여 고고학적 유물을 분류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 때문에 점차 물질적 재료, 즉 유물에 따라 분류하는 방법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모르띠에(Gabriel de Mortillet; 1821-98)는 고고학적 용어로 라르떼의 분류를 재해석하였다. 라르떼는 동물군으로 부터 과거의 분류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모르띠에는 고생물학의 규준보다 문화적 규준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편년결과가 정설적이 선사시대의 분류법이 되었다.
또한 구석기시대 말기나 신석기시대 초기의 연대를 가진 유물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덴마크 3시대법은 러복에 의해 4시대법으로 분류되었을 때 이미 그 분기점이 묘사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사이에 중석기시대가 제안되었다.
웨스트롭(Hodder Westropp)은 구석기시대, 중석기시대, 최근석기시대로 분류하여 중석기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웨스트롭의 최근석기시대는 그 자신도 잊어버렸고 중석기시대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중석기시대라는 용어는 19세기 말에 사용되기 시작하여 1930년대에 클라크(Grahame Clark)가 완전히 확립하였다. 결과적으로 3시대법은 세분화되어 5시대법으로 확대되게 되었다.
옥스포드 영영사전은 중석기시대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 브로운(J.Allen.Brown)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몇몇 프린트 석기를 보고 그것은 과도기에 나타나는 형태로 보고 중석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스웨덴의 고고학자인 몬테리우스(Oscar Montelius; 1843-1921)는 신석기를 4단계로 세분화하였다. 몬테리우스의 명명법은 라르떼와 크리스티처럼 하지 않고 특별한 지역에서 한 유형의 유적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숫자로 매겼다. 그는 선사시대 분류학의 창시자로 칭송받고 있는데 형식, 묘사와 장식에 따라 선사시대 예술품을 분류하고, 분류된 예술품 사이에 연관성을 추구했다. 즉 형식, 묘사와 장식에 따라 선사시대 예술품을 분류했던 것이다. 이러한 형태학의 개념, 형태학적 결과로서 유물을 배열하는 것은 윌사애가 처음으로 시작한 방법이었으나 몬테리우스가 이를 발전시키고 세련되게 만들었다.
몬테리우스는 북유럽의 청동기시대도 5시기로 구분하였다. 그래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있어 기술형식적인 분류안을 마련하였다. 결국 이것들은 정밀한 형식학적 고찰로써 진화론적 사고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법에 의해 연마된 형식학적 연구법은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와같은 형식학적 연구법은 그 시대의 풍조였던 진화론적 사고에 영향을 받아 고안된 방법이었다. 형식학적 방법은 유물을 형식별로 한 개의 계열로 배열하는 형식학적 배열과 이를 증명하는 단계가 있다. 형식학적 배열을 증명하는 방법은 형식학적 흔적기관의 검증(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흔적만 남아 장식화의 의미를 지닌 것)과 일괄유물(동시에 함께 매장된 유물)에 의한 검토이다. 또한 이러한 연구에 영향을 받아 19세기에 철기시대를 분류하고 세분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20세기에 들어와서 유럽 선사시대를 종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데슐레트이다. 데슐레트의 작업은 모르띠에-몬테리우스의 유럽 선사시대의 시기구분을 확장한 것이었다.
3시대법의 비판
그러나 점차적으로 고고학자들은 3시대법의 시대적인 세분은 분류의 목적이지 완전한 선사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즉 지질학적인 문제로 하나의 전체로서 유럽에 적용할 수 있는 분류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지질학적인 집합체의 기초 위에 연구되어져야만 한다고 제안하였다.
