通訓大夫 利城縣監 贈純忠補 祚功臣資憲大夫兵曹判書鶴川君墓表
통훈대부 이성현감 증 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 학천군 묘표(김극조,1534~1591)
原文 : 1802년 壬戌譜
解釋 : 2005. 6. 30. 金順大
孫汝沃 撰(후손 여옥 지음)
公諱克祧字追遠金海人首露王之後也 高祖諱鍊成均生員曾祖諱應文祖諱漢城 贈左通禮 考諱嗣宗 贈工曺參議 妣林氏 贈淑夫人 以嘉靖甲午五月十五日生 公於靈巖西九音坪之里 第
공의 휘는 극조(克祧)이고 자(字)는 추원으로 김해인이며 수로왕의 후예이다. 고조의 휘는 련(鍊)으로 성균생원이었으며, 증조의 휘는 응문(應文)이고, 조부의 휘는 한성(漢城)이며 좌통례를 증직받으셨고, 부친의 휘는 사종(嗣宗)이고 공조참의를 증직받았으며, 모친은 임씨로서 숙부인의 증직을 받았으며, 가정 갑오(1534)년 5월 15일에 영암의 서쪽 구음평 마을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年三十一與仲兄俱登武科初調權管次除萬戶丁亥宰光陽庚寅宰利城時當鄭逆汝立伏誅李潑兄弟渾死其獄之後也
공은 31세에 가운데 형님(克禧,1532~1592)과 같이 무과에 급제하여 처음에는 조권관(?)을 지냈으며 다음에 만호에 임명되었다. 정해(1587)년 광양을 다스리고 경인(1590)년 이성(利城현감)을 다스릴 때는 당시 역적인 정여립[1]이 자살하고 이발[2]과 이혼[3]형제가 죽은 그 후이다.
[1]정여립(鄭汝立, 1546~1589). 조선 중기의 사상가.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인백(仁伯). 전주(全州)출신. 첨정 희증(希曾)의 아들이다. 그가 역모를 일으켰다는 말 때문에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가 좁혀들자 자살하고 말았다. 그의 모반사건에 관하여서는 무옥이라는 설과 모역이라는 양설로 나누어져 있다.
[2]이발(李潑, 1544~158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巖)·북산(北山). 제학 중호(仲虎)의 아들이다. 동인의 거두로서 정철(鄭澈)의 처벌문제에 강경파를 영도하여 북인의 수령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도 교분이 점점 멀어져 서인의 미움을 받았다. 1589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남을 계기로 서인들이 집권하게 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교외에서 대죄(待罪)하던 중 잡혀 두 차례 모진 고문을 받고 장살(杖殺)되었다. 그가 죽은 뒤 82세의 노모와 8세의 아들도 엄형(嚴刑)으로 죽었는데, 그 노모는 형벌이 너무 지나치다고 꾸짖으면서 끝내 역모에 관한 일을 승복하지 않았으며, 문생·노비도 모두 엄형을 가하였으나 승복하는 자가 없었다.
[3]이발(李潑)과 그의 동생 이급(李汲)이 같이 매를 맞아 죽고, 이후 귀양갔던 동생 이길(李洁)도 불려와 죽임을 당했다. 이혼(李渾)은 누구인지 확인 안됨.
公於李有聯家之義故 光陽後倅韓德脩陰欲夤緣搆陷以爲圖功發身之基卽與前都事鄭渫及蔡之穆朴藏等舞辭誣告謂公陰功李語不測於是自利城就理按之无險德脩等抵反坐律俱受刑之穆以下七人斃焉
공이 이발의 집안과 교유가 있어서, 광양에 다음의 원님으로 부임한 한덕수가 몰래 연줄을 타고 승진하고자(夤緣) 터무니없는 말로 모함하여(搆陷) 출세(發身)를 꾀하였다. 즉 이전의 도사 정설[1]과 채지목, 박장(임장?) 등이 <공을> 업신여기며 거짓으로 죄를 씌워 말하기를 ‘공이 몰래 이씨(이발)를 도와주었다.’ 고 하였으나, 이 말은 터무니없는 괘씸한 말이었다. 이때 이성현감으로서 의금부에 끌려가 죄를 추궁 당하였으나 혐의가 없었다. 한덕수 등은 반좌법[2]에 저촉되어 형벌을 받고 채지목 이하 7명[3]은 죽었다.
[1]정설(鄭渫, 1547~?); 자(字)는 원결(元潔), 본관(本貫)은 광주(光州)로서 부(父)는 정인관(鄭仁寬)이며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고조부이다. 1576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4등으로 합격하여 이후 부사를 지냈다.
[2]反坐法; 거짓으로 고자질하여 남을 벌 받게 한 사람에게 고자질을 당한 사람이 받은 벌과 같은 벌을 주던 일.
[3]7명; 채지목(蔡之穆), 임장(林藏), 박신(朴藎), 의상덕(宜尙德), 황한(黃漢), 이득춘(李得春), 이경운(李慶雲)
德脩與渫等減死流竄而不幸 公未及出獄而捐世辛卯三月十二日也 壽五十八返葬於治西五十里駐龍津上坐艮原
한덕수와 정설은 사형을 감하여 유배되었으나, 불행하게도 공은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별세한 것이 신묘(1591)년 3월 20일이었다. 나이는 58세이었고 서쪽 방향으로 50리에 있는 주룡진 위의 간좌[1] 언덕에 장사지내었다.
[1]艮坐; 2시방향, 북동쪽
後三十四年甲子以長子完參振武勳加恩三代 贈公純忠補 祚功臣資憲大夫 兵曹判書兼 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都摠管 鶴川君
이로부터 34년후 갑자(1624)년에 장남인 완(完)이 진무공신이 되어 3대를 보은하니, 공을 순충 보조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학천군에 봉하였다.
