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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和會(종교간 화합을 위한 모임) 會報
푸른 들소리[제 14권 6호](통권 240호)(2012년 6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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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지키면서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자(護國漸進)
장 기 홍
우파와 좌파란 말이 있고 보수와 진보란 말이 있다. 흔히 우파=보수, 좌파=진보라는 식으로 쓰인다. 그러나 누가 나더러 당신은 어느 쪽이냐 묻는다면 나는 망설일 것이다.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는 문자 그대로 보수(保守) 쪽이지만 그러나 경제를 두고는 진보 쪽이다. 안이하게 좌우 둘로 갈라놓는 천박함에 대하여는 흑백논리라 이분법이라 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는 그런 흑백 이분법에 따르도록 압력을 받는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보수와 진보를 겸하고 둘을 조화시킬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내가 만일 투표나 입당(入黨) 등 어떤 정치적 실행을 하려들면 새누리당이냐 통합민주 쪽이냐 하고 입장을 밝혀야 하게 마련이다. 둘 중 택일을 하도록 어이없는 압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생각 깊은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기가 어려운 고민이 여기에 있다.
걸핏하면 말과 이름의 문제에 휘말린다. 대한민국은 재벌을 키워서 성공한 나라이지만 재벌들이 우세(優勢)의 자리를 잡아 나라를 좌우하면 위험하다. 그러므로 다들 재벌을 염려한다. 자본주의에 수정을 가해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나는 경제상 진보 쪽에 서 있다. 그러나 지금은 진보란 말이 어이없이 독점되어 있어 용어가 궁하다.
진보를 자처하는 종북인사들은 종북이라는 호칭을 싫어 하지만 날로 그 존재가 드러난다. 그들은 만일 6 25가 남침통일로 끝났더라면 한반도는 이상적 민족국가가 되었으리라고 보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몽상일 뿐이다. 북의 세습왕조를 보면 저들은 그 체제를 한반도 전체에도 적용시키려 들었을 것이다.
6 25 때 남한은 천우신조로 살아났다. 유엔군 파병을 결의하던 자리에 거부권을 가진 강대국 대표 한 사람이 사고로 참석하지 못하였다 한다. 그래서 유엔군이 파병되는 기적이 이루어졌던 것이니 천우신조가 아니고 무언가? 지금 남북한의 대조를 보라! 우리 민족의 희망이 오직 이 나라에 있게 되었으니 대한민국에게는 그만큼 사명이 크다. 아직 여러 흠이 있지만 민국은 온 세계에서 빛나는 보석과 같은 나라가 되어 있다.
지금 북한 인민은 기아에 허덕이고 아사자는 부지기수이다. 그런데도 식량을 살 돈을 가지고 미사일을 날리고 핵무기를 만드는 데 써버린다. 탈북자를 잡으면 죽이거나 강제수용소에 보낸다. 그런데도 종북(從北)인사들은 북한의 모순과 북한의 인권탄압에는 침묵을 지키고, 오히려 북한의 주장이나 선전과 흡사한 생각과 태도를 취한다. 수령(首領)의 수족 노릇을 하는 충성파가 있는가 하면, 대화를 통한 남북
통일을 하자면 돈을 주고 북한을 달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축도 있다. 그들 종북인사의 공통점은 북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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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독재와 인권 지옥에 함구하여 그 비행을 방조하는 것이다. 기회만 있으면 남한을 해치고 무너뜨리려는 북한이 있고 보면 지금 남북한은 엄연한 적대관계에 있다. 이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저쪽이 적화통일을 넘본다면 이쪽은 북한이 붕괴될 경우 흡수를 피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아무리 돈이 많이 들어도 통일의 의무와 사명을 다해야 할 형편이다.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애국가 부르기를 꺼리는 집단은 어떤 유사시에 우려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남북이 통일되려면 북한은 자본주의를 일부 채택하고 남한은 사회주의를 보태어서 차츰 접근해야 하리라. 그런데 북한이 세습왕조가 되고 경제가 망가졌으니 접근은커녕 체제유지를 위해 혈안이 되어버렸다. 지금 북은 자기수정이라는 자연스러운 길을 걸을 수 없이 되어버렸다.
