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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산
나의 아버지는 내가 16살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평범한 농민으로, 사회에 언급할 만한 공헌 없이 평생을 매우 평범하게 보내셨지만, 나에게 있어 아버지는 나에게 비할 데 없는 진귀한 재산을 물려주신 분이다.
그 당시 나는 도쿄에 있는 요리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통지를 받고 나서 나는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앓고 있던 것은 심장병이었다. 내가 집에 돌아온 이후 아버지의 병세는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였고, 마지막에는 병세가 계속 악화하여 대략 보름 남짓 지나서 돌아가셨다. 그때 아버지 연세가 59세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와 어머니는 병상에 누워 계신 아버지를 병문안하러 갔다. 점심 때쯤 회진을 나온 의사가 말하기를 “이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비록 문외한이지만 아버지의 얼굴만 봐도 아버지의 병세가 매우 위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어머니가 아버지의 배게 쪽으로 다가가 양손으로 아버지의 오른손을 잡고 자기 가슴을 누르면서 한편으로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 왕생에 문제가 없겠죠?” 나는 어머니의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그 순간 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온몸이 굳어 깊은 생각에 잠겨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난 이미 왕생을 얻었잖아요……” 아버지는 눈을 살짝 감고 있었지만, 이것이 아버지가 직접 말한 답이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비록 나지막하였으나, 굉장히 확신에 차 있는 말투로부터 마음속에 그 어떤 동요도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서 흐느껴 울며 “그런가요? 그럼 너무 기쁘네요.”라고 말하면서 한편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던 광경이 지금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게다가 아버지의 “난 이미 왕생을 얻었잖아요.”라는 이 말은 내가 이 세상에서 들었던 가장 아버지다웠던 말이었고, 또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다.
아마도 인연이 무르익어서였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승려가 되었다. 불교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특히 “정토”와 같은 학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약간의 자신감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배운 것은, 얼마나 심오한 논리든 사상이든 죽음에 직면하면 모두 다 소용없었다. 이런 느낌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깊게 느껴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모든 지식은 아버지의 유언인 “나는 이미 왕생을 얻었다.”라는 말에서 배웠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정토에 대한 모든 학습은 “아미타불의 정토왕생을 얻었다.”라는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나에게나 다른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나 모두 인생에서 가장 좋은 귀착점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유한한 지혜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아버지가 남겨준 유산이다. 나는 이 유산의 소중함을 끊임없이 체험하는 것이 나의 이번 생 여행의 사명이겠지 하는 감회가 자주 마음속에 떠오른다.
“욕생아국”이 정토교의 기초
정토교의 기초는 “욕생아국”이라는 이 한 구절 속에 들어있다. 만일 이 기초에서 벗어난다면 아무리 심오한 학문이라 해도 정토교의 학문은 아니다.
일념 귀명하면 평생업성
정토종의 종의(宗義)에서 안심의 귀결점은 “일념업성, 평생업성”으로, 정토교리를 자주 듣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이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만일 이해하였다면 정토종의 교법이 얼마나 진귀한지 깊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삶도 지금 이 순간, 죽음도 지금 이 순간
“심신일여(身心一如)”를 말하자면, 사람의 마음과 몸은 분리할 수 없지만, 자유로운 “성품”의 “마음”은 몸을 버리고 자유롭게 과거, 미래, 동, 서, 그리고 시방삼세를 쉴 새 없이 드나들 수 있다. 만일 “몸”을 한쪽에다 버리고 오로지 마음으로만 “죽음”을 맞이한다면, 틀림없이 “인류의 수명이 계속 연장될 수 있는”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그렇다면 설사 사망할 때의 광경 역시 자유롭게 이런저런 상태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다.
