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책 표지도 바다와 거대한 빙하 같은 폭설 이미지다.
눈. 폭설.
가장 큰 이미지는 역시 눈. 폭설.
그리고 새, 죽은 새.
그림자. 손가락 절단. 병원의 인선와 제주도의 인선. 상상인걸까 환상인걸까 어쩌면 경하인걸까.
어디가 과거고 어디가 현재인지 솔직히 모르겠다.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렴풋이 이게 맞나 싶기는 하다.
눈, 폭설.
보통 문학에선 2가지로 해석된다.
따뜻함과 순수함, 포근함. 또는 차가움과 단절.
모순된 이미지를 다 갖는다.
소통과 단절을 모두 의미하는 '문'처럼.
이 소설에서 눈은 따뜻함과 단절을 모두 의미하면서 결국 따뜻하고 부드럽게 녹으며 실체를 드러내는 소재같기도 하다.
군인.
군인과 경찰은 나라를 지킨다.
군인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며 경찰은 치안을 맡는다.
군인이 바깥을 보지 않고 내부를 바라볼 때 큰 문제가 있거나 큰 문제를 만든다.
'큰 문제'는 누군가의 판단이다.
미군정.
3년.
제주 4.3사건이 한국전쟁 중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하루는 한국군이, 하루는 북한군이 사람들을 죽였던 상황들이 떠올라서 그랬나보다.
한국 전쟁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문득 미군정 3년이 궁금해진다.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힘이 없다.
기억하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외롭다.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한다.
내가 나서진 못하더라도 응원할 줄 아는 사람 정도로는 살아야겠다.
뭐가 잘못되었던 건지,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만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살아야겠다.
44.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 있었다.
51. 뭐,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 테니까.
73.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육지 말과 다르게 활용되는 동사와 형용사의 어미들이었다. 가끔 회화 연습도 했는데, 하다 - 핸- 하멘-하잰으로 이어지는 시제 활용을 내가 틀릴 때마다 인선은 웃음 띤 얼굴로 교정해주었다.
84. 엄마가 어렸을 때 군경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때 국민학교 졸업반이던 엄마랑 열일곱 살 이모만 당숙네에 심부름을 가 있어서 그 일을 피했다고 엄마는 말했어. 다음날 소식을 들은 자매 둘이 마을로 돌아와, 오후 내내 국민학교 운동장을 헤매다녔대.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덟 살 여동생 시신으 ㄹ찾으려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반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눈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까. 이모가 차마 맨손으론 못하고 손수건으로 일일이 눈송이를 닦아내 확인을 했대. 내가 닭을 테니까 너는 잘 봐, 라고 이모가 말했다고 했어. 죽은 얼굴들을 만지는 걸 동생한테 시키지 않으려고 그랬을 텐데, 잘 보라는 그 말이 이상하게 무서워서 엄마는 이모 소맷자락을 붙잡고, 질끈 눈을 감고서 매달리다시피 걸었대. 보라고, 네가 잘 보고 얘기해주라고 이모가 말할 때마다 눈을 뜨고 억지로 봤대.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85. 그때도 지금도 어른들은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니까.
113. 갓등이 멈추자 그림자도 감쪽같이 윤곽선 안으로 되돌아왔다. 아니, 아니. 탄식하듯 낮은 소리로 아미가 갓등 위에서 말했다. 주인이 무심코 반복한 말을 배운 것 같았다.
122. 왜 작별을 한 것처럼 마음이 흔들리는가?
155. 내가 없는 그곳에 인선이 있고, 그녀가 없는 이곳에 내가 있따는 건 이상한 일이다.
180. 삐이이, 아마가 다시 울었다. 여전히 고개를 외튼 채 젖은 약콩 같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182. 새들에게 간식이 아닌 식사를 줄 때는 반드시 새장에서 먹게 해야 한다고 인선은 말했었다. 그러지 않으면 새장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게 되고, 제시간에 재울 방법이 없게 되며 결국 모든 규칙이 깨진다는 거였다. 하지만 죽은 새도 그 규칙을 지켜야 할까?
192.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그녀는 주전자에 생수를 부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제목을 묻지 않았어. 나는 대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주전자와 머그잔 두 개를 양손에 들고 걸어오며 인선이 되뇌었다.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 거야?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195. 가로등도 이웃도 없는 집에서 말이야. 눈이 내리면 고립되고 전기와 물이 끊기는 집 말이야. 밤새 팔을 휘두르며 전진해오는 나무가 있는 곳, 내 하나만 건너면 몰살되고 불탄 마을이 있는 곳 말이야.
196. 왜 나한테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한 걸까? 아프다 해도 나는 천적이 아닌데.
197. 정말 헤어진 건 아니야, 아직은.
220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225.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시국 때는 흉년에다가 젖먹이까지 딸려 있으니까, 내가 안 먹어 젖이 안 나오면 새끼가 죽을 형편이니 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먹었지요. 하지만 살 만해진 다음부터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 먹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 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230. 그 말을 막 들어신디 명치 이신 데 이디, 오목가심 이디, 무쇠 다리미가 올라앉은 것추룩 숨이 막혀서. 내가 죄지은 것도 어신디 무사 눈이 흐리곡 침이 말라신디 모르주. 몰른다곡 내보내야 하는 것을 알멍도 이상하게 대답을 하고 싶었져. 꼭 내가 그 사람을 기다렸던 것추룩. 누게가 이걸 물어봐주기만 기다리멍 십오 년을 살았던 것추룩.
236. 당혹과 호기심과 냉담함이 섞인 진행자의 태도와 객석의 어리둥절한 침묵, 진실만 말해야 하는 저주를 받은 듯 천천히 말을 이어가던 인선의 얼굴이.
262. 1948년 11월 중순부터 석 달 동안 중산간이 불타고 민간인 삼만 명이 살해된 과정을 그 오후에 읽었다.
268. 외삼촌의 편지가 당숙네로 처음 배달된 건 1950년 3월이야.
269. 다음달에 전쟁이 터졌고 편지는 더이상 오지 않았어.
272. 그해 경북 지역에서 죽은 보도연맹 가입자가 대략 만 명이야.
273. 1948년 정부가 세워지며 좌익으로 분류돼 교육 대상이 된 사람들이 가입된 그 조직에 대해 나는 알고 있었다.
286. 무릎까지 차올랐던 그 바다 아래.
쓸려간 벌판의 무덤들 아래.
318.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맹세코 노벨상 수상작가의 작품이라 읽은 건 아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인연이 닿았겠지만.
그저 우연히 책을 얻게 됐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