중국으로 탈북하는 사람 수가 늘어가자 중국측에서는 철책과 콩크리트 방벽을 만드는 장면이 화면에 보도되었다. 장차 어떤 시점에 가서 탈북자들이 남한으로 쇄도(殺到)할 때는 국경을 열고 동족을 수용하는 길 밖에는 없으리라. 흡수통일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들 하지만 준비에 만전을 다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한때 남한은 군사독재의 피해자들을 양산했다. 그들 중에는 남한 사회가 붕괴되어야 자기네 발붙일 입지가 얻어진다는 심리를 가진 다수가 생겨났다. 북한을 대안으로 알고 동경하는 정서도 지배했다. 지금은 이성이 있다면 그 기대가 터무니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종북인사들은 그들대로 세(勢)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남한의 체제에 흠이 많고 또 민주화의 현황이 그들의 활동을 용납하기 때문에 정당을 만들어 국회의원도 내고 각처에 침투 분포되어 활동하고 있다. 그들 중 국회의원들은 국방위원회 위원이 되기를 목표로 안간힘을 쓸 것이고 국방 비밀은 북한당국으로 직송될 것이다. 국회의원 뿐 아니라 교육계와 법조계에 이미 그들은 크게 자리잡았다. 요즘의 민간항공과 군사항공, 정밀무기 등은 모두 인공위성을 통한 위치파악장치에 의존하고 있는데 만일 그것이 교란되면 사회는 마비되고 전시에는 파멸에 이른다. 그런데 그 악몽이 현실이 되었다. 교란기술이 북한간첩에 의해 북한으로 넘겨진다는 보도이다.
마르크스는 그의 자본론을 통해 세상이 잘 되게 애썼던 사람이며, 그의 저서를 공부할 필요는 늘 있다. 그러나 사유재산을 요구하는 인간본성을 무시하거나 계급투쟁이라는 싸움을 장려하여 무산계급만의 이기적 독재적 세상을 만들자는 음모는 용납될 수 없고 또 그것이 공산주의의 패망으로 역사의 판정을 받은 지 오래다. 마르크스의 책을 교재로 삼아 모여 공부를 하면서 대한민국을 기본적으로 해치려 뜻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마르크스를 공부하든지 누구를 연구하든지 남한의 부족한 점은 점진적으로 개선하여 좋은 나라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제 이 과제는 너무나 명백해졌다. 급진적으로 어떻게 발버둥치면 좋은 세상이 당장에 오리라 기대하는 것은 과욕이다. 욕심일 뿐이다. 그런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은 어떤 경우에도 낙원은 오지 않는다. 이상적인 세상이 된다고 선동하던 것은 결과적으로 속임수에 불과했다. 차츰 이상적인 세상이 되게 노력하도록 그렇게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현재의 다행을 감사히 생각해야 한다. 남한 경제에는 재벌의 공로가 크다. 그러나 그들이 독식을 하고 횡포를 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가지 못하게 수정이 가해져야 한다.
복을 까불면 재앙 밖에 올 것이 없다. 요즘 철부지들은 남한에 혁명을 일으켜 극적으로 좋은 나라를 만들어보자는 생각도 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는 북한의 세습왕조에 휩쓸려 들어 지옥으로 직행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통일은 무조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통일만 되면 한반도는 이상향이 될 것 같이 허황된 기대를 가지는 축도 있다. 종북 인사들 중에는 북한 주도로 통일이 되기를 바라는 축도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이미 획득한 고지에 서서 그것을 발판으로 통일을 진행시켜 가야 한다. 착오와 실책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박정희로 대표되는 지도자들 주도로 역사는 되어왔고 그들이 닦은 대로(大路)가 우리 앞에 제공되어 있다. 이 대로를 이용함으로써 더 나아갈 수가 있다. 엉뚱한 딴 길을 찾는 것은 역사를 무시하는 오류이다. 길을 잃고 싶어 짐짓 헤매어보는 것과 같다. 천우신조로 얻은 이 나라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만큼 민국에게는 사명이 크다. 민족통일에서 나아가 세계사적인 사명이 있음은 물론이다.