만일 살아있는 몸을 가지고 말한다면, 이른바 “살아있는 몸” 역시 한 번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태일 뿐이고, “죽음”은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중단되는 그 속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며 등장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삶”이 지금 이 순간이라면 “죽음” 역시 지금 이 순간이다. 지금 사망이 “몸”에 왔을 때, 우리는 어떤 상태로 죽어야 하는가? 내가 이 문제를 가지고 나 자신에게 죽음을 직면할 때의 생각을 물었을 때, 나는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가 임종할 때 “어디로 가는가?”라고 묻자, 아버지가 조용히 “나는 이미 왕생을 얻었다.”라고 답할 때의 모습이 떠오를 때면, 나는 그 말이 단지 진귀하고 고상한 말뿐만이 아님을 깊이 체득할 수 있었다.
가능한 한 하나하나의 “사망”을 모두 자기의 “죽음”으로 간주하고 진지하게 대하며, 평온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이 인간 세상을 작별하는 것은, 누구나 갈망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죽을지 모르고, 이 “몸”의 숙세 업을 모를 때, “죽음”의 문제에 관해 지금 반드시 극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를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피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해답을 줄 수 있는 것은 인류의 궁극적인 구제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일념의 귀명으로 평생업성”이다.
평생업성의 진정한 함의
이른바 “평생”이란 보통은 대체로 인생 중 하루하루의 생활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방금 말했듯이 본질적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봤을 때, 아마 사망도 바로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몸”의 본래면목이다. 만일 이렇게 “삶”의 본질을 바라본다면, “평생”이란 실은 지금 이 순간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업성”이란 “업사성판”의 준말로서, 미망에 빠진 범부가 정토에 왕생하여 성불하는 이 큰일이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삶과 죽음에 관해, 즉 “생사”에 관해 일반인들은 항상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저렇게 생각한다”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줄곧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판단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긴박한 무상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무너지게 하는 동시에, 정토로 통하는 길은 오직 나무아미타불 한 갈래 길뿐임을 믿고, “헤아릴 필요 없이 안심하고 곧장 오라”는 육자명호의 참뜻, 즉 아미타여래의 마음을 안다면, 아미타여래께 귀의하는 신심 역시 결정된 것이다. 이것을 회심이라고 하는데, 유루(미혹의 상태)에서 무루(깨달음을 경계)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평생업성의 범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마 인연이 성숙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승려가 되었다. 나는 끊임없이 불교 지식을 배웠기에 나는 이미 “평생업성”의 함의를 이해하였고, 그것이 종의(宗義) 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나는 결코 종의(宗義) 상 지식수준에서의 이해에 머무르지 않고, 뼈에 사무칠 정도로 직접 체험한, 정말로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 있는 동시에 끊임없이 격려받고 있다.
1945년(쇼와 20년)의 정월, 그 당시 나는 교토의 오오타니(大谷)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1944년(쇼와 19년) 말, 나는 겨울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1945년(쇼와 20년) 1월 5일에 교토로 돌아왔다. 그때, 어머니는 나를 당시의 국철 - 동해도선의 안성역(安城驛)까지 바래다주었다. 전체 노선은 고향의 요코즈카(米津)에서 전차를 타고 남안성역까지 갔다가, 다시 도보로 대략 1500미터 가량 이동하면 안성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1500미터를 걷는 동안 나는 어머니가 직접 만든 감자칩과 감시 등을 짊어지고 걸었다. 비록 그 시기에 식량이 부족했지만, 집이 시골에 있었기 때문에 항상 먹을 것을 마련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나란히 걷고 있을 때, 무슨 영문인지 어머니는 갑자기 어조를 바꿔 말했다.
“왜냐하면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죽든지 전부 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이 말을 듣고 나는 잠시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마음속에 솟아올랐고, 나는 자기도 모르게 어머니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당시 나고야(名古屋)의 거리에서는 미군의 공습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공습당하는 것이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자신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나는 한편으로 내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한편으로 기뻐하는 척하며 일부러 승려의 어투로 말했다.