公身長九尺廣眉大頳膂力絶倫能彎弓三百斤聲如巨雷 手伸鐵鉤知於胡桃栢子之屬皆以手鑽去其殼以此鳴於一世事母林夫人以至孝聞
공은 신장이 9척(2m70cm)이고 넓은 눈썹과 <얼굴은> 아주 붉었으며, 근육 힘이 아주 강하여 300근(180kg)의 활을 휘게 할 수 있었고, 목소리는 천둥소리 같았으며, 손으로는 쇠갈고리를 펼 수 있었고, 호두(胡桃)와 잣(柏子)같은 <아주 단단한> 것을 모두 손으로 껍질을 까서 <불면> 소리가 났다. 일생에 있어서 어머니 임부인에게 극진하게 효도를 다하였다고 전해진다.
初娶靈巖張氏早世葬於家後栗洞後娶天安全氏後公十八年而卒就公墓而祔左 前後夫人之 贈並視公秩
첫째 부인은 영암장씨이나 일찍 별세하여 집 뒤쪽의 율동에 장사지내었고, 둘째 부인은 천안전씨로서 공이 돌아가신 18년후(1608년)에 별세하여 공의 묘소 왼쪽에 장사지냈다. 첫째와 둘째 부인 모두 공의 공덕으로 증직되었다.
前夫人生二男二女 男皆夭 女長適士人金浚善 次適士人金沆
첫째 부인은 2남 2녀를 낳았으나 아들은 모두 어려서 죽고 큰 따님은 선비인 김준선에게, 작은 따님은 선비인 김항에게 시집갔다.
後夫人生二男一女 長完卽封鶴城君 次女適武科僉樞徐希孝 次男宇武科府使
둘째 부인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맏이가 완(完)으로서 학성군에 봉해졌고, 다음이 따님으로서 무과에 급제하여 첨중추를 지낸 서희효에게 시집갔고, 막내가 우(宇)로서 무과에 급제하고 부사를 지냈다.
鶴城君生二男 長汝水武科海城君 次汝河忠義衛 側室生一男一女 男汝海 女適郡守柳屹然
학성군(완)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여수(汝水)로서 무과에 급제하고 해성군에 봉해졌으며, 차남은 여하(汝河)로서 충의위를 지냈다. 완의 둘째부인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여해(汝海)이고, 따님은 군수 류흘연에게 시집갔다.
府使生一男 汝沃參奉 側室生一男 汝浚武科折衝
부사(우)는 1남을 낳아 여옥(汝沃)으로 참봉을 지냈고, 우의 둘째부인은 1남 여준(汝浚)을 낳아 여준은 무과에 급제하고 절충을 지냈다.
海城君生一男一女男世器武科 鶴林君女適府使金益輝 側室生六男三女 女適折衝金衍錫 男世重武科資憲 女適羅{木+旭} 女適兵使李重信 男世興 世亮武科縣監 世鳴武科 世枰 世益
해성군(여수)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세기(世器)로서 무과에 급제하고 학림군에 봉해졌으며, 따님은 부사 김익휘에게 시집갔다. 여수의 둘째부인은 6남 3녀를 낳았는데, 첫째인 따님은 절충을 지낸 김연석에게 시집가고, 다음 아들은 세중(世重)으로 무과에 급제하고 자헌대부에 봉해졌으며, 다음 따님은 라욱에게, 다음 따님은 병사 이중신에게 시집갔고, 다음 아들은 세흥(世興)이고, 그 다음 아들은 세량(世亮)으로서 무과에 급제하고 현감을 지냈으며, 그 다음 아들인 세명(世鳴)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그다음 아들은 세평(世枰)이고, 그 다음은 세익(世益)이다.
忠義衛生二男一女 男世杓武科宣傳 女適士人崔時尙 男世樞武科府使 側室生一男一女 男世柱女適丁運長
충의위(여하)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첫째 아들은 세표(世杓)이고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지냈으며, 다음은 따님으로 선비인 최시상에게 시집가고, 다음 아들 세추(世樞)는 무과에 급제하고 부사를 지냈다. 여하의 둘째부인은 1남 1녀를 낳아 아들은 세주(世柱)이고, 따님은 정운장에게 시집갔다.
汝沃生四男二女 男世純餘皆幼
여옥(汝沃)은 4남 2녀를 낳아 첫째는 아들로서 세순(世純)이고 나머지는 전부 어리다.
學林君生二男一女 男命冑武科縣監 次命徽早死 女幼
학림군(세기)는 2남 1녀를 낳아 큰아들은 명주(命冑)로서 무과에 급제하고 현감이며, 둘째아들은 명휘(命徽)이나 일찍 죽었고 딸은 아직 어리다.
宣傳生二男 長命勳 次命熙 武科府使 府使生二男二女 女適進士尹萬原 男命龜通德郞 次命龍武科郡守 女適士人金治節
선전관(세표)는 2남을 낳아 명훈(命勳)과 명희(命熙)인데, 명희는 무과에 급제하고 부사를 지냈다. 부사(세추)는 2남 2녀인데 첫째는 따님으로 진사 윤만원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아들인 명구(命龜)이고 통덕랑을 지냈고, 다음은 명룡(命龍)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고, 다음이 따님으로 선비 김치절에게 시집갔다.
內外諸孫 凡二十餘人 先祖事行與官歷 贈秩謹摭其卓然者以示遠後焉
내외의 여러 손자들은 20여명으로 선조의 행적과 벼슬 및 공덕 등이 삼가 본보기가 되어 그 탁월함이 먼 후세까지도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