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무엘하 강해(42) 2023. 10. 4
아히도벨과 후새의 모략 대결
삼하17:1-14
<아히도벨의 첫 번째 모략>
예루살렘 성읍에 무혈입성한 압살롬은 가장 믿을만한 모사였던 아히도벨에게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구합니다. 이때 아히도벨이 내린 첫 번째 모략은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을 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윗과 압살롬의 화해를 막고, 반역에 동참한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략은 이방 나라들의 관례일 뿐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행해서는 안 될 범죄였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아버지의 처와 동침하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레18:8, 20:11).
이로써 우리는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편에 서는 순간 이미 하나님을 떠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기에, 그는 이방 나라에서 관행적으로 행해지던 계략을 지혜랍시고 내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압살롬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윗 왕의 후궁들을 욕보입니다.
이로써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아히도벨의 두 번째 모략>
압살롬의 신뢰를 얻었다고 생각한 아히도벨은 두 번째 모략을 제안합니다.
1~4절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사람 만 이천 명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2 그가 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에 기습하여 그를 무섭게 하면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 죽이고/ 3 모든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게 하리니 모든 사람이 돌아오기는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하니/ 4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
아히도벨의 작전은 간단명료합니다. 이 일은 굳이 압살롬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서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이 출전하여 그 아버지를 죽이면,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도덕적인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을 죽인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만 이천 명을 뽑을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제안합니다. 그러면 오늘 밤에 당장 다윗을 뒤쫓아 가서, 그가 지쳐서 힘이 없을 때에, 급습하여서 두려움을 심으면,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달아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에 자신이 다윗 왕만을 쳐서 죽이면 끝난다고 합니다. 왕만 죽이면, 다윗을 따랐던 모든 백성이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리라는 것입니다.
장기를 두실 줄 아시지요. 장기의 규칙은 간단합니다. 어떤 기물을 쓰든지 상대방의 왕을 잡으면 끝이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스라엘의 가장 지혜로운 모사답게 ‘최고의 모략’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성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다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타이밍을 잡아낸 아히도벨은 역시 최고의 전략가임이 틀림없습니다.
아히도벨의 말을 듣고 압살롬과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도 이 말을 옳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그의 전략은 큰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전략은 하나님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서 있습니다. 그의 지혜가 ‘사단’에게 이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도 나름대로 치밀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을 찾아가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은 삼십을 주겠다고 하니, 그날부터 어떻게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줄까 궁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대제사장이 보낸 무리에게 이렇게 전략을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마26:48). 그리고는 예수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잡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좋은 전략(생각)’이란 기준이 분명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전략이라도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에 사용되면 그것은 ‘좋은 전략’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전략이 ‘좋은 전략’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의의 최후 승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사람이 최종적으로 이긴다는 믿음으로 무장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오늘 본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에’(2) 사단의 기습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아히도벨이 오늘 당장 다윗을 치자고 한 것은 다윗이 곤하고 힘이 빠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사단의 밥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 광야를 행진할 때 아말렉 족속이 뒤에 처진 약한 자들을 공격했던 것일 기억해야 합니다(신25:18).
개도 두려워 도망치는 사람을 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영적으로 힘이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항상 깨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전주갑주를 입고,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둘째,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곧 나와 공동체 전체를 위한 일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 한 사람만 죽이면 그를 따르던 모든 백성을 돌이킬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지도자는 그가 이끄는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리하여 만일 지도자가 잘못되면 그 공동체는 큰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탄은 교회를 무너뜨리기 전에 먼저 목회자를 무너뜨립니다.
행12:5 초대교회 당시 ‘베드로를 체포하여 구금’. 그러자 하나님은 초대교회를 지키시고자 특단의 조치를 취하심. 기적을 베푸셔서 그를 감옥에서 빼어내심.
<후새를 부르는 압살롬>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전략을 듣고 그의 말을 옳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딴생각이 들었습니다.
5절 “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이제 그의 말도 듣자 하니라.”
아렉 사람 후새도 불러다가, 그의 말도 들어보자는 것입니다.
이런 암살롬의 결정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16:23에서 언급했듯이 아히도벨의 말은 여호와께 물어 받은 것처럼 절대적으로 옳은 견해인데, 자신의 편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후새의 견해를 듣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일이 엇나가기 시작합니다. 후에 이렇게 된 이유를 하나님께서 압살롬을 심판하기 위해서 하신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후새가 압살롬에게 오니, 압살롬은 그에게, 아히도벨의 모략을 말해주고서, 그 말대로 해야 할지를 묻습니다.
6~10절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매 압살롬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히도벨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아니하거든 너는 말하라 하니/ 7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번에는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아니하니이다 하고/ 8 또 후새가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라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9 지금 그가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하기를 압살롬을 따르는 자 가운데에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10 비록 그가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용사의 아들일지라도 낙심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아버지는 영웅이요 그의 추종자들도 용사인 줄 앎이니이다.”
여러분, 후새가 누구입니까? 다윗을 부탁을 받고 아히도벨의 전략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압살롬에게 거짓 충성 맹세하고 잠입한 사람입니다. 쉬운 말로 ‘간첩’이었습니다. 후새는 아히도벨의 계략을 듣고 식은땀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하면 다윗 왕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후새에게 지혜를 주었습니다. 후새는 압살롬에게 아히도벨이 베푼 모략이 이번에는 ‘좋지 않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첫째, 왕의 부친과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들이라는 것입니다(8). 지금은 새끼를 빼앗긴 들녘의 곰처럼, 무섭게 화가 나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압살롬은 소름이 끼쳤을 것입니다.
