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 빨치산의 역사와 투쟁
지리산이 여느 산과 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지리산의 그 진했던 피의 역사 때문이다. 현대사의 분수령 한국전쟁에서도 가장 비주류적 아픔의 현장이 바로 지리산이었다.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 민중들에게 어떻게 아로새겨졌던가를 가장 처절하게 말해주는 곳이 지리산이다. 녹색순례를 맞이하여 그 현장의 주인공들이었던 빨치산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빨치산은 빨갱이 혹은 공비로 알려지기도 했고 공화국의 영웅이나 인민의 전사로 알려지기도 했다. 극과 극으로 이해되고 표현되었다. 빨치산의 어원은 ‘파르티잔’이라는 러시아어에서 유래되었다. 이 표현이 한반도로 유입된 것은 일제를 거치면서 러시아를 타고 넘어왔다. 실제 스탈린그라드로 표현되는 2차대전 때 독일에 맞서 싸우던 소비에트의 노동자와 농민 등이 소비에트정규군과는 또 다른 세를 형성하면서 전투를 벌였다. 러시아에서는 이들을 항독빨치산으로 불렀다. 이것이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등의 항일투쟁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유입되어 해방전후 한반도로 넘어왔다. 빨치산이라는 표현은 어원이나 정서에서 계급투쟁이나 민중투쟁 진영의 관점에서 사용되었다. 실제로 한국전쟁 전후 군경에서는 빨치산을 공비 혹은 야산대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최초의 빨치산 투쟁은 언제부터인지 살펴보자. 일제의 식민지가 광폭한 탄압과 수탈로 점철되며 극으로 향하던 1930년대부터 국내의 독립투사들은 계몽이나 실력증진이라는 개량적 형태의 운동을 접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만주와 연해주로 진출했다. 특히 일제의 극심한 착취에 도저히 살기 어려웠던 많은 민중들이 국내를 등지고 만주와 연해주로 진출했다. 이런 토대를 발판으로 독립운동은 본격적인 무장운동으로 넘어갔고 그 과정에서 중국과 러시아 쪽과 연계되면서 운동의 방식은 무장투쟁이고 이념은 사회주의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그 중심의 활동가들이 빨치산으로 불려졌다. 북은 내외 다 인정하는 것처럼 30년대 중후반부터 다양한 형태의 항일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 보천보 전투로 상징되는 김일성주석을 중심으로 한 그룹을 비롯하여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을 비롯하여 중국 쪽에서 투쟁했던 그룹 등이 만주부터 연해주까지 광범위하게 다양한 규모를 유지하며 10여년 이상 해방까지 투쟁했다. 특히 이들 중 팔로군이나 조선의용군에서 항일투쟁으로 생사를 수없이 겪으며 노련해진 투사들이 한국전쟁 때 인민군으로 참전하여 최후에는 지리산의 빨치산으로 눈밭에 혹은 조릿대 군락 속에 이름없이 거름이 되어갔다.
남한에서 최초의 자생적 빨치산 투쟁은 일제 말기에 시작되었다. 1943년에서 44년 사이 경남 함양군 백전면 일대의 괘관산이 효시다. 함양을 중심으로 서부 경남일대에서 징용과 징병을 피하려던 장정들 10여명이 주재소를 습격하여 소총 등의 무기를 탈취하여 괘관산으로 숨어 들어가서 해방까지 저항했다. 괘관산은 백두대간 백운산의 동쪽에 위치한 산으로 지리산 주능선에서도 뚜렷하게 관찰된다. 반야봉-세석-천왕봉 등의 주요 봉우리에서 보면 덕유산 줄기 전에 뚜렷하게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는 세 개의 산 덩어리가 보인다. 가운데가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지나가는 백운산이고 왼쪽인 서쪽이 호남정맥의 장안산이며, 오른쪽인 동쪽이 괘관산이다. 남한 최초의 빨치산투쟁과 그 현장인 괘관산은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 투쟁을 이끌었던 장본인이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진 남도부(본명:하준수)였다. 하준수는 1980년 최초의 지리산빨치산을 다룬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도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1953년 대구의 팔공산에서 체포되어 방첩대(현 기무사)에 6개월 이상 조사받고 끝내는 사형 되었다.