Caribbean Cruise여행 日記
2012년 5월 28일 강병조
필자는 2012년 5월 12일(현지시간) 서인도제도를 발견하였다. 크리스토퍼콜럼버스가 1492년에 이 섬들을 발견하였으니 그이 보다 520년 늦게 발견한 셈이다. 콜럼버스는 인도에서 향료를 얻으려고 인도로 가다가 이곳에 도착하였다. 이곳이 인도의 서쪽에 있는 섬들로 착각해서 서인도제도라고 이름을 붙였다.
필자는 수 십 년 전 미국에 사시는 한 선배님으로부터,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Caribbean cruise를 해보라는 말씀을 들은 기억이 나서 이번 여행을 결심하였다. 내가 경험한 Caribbean cruise여행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관광이 아니라 <entertainment and enjoy>였다. 이집트, 인도, 중국, 유럽, 중동 등의 여행은 역사적인 곳들을 둘러보면서 세계의 역사를 배우고 느끼며 우리나라와 우리를 되돌아보는 관광이었다면, 이곳 여행은 관광이 아니라 즐기러 오는 여행인 것이다. 아름다운 섬들의 해변에서 각종 물놀이(snorkeling, 낙하산타기, 바다낚시, 요트 타기 등)를 하며 즐기고, 크루즈선 안에서는 여러 가지 즐길 꺼리(night club, dancing, 가라오께, 음악 감상, 그림 감상, 성인 쇼 구경, 수영, 체육관, 탁구, 미니골프, 물 미끄럼타기, 조깅 등)를 찾아서 즐기며, 각 나라 음식을 마음껏 먹으며, 각 나라 사람들과 환담을 하면서 삶을 즐기는 것이었다.
우리들이 들린 섬들은, 미국령 바하마군도에 있는 크루즈회사 소유의 Half Moon Cay, 미국령 Virgin Island의 St. Thomas섬, 미국자치령 Puerto Rico의 수도 San Juan, 영국령 Grand Turk섬이었다. 모두들 아름다운 해변과 깨끗한 유럽식 건물들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지중해에 와있는 착각을 느끼게 하였다. 기후도 지중해와 비슷해서 섭씨 27-29도 이었으나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하였다.
일기 식으로 우리들이 즐긴 기억을 적어본다.
5월 11일 (금):
대구에서 인천까지 1시간, 인천에서 아틀란타까지 14시간, 아틀란타에서마이에미까지 2시간 모두 17시간의 비행기를 타고, 대기 시간을 합해서 만 하루가 걸려 마이에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Hilton Miami Airport Hotel로 셔틀버스를 타고 갔다. 방에는 LG TV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곧바로 마이아미 해변으로 갔다.
석양에 물든 마이아미 해변과 밤거리도 거닐어 보았고, 해산물로 유명한 Avalon 호텔 부속 A Fish Called Avalon 식당에서 Latin 음악을 들으며 lobster 즐겼다.
5월 12일 (토):
오후 4시 출발인 크루즈선에 12시부터 사람들이 인산인해였다.
서울 신라호텔만한 12층 크루즈선에 약3000명의 여행객들이 탔다. 피부색은 대부분 백인들이고 아시인과 흑인들은 소수였다. 노인들도 소수고 대부분 젊은 청춘남녀들이었다. 미국 사람들이 다수였고 소수는 남미사람들이었으며, 한국 사람들은 우리 외에 한 사람 더 있었다.
크루즈선 방에서는 삼성 TV로 뉴스를 보았다. 크루즈선에서 serving하는 사람들(식당 보이, 청소부 등)은 전부 아시아인들(필리핀, 태국, 네팔인 등)이었다. 노래하는 바에서 가수나 밴드들은 대부분 필리핀인들이거나 쿠바출신들이었다.
5월 13일 (일):
아침 9시에 Half Moon Cay에 도착하였다. 크루즈선에서 다시 작은 배로 갈아타고 섬에 도착하였다. 바다색은 청색이 아니라 옥색이었다. 석회질이 많아서 옥색인 것을 우리들은 캐나다 록키산맥의 여러 호수들에서 보아서 잘 알고 있었다. 이 섬의 이 해변은 이 크루즈회사의 개인소유였다. 이 섬에 해적들이 있었던 섬이라고 해적선도 전시해 놓았다. 그 옆에서 바비큐로 점심을 먹었다.