둘째, 다윗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이라 밤에는 백성들과 함께 잠을 자지 않고, 어떤 굴속이나 다른 어떤 곳에 숨어 있을 것이니 다윗을 죽일 수 없다고 합니다(8~9). 지금 쫓아가면 다윗이 판 함정에 빠질 것이라고 합니다. 후새는 함정이 없는데 함정이 있다고 합니다.
셋째, 우리의 군인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매복에 걸려 죽기라도 하면, 압살롬을 따르는 군인들이 지고 말았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질 것이라고 합니다(9). 그러면 사자처럼 담력이 센 용사의 아들일지라도 낙심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다윗과 다윗의 부하들이 영웅이요 용사인 것은 온 이스라엘이 다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10).
<후새의 모략>
후새는 새로운 모략을 제시합니다.
11~13 “나는 이렇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당신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12 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그를 기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우리가 그의 위에 덮여 그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13 또 만일 그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작은 돌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게 할 것이니이다 하매.”
후새의 전략은 한 마디로 압살롬의 허영심(공명심과 명예욕, 그리고 다윗에 대한 경쟁심)을 자극하는 전략이었습니다.
후새는 이전부터 압살롬이 소위 ‘왕자병’, 즉 허영심이 많은 것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후새는 압살롬의 왕자병을 부채채질합니다.
먼저 후새는 압살롬에게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당신께로 모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단부터 브엘세바까지”는 이스라엘 전역을 가리키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최북부의 성읍이고, 브엘세바는 최남단의 성읍입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다 모으라고 합니다. 당신이 부르면 다 모일 것이라고 부추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라고 압살롬의 마음을 띄워줍니다.
그러나 후새의 속마음은 다윗에게 피할 시간을 보장해 주기 위한 계략입니다. 이스라엘 전역에서 군대를 모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압살롬은, 후새의 속마음을 간파하지 못한 채 그의 말에 마음이 흥분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히 전장에 나가라”고 권면합니다. 그 모든 군대를 모으고, 다윗의 군대를 기습하여 마치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그들 위에 덮여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말라고 합니다. 또 그가 어떤 성읍으로 들어가면, 온 이스라엘이 굵은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읍을 동여매어, 계곡 아래로 끌어내려서, 성이 서 있던 언덕에 돌멩이 하나도 찾아볼 수 없게 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비유적인 표현을 통해 다윗의 군대를 전멸시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후새의 속마음은 압살롬을 전장으로 유인해서 그곳에서 죽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압살롬은 이를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옛적에 그의 부친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며(삼상18:6~7), 자신도 이 기회에 다윗보다 더 큰 공을 세워보자는 경쟁심과 공명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헛된 영광을 좇아 허황된 공명심과 과시욕에 빠지면 오늘 본문의 압살롬과 같이 패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명예욕과 과시욕이 있습니다. 즉 누구나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타인의 박수를 받고 싶어 하며, 높은 자리에 올라 우쭐대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헛된 욕망은 인간을 마침내는 파멸의 길로 몰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두려운 것은 사단은 인간의 이러한 속성을 알고 이를 교묘히 이용하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도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림으로써 자신을 과시해 보라고 유혹한 바 있습니다(마4:5~6).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절제의 은사를 사모하여야 할 것입니다.
갈5:22~26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후새의 계략을 택하는 압살롬 –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
압살롬은 누구의 전략을 택했을까요?
14절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후새의 모략에 마음을 빼앗긴 압살롬은 후새의 모략이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더 좋다고 찬성하였습니다. 효율적이고 소박한 계획보다는 과장되고 화려한 계획, 곧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계략이 더 좋아 보인 것입니다.
아마도 압살롬이 후새의 편을 들자 주변에 있던 신하들은 아부하는 차원에서 동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마치면서 사무엘서의 저자는 중요한 평가를 내립니다. '여호와께서...명령(작정)하셨음이더라.' 아히도벨의 모략이 파기되고, 후새의 모략이 채택되는 결정적인 사태의 변화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였음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두 가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후새를 들어 아히도벨의 모략이 막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아히도벨은 이스라엘의 최고의 전략가입니다. 그러나 후새는 ‘다윗의 친구’입니다.
대상27:33 “아히도벨은 왕의 모사가 되었고 아렉사람 후새는 왕의 벗이 되었고.”
그러므로 당연히 아히도벨의 계략이 더 지혜로운 계략입니다.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략대로 했다면, 다윗이 어찌 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위기에 하나님은 후새를 보내셔서 그의 계략을 무마시켜 주신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기 위해 마른 막대기와 같은 80세 노인 모세를 들어 쓰셨습니다(행7:23~36). 그를 들어 애굽의 바로를 부끄럽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교육받지 못한 자들을 들어(행4:13) 십자가의 도를 선포함으로써 마음이 찔린 백성들로 하여금 주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행2:37).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전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둘째, 계획은 사람이 세울지라도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왕이 되기 위해 5년간이나 위선을 떨어가며 노력하였습니다. 치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백성들의 호의를 이끌어냈고, 최고의 모략가인 아히도벨도 얻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반란에 성공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하나님이 그를 막으셨습니다. 그를 다윗의 범죄를 징계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을 뿐 그를 택하여 당신의 사람으로 쓰시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바로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하는 것은 사람인 것 같지만 실은 그 모든 배후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지만, 분명 하나님은 다윗은 돕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역시, 여러분의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여러분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여러분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은 중지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날마다 도우시는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며, 험한 풍파가 몰아치는 세상에서 담대히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