또한 3시대법은 처음부터 인간 과거에 맞지 않는 것이거나 적어도 박물관 분류에 알맞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즉 19세기에 인간 과거의 분류는 기술적이 아니라 경제에 기초한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코울리지(Coeridge)는 '야만상태에서 문명상태까지의 진보는 수렵에서 목축단계'라고 하였으며, 테일러는 인간 과거의 3단계를 미개상태, 야만상태, 문명상태로 구별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것들을 미국의 인류학자 모르간(Lewish Morgan)이 {고대사회}(1877)에서 정의하였다. 모르간은 3시대법의 기술적인 체계가 예술품을 분류하는 것과 같은 확실한 물질을 위해서는 유용한 것으로 인정하였으나 인간 경제가 더 나은 기초를 마련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테일러와 마찬가지로 인류문화가 미개상태, 야만상태, 문명상태로 간다고 보고 이를 좀더 세분하여 7가지 시대구분을 하였다.
John Lubbock
러벅 에이브베리 남작 1세(Sir John Lubbock, 1834년 4월 30일~1913년 5월 28일)는 제4대 에이브 베리 준남작이며, 초대 남작은 영국의 은행가이자, 정치가, 생물학자, 고고학자였다. 그는 준남작 존 윌리엄 러복의 아들이다.
러복은 이튼 칼리지에서 1845년부터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아버지의 은행에 근무하며, 22세에 공동경영자가 되었다.1865년에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히준남 작위를 상속했다. 1870년과 1874년에 메이드 돌 선거구에서 영국 자유당의 하원의원으로 당선했다. 1880년에 의석을 잃었지만, 1872년 이래 그가 부학장을 맡고 있던 런던 대학교의 지지자가 당선했다. 그는 1871년의 은행 휴일법이나 [[1882년]의 고대기념비법을 포함한 다수의 법률의 제정에 참여하였었다. 1886년에 자유당이 아일랜드 통치법 때문에 내홍을 치르면서, 분열된 자유통일당에 참가했다. 러복은 1879년의 은행가협회(Institute of Bankers)의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1881년에는 영국학술협회의 회장, 1881년부터 1886년까지 런던 린네학회의 회장을 맡았다. 1883년에 은행원 고아원(the Bank Clerks Orphanage)을 설립했다. 1986년에 그것은 은행원과 전은행원, 및 그들의 가족을 위한 자선단체, 은행원 자선재단(Bankers Benevolent Fund)이 되었다. 1884년에, 후에 선거개혁협회가 되는 비례대표제협회를 설립했다.
러복은 19세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고고학 서적인 《선사 시대:고대유적과 현대의 야만의 매너와 관습에 의한 묘사》(Pre-historic Times, as Illustrated by Ancient Remains, and the Manners and Customs of Modern Savages)를 집필했다. 그는 석기시대를 크게 둘로 나누어 구석기 시대(Palaeolithic)와 신석기 시대(Neolithic)라고 구별하는 용어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러복은 몇 몇 분야에서 비전문 생물학자로도 연구하여, 곤충에 관한 책인 《개미, 꿀벌과 말벌:사회적 곤충의 습성의 관찰 기록》(1884)을 저술하였다. 또 곤충의 감각 기관과 그 발달에 대해서 그리고 동물의 지성에 대해서도 저술을 하였으며, 다른 자연사의 몇 몇 화제에 관한 책도 저술하였다. 그는 토머스 헨리 헉슬리의 X 클럽의 9인 클럽의 회원 중 한 사람이었다.