해변에는 굵은 모래는 없고 밀가루크기의 석회 모래들만 있었다. 잠시 해수욕을 했는데 피부에 화상을 입었다.
저녁에는 오늘이 Mother's day라고 부인들에게 모두 카네이선 한 송이씩을 선물로 주었다. 저녁 식사 후 칵테일 바에 가서 필리핀 밴드에게 'My Way'를 신청해서 들었고, 불루스 곡에 맞추어 춤도 추었다. 에콰도르에서 온 노부부는 ‘베삼에무초’를 신청한 후 멋진 탱고 춤을 추었다. 나이 든 흑인 부부도 Honey moon 여행이라며 감정을 넣어서 멋지게 춤을 추었다. 9층 젊은이들의 dance party에도 가보았다. go go style의 노래와 춤은 동서양이 따로 없었고 세계 젊은이들의 공통 춤이었다.
5월 14일 (월):
이날은 배에서 하루 종일 보냈다. 바하마제도에서 Virgin Island까지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배 옥상 12층에 있는 par 3-mini golf-9 hole을 쳤다. butter로만 치는 mini golf인데 재미있었다. 바람이 세게 불었으나 golf ball이 날려가지는 않았다. 오후 1시에는 그림을 경매하는 auction 구경을 했다. 2시에는 째즈 음악 감상을 하고 4시에는 힙합댄스를 배웠다. 5시에는 불루스 타임이 있어서 집사람과 불루스를 추었다.
저녁은 정장 차림으로 와인을 마시며 lobster를 먹었다. 저녁 9시에는 가라오께에 가서 각국 나라 사람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들었는데 모두들 가수 수준 이었다. 밤 10시에는 라틴 뮤직을 들으며 라틴댄스를 구경을 했다.
5월 15일 (화):
Virgin Island인 St. Thomas섬에 아침 10시에 도착했다. 인구 52.000명의 섬이다. 녹색과 옥색의 Magen bay가 있고 건너편에 별장들이 보였다. 거기에는 미국 부통령 별장도 있다고 한다. 비행장도 보였다. Clinton 대통령이 이곳 Virgin Island에 왔다간 후로는 이곳이 Virgin Island가 아니라는 농담도 있다고 한다.
마누라는 Caribbean stone으로 만든 손 가락지를 샀다.
저녁 식사 후에는 Latin dance 하는 곳에 가서 구경을 하다가 혼자 춤추는 할머니가 있어서 따라 추었더니 모두들 웃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뉴올린스의 2월 축제인 말리그라 축제에 참여해서 춤도 추었다. 마지막에 목걸이를 던지는 이벤트에서 나는 1개 마누라는 5개를 주었다.
5월 16일 (수):
Puerto Rico 수도 San Juan에 아침 7시에 도착했다. 서인도 제도(카리브해)의 대(大)앤틸리스 제도에 있는 미국의 자치령이다. 1493년부터 400년간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다가 미국-스페인전쟁 이후 1898년 미국이 점령하여 군정(軍政)을 실시하였다. 그 후 1952년 국방·외교·통화를 제외한 내정을 이양받아 미국의 자치령이되었다.
정식명칭은 푸에르토리코자치주(Commonwealth of Puerto Rico)이다. 동쪽은 버진아일랜드, 서쪽은 도미니카로 이어지는 대양에 위치하며, 본토를 이루는 직사각형 모양의 큰 섬과 여러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다. 콜럼버스가 섬을 발견했을 때는 산후안바우티스타(San Juan Bautista)라고 불렀고, 미국 군정이 시작된 1898년부터 1932년까지는 포르토리코(Porto Rico)라고 불렀다. 주민의 대부분이 카톨릭교도(85%)이고 에스파냐계 백인(80.5%)이며, 흑인이 그 다음인 8%를 차지한다. 푸에르토리코의 지위에 관련하여 미국은 51번째 주(州) 편입을 원하고 있지만, 푸에르토리코는 1993년과 1998년에 이어 2003년 국민투표에서도 근소한 차로 자치령으로 남기로 결정했다. 주민은 1917년 이래 미국 시민 자격을 누려왔으나, 미국 대통령선거나 상·하원 선거에 투표 자격이 없으며 개인 소득세를 미국연방정부에 납부하지 않는다.
