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서>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1:6)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1:9)는 명령을 하셨다. 이것을 보면 여호수아가 상당히 두려움 가운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마음을 담대히 하고 강하게 하는 것은 여호와의 몫”이고 우리는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순종할 수 있기 때문에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순종하는 자를 반드시 도우신다.” 더 나아가 중요한 것은 1장 18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의 경우처럼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순종과 그 지체들의 권면”이다.
목사님께서는 여리고 성의 라합 (2장)처럼 어느 곳에서든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갈망하는 인물들”이 있음을 기억하며 연대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그러나 라합이 자기 민족을 배반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에는 “민족개념은 근대 이후에 출현한 것”이라며 결국은 “가치와 가치의 싸움” 즉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맘몬 주의적 가치”의 싸움임을 강조하셨다.
아이성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패배한 것 (7장)은 “이스라엘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진짜 작은 싸움이 정말 중요한 싸움이다.”라고 하셨다. "작은 것에 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10장 12절의 기브온 전투에서의 태양과 달의 멈춤이라는 기적에 관하여는 ”너무 은혜 중심적 해석이 난무한다“시며 ”전투에 참여한 이스라엘 백성이 해와 달이 멈췄다는 것을 믿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설명해 주셨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은혜 중심적 해석이 반드시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아무튼 성경해석의 방법이랄까, 어느 방향을 취하는가가 중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사기>는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던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은 시대가 어떤 삶을 살았나”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사사기>를 일별하면 그 시대에는 각 지파들간에 분쟁과 분열이 심했고, 레위인들이 첩을 둘 정도로 타락했으며 자기 집안만을 위해 존재하는 제사장의 사유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드보라가 여선지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남성 지도력의 붕괴”를 보여주고 있고, 결국 “공동체에 믿을만한 사람이 없다는, 지도자의 부재”를 암시하고 있다. 사사 입다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던 “인신 제물”을 사사 스스로 서원할 정도로 하나님의 뜻에 무지했던 시대였다.
<룻기>에서는 며느리 룻을 감동케한 시어머니 나오미의 하나님 우선 가치를 살폈고, 더 중요하게는 룻기를 기록한 시대적 배경을 살피는 것이다. “순수 혈통이 순수 유대정신을 보장해 주는 것처럼 여겨져서, 민족적 배타사상”이 팽배해지던 현실에서 그 여론을 반박하는 기록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룻기>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방 여인 룻이 다윗의 증조모가 됨을 보여줌으로 “믿음이 순수 혈통에서 견지되는 것이 아님”을 로마서 2:28-29절과 연계하여 설명해 주셨다.
<묵상>
요즘은 매일 내게 보내오는 말씀 구절과 교회의 주일 설교를 보고 들으며 ‘왜 하필 이런 말씀과 이런 설교를 하시나’ 하는 의구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불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목사님께서 <사무엘상>을 “왜 이렇게 기록되었나”를 염두에 두고 읽으라고 하시니 머리가 더 무겁다. 결국 목적이 있는 저술이라는 것인데, 목사님께서 설명해주신 “신명기적 역사관”의 기술의 지향을 그려보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으로 기술되었지만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터치가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것은 성경도 예외일 수 없는 것인가보다...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그 자리에 다른 민족들이 세운 그런 왕을 바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사울이라는 인물을 내세우셨다. 사실 세상의 제도와 가치관을 따르지 않도록 구별된 민족이 이스라엘이고 지금 우리 믿는 자들인데, 우리가 가진 것보다는 세상의 것이 더 좋아보여서 그것을 따르고 싶어 하는 변질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인간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여러 자질들을 갖춘 사울은 결과적으로 다윗이라는 인물을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한 수단에 불과하지 않았나 싶다. 그도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지도자로 세워졌지만-결코 본인이 원한 것 같지 않다-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모두의 인정을 받는 권력자가 되었다. <사무엘상>은 그 차이를 선명하게 대비시킴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께 순종하는 길이 우리가 참으로 걸어야 할 길임을 선택케 한다.
이번에는 현실의 상황과 오버랩이 되어서인지 승리자 다윗보다는 실패자 사울에게 더 생각을 할애하게 되었다. 큰 인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애썼을 그 자신의 딜레마,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의 이름을 높인 결과,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책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미성숙,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도 진정으로 회개치 않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는 이미지 관리자.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들의 말도 외면하는 실패한 지도자, 사울. 지도자의 복을 달라는 기도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사무엘상>을 보면 여러 부모의 모습과 그 자녀들의 인생의 결말이 나온다. 그만큼 신앙 교육적 측면에서 살펴볼 여지가 많았다. 한나가 불임이라는 개인적인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기도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아이를 원해서 얻을 수 있었던 사무엘을 얼마나 공을 들여 키웠을지는 상상할 수 있겠다. 반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가진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의외로(?) 타락한 생활을 한다. 엘리와 사무엘의 자녀들이 그랬다. 그런걸 보면 부모의 영향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것도 크긴 하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훌륭한 부모에게서도 손가락질 받는 자녀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각자 인생이 있는 것 같다. 매순간 자신이 선택해서 나아가는 자신만의 길이. 영향력을 선하게 끼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구나, 생각해보게 된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경우를 보면 부모의 입장에서 취하지 말아야 할 자녀에 대한 태도가 있다. 그것은 어느 한 자녀를 다른 자녀와 다르게 대하는 것이다.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데 있나 하지만, 덜 아픈 손가락이 있긴 한 것 같다. 차이를 두지 않고 공정하게 대하도록 의지적으로 노력해야 할 숙제가 있긴 하다. 나의 경우는 조카들이긴 하지만.
<질문>
1.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삼상 15:22) 는 말이 제사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2. 사울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악령의 지배를 받는데, 그것은 사탄에게 욥의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사울도 피해자 처럼 느껴지는데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인정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