Colin Renfrew
Andrew Colin Renfrew 는 1937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13살때부터 유적발굴에 자원봉사학생으로 참가할 만큼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고등학교 과정과 대학 입학 과정에서는 자연과학 계통을 공부했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1,2학년동안 자연과학 학부생으로 있었던 영향으로 그의 연구방식은 실증적이며 과학적인 분석에 기초하게 된다. 렌프류는 고고학 교수 다니엘의 권유로 대학 2학년때 전과를 하게 되었는데 고고학과로 온 다니엘은 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바로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여 에게 해 연안의 문명에 대해 연구하여 박사 학위 논문을 완성하고 1966년에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바로 그 직후, 렌프류는 28세의 나이로 셰필드대학에서 부교수로 재직하며 고고학 강의를 담당하고, 심지어 정치 활동에도 관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렌프류는 신고고학자로서 과학적인 고고학 연구의 방법에 몰두하였다.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의 결과를 분석하여 기존에 만연하던 전파론의 입장을 반박하였고 문화의 내적요인들이 상호 작용을 일으켜 발전이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
렌프류는 방사선탄소 측정결과를 통해 기존의 주장들에 반박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선사시대의 사회단계를 규명하려 했다. 이러한 일들은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사회 계층의 발생, 진전, 통합 과정 등을 밝혀내어 해결하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1972년 사우삼턴 대학 고고학과의 석좌교수로 임명된 렌프류는 ‘사회고고학’이라는 연구 체계를 발표했다. 이는 과거 사회의 매커니즘을 연구하는 방법으로서 권력과 권위로 지배되고 유지되었던 과거 사회에 대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81년에는 렌프류의 스승이었던 다니엘 교수의 퇴임으로 렌프류가 케임브리지의 디즈니 석좌교수로 임명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렌프류는 사회고고학을 넘어선 ‘인지고고학’으로의 발전을 꾀하는 강연을 하였는데 수학적, 통계적인 방법을 통한 실증주의적 연구절차로 선사시대를 포함한 초기인류의 정신세계까지도 탐구하려는 그의 포부를 담은 이 강연에 대해 1980년대부터 대두된 후기과정고고학의 젊은 고고학자들의 비판이 쏟아지는 일이 있었다.
호더 등의 후기과정고고학자들은 인지적 측면의 해석에 있어서는 신고고학적 시각으로는 불가능하며 맥락적, 해석학적 방법을 통해야만 비로소 그것이 가능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렌프류는 신고고학에 근간을 둔 기능과정고고학에 기초하여 인간의 정신세계를 해석하려는 노력을 결코 멈추지 않았고, 후에 렌프류는 진정한 인지과정고고학 연구사조의 체계를 구체화 하여 발표하였다.
인지과정고고학
렌프류의 인지과정고고학은 고고학적 연구사조의 통합을 이루려 한다.
그러나 통합적 고고학을 이루려 한다는 점에서는 후기과정고고학과 목표가 동일하지만 연구 방법의 차이에 의해 두 견해는 대립되어지고 있다. 인지과정고고학의 의 특징은 크게 4가지로 볼 수 있다.
1. 물질문화의 능동적 역할 인정
물질문화가 사회를 구성하는데에 있어 능동적으로 변화를 주도하는 하나의 내적 논리를 가진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이것을 해석학적으로 연구하려는 후기과정고고학자들의 견해는 인정하지 않는다.
2. 과거 개개인 및 집단 이데올로기의 중요성 강조
개개인과 집단의 갈등이 이데올로기와 어떠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사회적 실체의 구성과 상호 관련성 여부를 연구하고자 한다.
3. 인지고고학 자체의 발달 강조
인지고고학의 가장 기본적 특징인 ‘인지적 측면을 물질문화를 통해 연구함’을 발달시키 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특히 과거 인간의 상징행위와 지적능력의 발달이 물질적인 부분을 통해 나타난다고 보고 연구함을 의미한다.
4. 실증주의적 연구시각
인지과정고고학에서는 과거의 일이 실재한다는 실재론(Realism)을 근본적 원리로 삼고 있다. 다만 현재의 연구자들에 의해 그것이 다른 해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다시말해 절대적인 객관적 연구가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것)만큼은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지고고학자들은 과거, 혹은 과거인의 인지적 측면을 과학적 접근을 통해 객관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실증적 연구시각을 고수하고 있다.
인지고고학에서는 물질문화 속에 인간의 인지와 상징이 깃들어 있다고 보아, 물질 문화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통해 기존에는 밝혀낼 수 없었던 과거의 사람들의 인식과 의도와 생각들마저도 추론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인지과정고고학의 최종적인 목표다. 그러나 이것을 연구하는 연구자의 잘못된 추론으로 인해, 혹은 편견에 사로잡힌 추론으로 인해 그릇된 연구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이것이 인지고고학의 한계점이라 할 수 있다.
내용 중 빠진 부분이 있어서 수정하여 다시 올립니다.
첫댓글 수고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