힘들이 충돌한 현장을 구경하였다.. 스페인-미국 전쟁 당시 스페인들이 지은 돌 성(城)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높이가 10m 정도의 높은 돌 성에 대포고 있었다. 무적함대의 나라 스패인도 20세기의 최강국 미국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San Juan은 섬의 북쪽 해안 동부에 있는 항구도시로 1508년 건설된 구(舊)시가는 대안의 작은 섬에 있으며, 에스파냐 식민지시대에는 서인도제도와 유럽을 잇는 거점이었다. 영국·프랑스·네덜란드의 습격을 여러 차례 받았던 역사를 반영하여 성채가 여기저기 남아 있다. San Juan에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있었다. 두 구역 모두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는 아주 깨끗한 해변 도시이다. 거리를 다니는 차들은 대부분 미제 차이나 일제 차들도 많이 보였고 1-2대의 현대차도 보였다. 구시가지와 도로로 연결되어 있는 신시가지는 근대적 도시로, 식품가공업·시멘트·섬유 등의 공업이 활발하고, 설탕·잎담배·커피 등이 적출된다. 푸에르토리코대학이 있다.
나는 이곳 특유의 우표를 샀고, 마누라는 허리케인을 예방하는 목걸이를 샀다. 마누라는 ‘바람의 허리케인만이 아니라 인생의 허리케인’도 예방하는 목걸이라고 해석을 부쳤다.
저녁 후에는 역시 Latin dance하는 곳에 가서 춤추는 것을 구경하다 발동이 걸려 집사람과 춤을 추었다. 며느리는 열심히 우리가 춤추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하였다. 춤 잘 추는 쿠바인이 와서 나에게 라틴 춤의 기본 동작을 가르쳐 주었다. 걷는 폼으로 박자를 맞추어 추면서 엉덩이를 옆으로 흔드는 것이 기본 폼이다. 나는 잘 되지 않았다. 이곳의 춤을 <붐바>라고 하는데 이곳의 original rhythm이라고 한다.
5월 17 (목):
영국령 Grand Turk섬에 아침 11시에 도착했다. 이 섬은 대서양의 카리브해(Caribbean Sea)에 위치하는 영국령 터크스와카이코스 제도(Turks and CaicosIslands)에 포함된 터크 제도(Turk Islands)의 섬 중에서 가장 큰 섬이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당시 최초로 상륙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중심 도시는 콕크번 타운(Cockburn Town)으로 1766년부터 정부 기관이 있던 곳이다. 처음 도시에 정착한 것은 1681년 소금 수집상에 의해서며 터크스와카이소스국립 박물관(Turks &Caicos National Museum)에는 서반구에서 가장 오래된 난파선으로 알려진 1505년 난파된 배의 잔해 모레시스리프렉(Molasses Reef Wreck)이 전시되어 있다. 콕크번 타운의 계류장은 헉스네스트 계류장(Hawk’s Nest Anchorage)으로 암초들 사이를 보호를 받으며 지나는 곳에 있다.
시내 구경을 하고 해적 조각상이 있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원주민이 해적인지, 이 섬을 침략한 사람들이 해적인지 나는 헷갈렸다.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요, 힘이 정의이니 해적이라면 해적으로 믿어야 한다. 박물관에서는 이곳으로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왔다는 기록들을 전시해둔 것을 보았다. 우체국에 가서 몇 가지 우표도 샀다.