“그래요. 어머님은 그렇게 염불을 좋아하시는데 틀림없이 정토에 왕생할 수 있을 겁니다……”
“스님도 꼭 오셔야 해요……그렇게 수승한 인연으로 사람들을 위해 정토왕생의 길을 설하는 스님이 되셨으니까요……만일 스님이 안 오신다면 나는 아미타불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갈 테니까……”
이렇게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이야기하며 걸어갔다. ‘왜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나의 마음속에 의문과 불안이 생겨났다. 어머니에 대한 미련을 놓아버리기 힘들었기에 내 마음은 더욱 아팠다.
그때 나는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면, 어머님은 무슨 말씀을 하실까?’라고 생각했다. 나는 은밀하게 어머니의 옆얼굴을 보았으나, 어머니가 그런 말을 기대하는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기차가 좀 늦게 왔으면 좋겠다고 바랐지만, 기차는 정시에 도착하였다. 어머니 쪽에서는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 나는 기차 창문을 통해 어머니가 난간에 기대어 곧 출발하려는 기차를 바라보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금생에 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어서 삼일 후인 1월 8일 밤, 고향 쪽에 지진(삼하지진)이 발생했는데, 우리 집이 무너져 어머니와 여동생 한 명이 무너진 집 아래에 깔려 사망하였다.
지진이라는 뜻밖의 재난으로 인해 아들은 어머니를 잃고 말았다. 이런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어떤 것으로도 쉽게 치유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평생업성”이라는 의미에 대해 나는 잘 알고 있었지만, 슬프게도 범부는 쉽게 망상잡념에 휘둘려 현재 “삶”의 실상에 대해 쉽게 흐릿진 나는 도리어 “평생업성”에 대한 인식을 배제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생시에 나에게 한 마지막 말과 어머니의 뜻밖의 사망, 이런 갑작스러운 인연은 나에게 “평생업성”이란 실은 자신의 현재 “몸”의 문제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하였다.
“생신(육체)”이 살아있을 때, 어제의 일도 생각하게 되고, 내일의 일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이 자신의 “일생”에 대해 대대적인 청산을 할 때, 언제든지 “지금”의 일은 모두 당신이 피할 수 없는 “몸”의 진실한 체험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어머니로부터 깨달은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은, 확고하게 아미타불께서 중생에게 기대하는 “욕생아국(나의 정토로 오라)”하라는 부름에 따라 “원생안락국(안락국에 왕생하길 발원한다) ”할 수 있으면,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의 일생에 가장 좋은 귀착점이 된다는 것이다. 정토로 통하는 도로는 죽을 때의 상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아미타불께서 부르시는 대로 “정념으로 곧장 와서” 이 마음을 아미타불께 바치고 아미타불께 맡겨서 왕생한다면, 이런 마음이 결정될 때(일념의 귀명) 바로 즉각 완성된 것(즉 평생업성)이다. 이것이 내가 어머니로부터 깨달은 진종의 큰 안심이다.
《정상말화찬》에서 말하기를,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함께 대원이라는 자비로운 배를 타고 생사의 고해 속에서 떠다니며 유정중생을 부르며 배에 타라고 하시네.”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자신과 인연을 맺고 신심이 결정된 사람을 아미타불의 본원에 귀속되길 바라고, 아울러 숭앙(崇仰)하는 마음으로 생사윤회하는 사바세계에 나투어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불보살을 찬탄하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내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를 때마다, 나의 머릿속에는 아미타불께서 나를 영접하여 정토로 왕생하는 화면이 떠오른다. 내가 운전할 때마다 늘 “조심하세요”라는 따뜻한 경고를 듣게 되고, 내가 핸들을 잡고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때면 항상 머릿속에서 갑자기 교통사고의 장면이 떠오른다. 이럴 때마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죽든 간에 나는 정토에 왕생한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무심코 육자명호를 부르게 되고, 마음속으로 묵묵히 “어머님 감사해요. 저도 이미 왕생을 얻었어요.”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비록 이렇게 말하는 방식이 사람들을 좀 불쾌하게 하고 경솔하게 보이게 하며,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지만, 대세지보살 아버지와 관세음보살 어머니의 은혜를 입고, 두 보살이 목숨을 걸고 방편으로 유도해 주신 은혜를 입었기에, 사람들이 아미타불의 대비심에서 나타내 주신 “극락왕생의 길”을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것이 내 마음속에 은밀하면서도 가장 진실한 체험이다.