남한 빨치산은 크게 세 곳에서 전개되었다. 지리산, 태백산, 오대산 등으로 이곳은 모두 백두대간이다. 태백산은 46년 대구 10월 항쟁 이후 수배당했던 학생과 노동자 등이 경북 청송, 영양, 봉화 등으로 산지로 숨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야산대를 형성하고 이것이 빨치산 부대로 발전했다. 지금의 태백산을 중심으로 태백, 봉화, 정선, 영월, 울진 등을 무대로 한국전쟁 때까지 활동을 전개했다. 태백산빨치산과 관련해서는 현재 알려진 사실보다 역사적 기록은 풍부하다. 당시 미군사고문단의 미국 쪽 정보 보고나 경찰정보 보고 등을 찾아보면 광범위한 기록이 나온다. 남한 빨치산 내에서도 태백산전구는 광범위하게 언급되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묻어갔던 기록으로 되었다. 오대산은 빨치산부대 중 정예들이 남파되어 활동한 공간이었다. 46년부터 50년 초반까지 남로당이 불법화되면서 월북했던 남로당 출신들이 강동정치학원과 금강정치학원 등에서 중단기 코스의 집중적인 유격전과 정치학습을 받고 50-100, 100-200명 단위로 남파되어 오대산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을 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당시의 남과 북이 대치하던 삼팔선은 지금의 오대산 북쪽 지역인 홍천군 내면 일대였다. 그래서 오대산은 삼팔선과 바로 연결된 곳이었다. 이런 이유로 오대산에 집중적으로 남파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대산으로 파견된 부대는 대부분 괴멸했다. 침투초기에 부대의 주력이 토벌군의 매복 걸려서 제대로 된 활동도 전개하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이런 사실 들이 전쟁 후에 북에서는 박헌영의 미제스파이 사건 때 주된 증거로 채택되기도 했다.
빨치산의 대명사인 지리산 빨치산은 역사적으로 크게 세 번의 분기점이 있다. 첫 번째 여순인민항쟁, 혹은 여순병란이다. 1948년 10월 제주도 4.3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여수항에서 출동을 대기 중이던 국군 14연대의 하급장교들과 사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수, 순천, 구례, 곡성 등을 휘저으며 지리산으로 들어간 사건이다. 이 것이 본격적인 지리산 빨치산활동의 출발이다. 이때 산으로 들어온 빨치산들 사이에서는 구빨치라 불렀다. 빨치산 중의 빨치산, 전설의 빨치산 들이 바로 구빨치들이었다. 실제 한국전쟁이 발발한 50년 6월까지 살아남았던 빨치산은 200-300명이 안된다고 대부분의 활동에 관여했던 사람들은 증언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50명 내외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두 번째의 분수령은 한국전쟁이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라도와 경상도의 인민위원회의 지지자들과 인민군들이 퇴로가 막혀 지리산의 모여들어 대규모의 빨치산 부대가 형성되었다. 이때 입산한 사람들은 신빨치라 부른다.
세 번째는 지리산빨치산의 최대 분수령인 대성골전투다. 1952년 1월 17일 지리산 천왕봉, 촛대봉 일대로 몰려든 빨치산은 토벌군인 국군 기갑연대와 26연대의 포위에 서쪽으로 이동하다가 죽음의 대성골 한가운데로 걸려든다. 막다른 골목길에 몰린 빨치산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필사적인 돌격을 감행한다. 그리고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야간 전투로까지 이어진다. 박격포와 대포가 비오듯 쏟아지고 미군기들이 드럼통과 네이팜탄을 수없이 퍼 부었다. 지리산에서 국군 토벌작전이 시작된 이래 최대규모의 전투가 대성골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서 국군의 집계로 사살 3백명, 포로 2백 51명이나 되어 대성골에 몰려있던 적세의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었다. 이로써 남부군 직속 81사단과 92사단, 그리고 경남도당 57사단은 크나큰 피해를 보게 된다. 지리산빨치산의 주력인 경남도당이 거덜 난 것이다. 대성골 전투의 피해 숫자는 증언자마다 차이가 있다. 하지만 국군의 집계와는 달리 더 많은 희생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대성골에서는 죽은 유골이 수십 구씩 확인되기 때문이다.
지리산빨치산에는 여러 걸출한 인물들이 있다. 보통 언론이나 문학작품을 통해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이현상이다. 하지만 이외에도 김지회, 박종하, 박영발, 방준표, 김선우, 김달삼, 남도부 등이 있다. 김지회에는 초기 빨치산의 대표적 인물로 50년 봄 지리산 달궁마을의 주막집에서 막걸리 서너 잔을 얻어 마시고 동료 10여명과 깊은 잠을 자던 중 주모의 밀고로 토벌대에게 포위되어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안타까운 사연으로는 당시 살아남았던 동료 중에는 김지회의 애인이자 동료였던 조경순이 있다. 그는 전남도립 병원 간호사 출신으로 김지회의 부대에 합류했다. 조경순은 광주군사법정에서 전향하면 살려준다는 권유도 뿌리치고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김지회의 길을 따라서 조국해방을 외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지리산 빨치산 사이에 가장 용맹한 투사라면 박종하가 으뜸이다. 전남 구례군당 소속의 전사로 시작된 박종하는 빨치산이 되기 전 구례 일대에서 주먹이 세고 남아답다 하여 동네 건달도 우러르던 인물이었다. 일제 때부터 그의 주먹 이력은 지리산 자락의 구례, 곡성에서 유명했다. 당시의 동료나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전투에서 박종하는 항상 총탄이 쏟아져도 제일 먼저 일어나 앞장서서 적을 제압했다고 한다. 그래서 동료들도 그와 함께 하면 겁없는 빨치산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50년 겨울 지리산에서 어이없는 총탄에 사라졌다.