저녁 후에는 아시아 뮤직 하는 곳이 가서 노래를 들었으나 재미가 없어서 다시 Latin music을 들으러 갔다. 춤 잘 추는 쿠바인 남자와 푸에르토리코 여자에게 와인을 한 잔 씩 권했다. 남자는 쿠바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50세 남자로서 크루즈 여행만 6번째 한다고 했다. 여자는 푸르르토리코 출신으로 마이에미에서 유치원 선생을 하며 아들 3명 손자 5명을 둔 45세 여자로서 남편은 없는 것 같았다. 우리들에게 스마트 폰으로 찍은 자식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아마 친구 관계 같은데 춤이 맞아서 같이 크루즈 여행을 하면서 매일 밤 재미있게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남자는 "dance is my life"라고 말했다. 우리들은 이들과 명함을 교환했는데, 마이에미에 오면 자기가 안내하겠다며 꼭 전화하라고 하였다.
5월 18 (금):
하루 종일 배에서 노는 날이었다. 배살 빼는 강의가 있다고 해서 체육관에 들렸더니 많은 사람들이 각종 운동기구들을 이용해서 신체를 단련하고 있었다. 뚱뚱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날씬한 사람들만 열심히 운동하고 있었다. 체육관 밖을 나오니 배가 불룩한 뚱보들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걸어 다니고 있었다.
점심은 몽고 음식 won을 먹었다. 징기스칸이 전쟁을 하면서 간편하게 요리해서 먹던 식으로 각종 음식자료를 넣어서 볶는 음식이었다.
mini golf-9 hall을 두 번 돌았다. -4점으로 내 생에 최고점을 받았다. 탁구도 쳤으나 바람이 세어 탁구공이 날려 포기했다. 물 미끄럼도 탔다. 내가 타고 내려가니 밑에서 지키고 있던 가이드가 “Are you OK?"하고 물었다. 아마 이것 탄 사람 중에서 내가 나이가 제일 많은 것 같다. Miss Carnival-Liberty를 뽑는 것도 구경했다. 얼굴과 몸매로 뽑는 것이 아니라 시키는 문제를 잘 해결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저녁에는 힙합 댄스 구경을 했다. 우리 부부는 Latin music이 좋아서 그곳에 갔다. 그곳은 알고 보니 쿠바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이 모여서 고향의 음악에 심취해서 망향의 서러움을 달래는 곳이었다. 우리 옆에 앉아있는 한 노파는 우리 보고 절대로 쿠바에 가지 말기를 당부하였다. 쿠바 정부가 나쁜 놈들이기 때문에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북에 공산정권을 두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당장 알 수 있었다. 이북에서 피난 온 이북 출신들이 이북 공산주의자들을 적극 악평하는 것과 동일하였다.
5월 19일 (토):
아침을 방으로 배달하여 먹었다. 배달 온 아시아인에게 참 소주 2병을 주었다. 미쳐 팁을 못 주었는데 그가 가버려서 마음이 아팠다. 아침 8시에 마이에미에 배가 도착했으나, 배에서 내리는데 무려 2시간이나 걸렸다.
택시를 타고 유명 소핑 몰이 있는 곳으로 갔다. 바닷가 부촌에 유명상품만 파는 소핑 몰이 따로 있었다. 창이 짧은 빵모자를 사러 갔으나 없었다. 빵 모자가 아니라 골프 모자라고 하였다. 점심은 와인과 lobster를 시켜먹었으나 lobster가 전에 먹었던 것보다 못하였다. 밀가루를 너무 많이 넣었다.
마이에미 공항에서 어메리칸 에어라인으로 아트란타에 왔다. KAL로 갈아타고 인천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탑승gate 앞에서 의자에 앉아 요가를 했다. 다리가 무거워서 다리를 위로 올리고 주무르는 요가를 내가 만들어 했다. 남이 보기에는 좀 흉할지 모르나 나는 다리가 가벼워졌다. 마침 운이 좋았는지 우리가 불쌍하게 보였는지, 마일래이즈가 많아서 그랬는지, 우리 부부를 비즈니스석으로 배치해주어서 정말 발을 쭉 펴고 잠자면서 편하게 귀국하였다.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편하게, 행복하게, 즐기면서 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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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모임 1목(木) : 6월 7일(목) 저녁 7시
3목(木) : 6월 21일(목) 저녁 7시
장소 : 경북대학교 병원 606병동 7층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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