(우에스기 시로<上杉思朗>의 《극락왕생의 길》에서 발췌함, 정전스님 번역)
역자 독후감:
이 글이 엄청난 걸작은 아니지만, 저자 특유의 섬세한 표현방식으로 부모님과의 마지막 일화를 소개하면서 정토진종 교리에서 말하는 일념의 신심을 확인하는 한편, 승려의 신분이지만 부모님의 아들로서의 감정 기복을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잘 보여주고 있어, 독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마음에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일으킨다. 또한, 죽음을 앞둔 남편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나 마지막으로 아들을 바래다주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임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평생업성”이 된 두 분의 한 치 흔들림 없는 심경에서 우리는 신심의 중요성을 배우게 된다.
“평생업성”은 정토종에서 매우 중요한 명제이다. 이 글에서 저자가 말하는 “평생업성”은 정토진종의 해석대로 아미타부처님께 귀명하는 극한의 일념 신심이 곧 왕생의 정인이므로, 이러한 마음을 내는 즉시 왕생은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선도대사 정토종의 관점에서 봤을 때, 약간의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생멸을 거듭하는 중생의 마음은 한결같지 않아 지금 당장은 스스로 일념의 신심을 구족했다고 자부할 수 있으나, 어느 순간 역경을 만나면 충분히 그런 심경에 변화가 생길 수 있어 모든 근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도대사는 “일향전칭미타불명”, 즉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실천할 수 있는 왕생의 정인으로 삼은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진종의 일념 신심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심을 강조함으로써 사람들의 이목을 염불에 집중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일념의 신심을 갖춘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염념불사하며 염불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교리를 중시하지 않고 방법만 강구하고, 신심은 뒷전이고 지혜만 추구하는 시대에 어쩌면 진종에서 말하는 신심을 갖추는 일이야말로 일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대경》에서 정토법문은 오직 믿음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했듯이, 두 분의 사례를 통해 그 믿음을 다시 배운다.
첫댓글 걱정하지 마세요.
난 이미 왕생을 얻었잖아요……”
평생업성에 관한 절절함이 있는 글
번역해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큰언니 소연실연우님 임종전
귀에 대고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코로나 상황이고
임종실도 없어 다른분들 방해
할까 싶어 작은소리로
제가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거
알고 있지 믿고 있지?
하니까 말도 못하고 눈도 못 뜨는데도 죽어가면서도
눈은 살짝뜨는듯 턱은 살짝
흔들어 알고 있음을 표현해 주던
때가 생각납니다
자주자주 환자일때 상기 시켜준
정전스님 법문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스님 법문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제 평생업성으로
시처제연에 임종을 맞더라도
저 또한 이미 왕생을 얻었습니다.
법희와 신심 충만한
염불왕생사례 올려주셔서
감사올립니다.
정토로 통하는 길은
오직 나무아미타불!
오로지 일향전념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드리고
감사드립니다!
오직
"일향전칭미타불명"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전수전념 하옵니다!
수희찬탄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드립니다
일향전칭 미타불명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두손모아 감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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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천재지변에 기후조작까지 이제는 자연스런 일상이 되다보니 사계절 내내 상상을 초월하는 날씨로 사람이나 짐승이나 농작물이나 다들 살기 힘든 환경의 연속이 되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눈을 뜨는 자체가 숨 한모금 쉬는 자체가 스트레스지만 한가지 늘 감사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일을 당하게 된다 해도 아미타부처님의 대원력 속에서 평생업성으로 살고 있기에 늘 대안심입니다.
그리고 이런 환경에 살아야하는 전생과보를 진참회하며 모든 중생이 극락왕생하여 서로 주고 받는 원결의 사슬에서 영원히 자유로워 지길 간절히 기원드립니다.
수승한 사례담 번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100 % 공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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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스님 법문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스님 감사드립니다. 모든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왕생의 정인,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