지리산 빨치산에는 전설의 쌍두마차 박영발과 방준표가 있다. 박영발은 전남도당 위원장으로 이현상 숙청에 앞장서기도 했다. 54년 1월 중순 뱀사골 비트에서 35연대 수색대에 포위돼 권총으로 자결했다. 경북 봉화의 빈농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토목 노동자로 해방 후 전평(노동조합 전국평의회) 토건 노조위원장을 지냈다. 47년 월북해 모스크바 공산대학 6개월 특별 과정을 이수하고 전쟁이 나자 전남 도당 위원장으로 내려왔다. 도당 위원장 직책만 맡고 유격 사령관 자리는 그대로 부위원장이었던 김선우에게 맡겨 두었다. 체력은 약했지만 정신력은 대단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방준표는 전북 도당 위원장으로 54년 1월 31일 남덕유산의 아지트에서 죽음을 맞았다. 경남 거제 태생인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한때 교직에도 있었다. 46년 대구 철도 파업에 연류되어 수배를 받고 월북해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유학했었다. 전쟁이 나자 전북 도당 위원장으로 임명돼 내려왔고 전북 도당 유격사령관을 겸해 가장 세가 강했던 전북 유격대를 이끌었다. 53년 7월 북한 중앙당으로부터 파견된 연락원 5명을 장악하고 이현상 숙청(평당원 강등)에 앞장섰던 그는 토벌대에 포위되자 끝까지 저항하다 죽음을 맞았다.
김선우는 구빨치 출신으로 전남 도당 유격대를 지휘했다. 54년 2월 27일 광양 백운산 아지트를 습격받자 수류탄으로 자결했다. 일제 때부터 지하 운동을 했던 그는 전남도 유격사령관을 맡아 백아산과 백운산을 오가며 빨치산들을 지휘했는데 지식인이었던 그는 역사, 이론서를 늘 탐독했던 것으로 알려졌고 그의 아지트에도 수북히 쌓인 책들이 발견됐다.
제주 4.3항쟁의 핵심인 김달삼은 48년 월북한 후 북한에서 유격전 교육을 받은 정예대원을 이끌고 남파한다.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남하하여 태백산유격전구에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한다. 이들은 경북 영양군 일월산 일대에서 지역의 빨치산들을 규합하고 경주 북방 보현산을 기점으로 [동해여단]이라 불리며 활발한 유격전을 벌인다. 이들이 인민유격대 제3병단으로 이현상의 인민유격대 제2병단과 함께 끈질기게 활동을 한다. 이 과정에서 김달삼은 50년 봄 태백산지구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지리산 빨치산 투쟁은 53년 정전협정 전후에 이미 투쟁의 의미는 사라진 역사투쟁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55년 4월1일 국군은 지리산의 입산 통제 조치를 해제됐다. 당시까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두대간과 금남정맥 등을 떠돌며 산짐승 같은 생활을 하던 빨치산 들이 수십 명가량 존재했다. 56년 12월 31일에도 43명이 산간을 떠도는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이들은 전의를 상실한 그저 생존을 위해 산은 숨어 다닌 정도였다. 그러다가 63년 11월 12일, 지리산 기슭인 산청군 삼장면 상내원리에서 오랫동안 경찰의 수배를 받아 온 지리산의 마지막 빨치산인 이홍이(李洪伊)이 사살되고 정순덕은 생포되었다. 그 이후 지리산의 빨치산은 더 이상 확인되지 않았다. 지리산은 빨치산은 우리 현대사가 낳은 최대 비극인 한국전쟁에서 조차 잊어졌던 이들이다. 역사는 아직 이들이 왜 산으로 갖는지 아직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다. 기다림에 지쳐 산으로 갔던 이들의 아픔과 고난을 후세들은 화해와 공존의 역사에서 새로 써야 할 것이다.
출처 - http://pilgrim.greenkorea.org/zb/view.php?id=pilgrim_notice_2006&no=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