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소라는 미덕을 실천하고자 하는 나름 미니멀리스트인 내가 두 냥이와 함께 살면서 8년 동안 지른 가장 큰 소비는 대형 캣타워였다. 싼 가격의 캣타워를 몇 차례 겪은 후, 디자인도 성능도 실망스러웠기에 새집으로 이사할 때 원목으로 만든 보기 좋고 튼튼한 고가의 캣타워를 지른 것이다. 과하다... 가족들이 혀를 찼지만, 그런 거창한 캣타워는 고양이 카페나 보호소에서나 필요하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지만... 어쩌겠는가 눈에 콩깍지가 씌였는걸. 그 땐 별도 달도 따다 줄 만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시기였다. 비싼 덕분인지 집 안의 인테리어도 해하지 않고 성능도 변함없이 잘 사용하고 있다.
그 후 고양이 장난감도 별 의미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선 먹거리와 고양이 모래 외엔 큰 지출은 없었다. 뚜껑과 문이 있는 파란 고양이 화장실도 8년간 별다른 문제 없이 두냥이가 함께 잘 사용해주었다.
그러다 갑자기,
중년... 우리 모두 중년이다. 나도 두냥이도...
절약해서 살면 뭐하나 죽어서 싸 갈 것도 아닌데... 밑도 끝도 없이 그런 맘이 들 때, 평소 맘에 두었지만 주저하던 고양이 물품을 검색한다. 나중에, 나중에 밀어닥칠 후회가 두렵다 결심한다.
큰 지름 하나. 캣휠.
땅꼬가 뚱냥이라니..
두 냥이와 함께 제주도 한 달살이 중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뚱냥이라는 소리. 장군이가 뚱냥이인 건 알고 있지만 어여쁜 땅꼬가... 땅꼬의 미모에 자부심을 느끼던 팔불출 집사에게는 꽤나 충격적인 평가였다. 그러고 보니... 꽤나 통통해졌구나.
호기심 천국인 땅꼬에게도 권태라는 게 찾아올 나이다. 큰맘 먹고 특대형 정품 캣 휠을 들였다. 산책하는 땅꼬와 달리 완전 집냥이인 장군이의 운동 부족도 늘 마음에 걸렸었다.
진취적이고 영리한 땅꼬는 캣휠 타는 고양이 유투브 영상을 보고 난 후 즉각 캣휠에 올라타서 방법을 터득해버렸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땅꼬가 신통방통하고 대견해서 트릿 간식으로 보상도 하고 최애 장난감 비닐을 흔들어 흥을 돋우기도 했다.
늦은 밤, 트릿이 먹고 싶을 때면 땅꼬는 캣휠에 올라타서 “애옹~~”나를 부른다. 보라는 것이다. 눈빛 가득 자랑스러움이 넘쳐난다. 이럴 땐 응원을 보내야 한다. “땅꼬야, 씽-씽 씽-씽 해. 잘 한다 땅꼬, 우리 땅꼬 최고네!!” 빨라지는 박수 소리를 따라 쌩쌩 캣휠도 바삐 돌아간다. 그렇게 한바탕 돌리고 난 후 ‘이제 됐지?’ 나를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는 땅꼬. 간식을 꺼낼 기미가 안 보이면 또 달린다. 이렇게 몇 차례를 타고 나면 어쩌겠는가? 보상을 줘야지. 이젠 내가 보지 않아도 한밤중에 캣휠 돌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건 예상한 결과다. 자신을 위한 물건의 쓰임을 반드시 찾아내 나를 흡족하게하는 영리한 땅꼬니까...
하지만 소심하고 겁많은 운동 부족 장군이는 흔들리는 캣휠의 느낌을 질색한다. 트릿을 놓아두면 마지못해 한 발 딛긴 하지만 곧 포기한다. 먹보 장군이지만 트릿에 대한 유혹보다 흔들거리는 캣휠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것이다. 좀 천천히 접근했어야 했나 아쉬움도 남는다. 그래도 땅꼬를 모방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지만 이젠 그런 장군이를 그냥 인정하고 포기하는 법도 배웠다. 니 좋을 대로 해라. 예상 못한 바도 아니다.
캣휠에 대한 기대는 반밖에 채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후회는 남지 않겠지. 추운 겨울 산책이 힘들어질 때 요긴하게 쓰일 것이라 위안해 본다. 나도 러닝 머신 하나 들일까?
다음으로 모래 화장실.
거대 고양이 장군이를 위해 특대형으로 뚜껑 없는 모래 화장실을 구입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했다. 화장실이 바뀌고 나서부터 땅꼬의 맛동산이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다. 장군이와 땅꼬의 맛동산 사이즈는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안 그래도 가늘고 토끼 똥 같았던 땅꼬의 맛동산. 가을을 맞아서 아침저녁으로 산책에 열성을 보이는 게 혹시 야외배변 때문인 건 아닐까 걱정이 시작됐다. 최근 늘어난 땅꼬의 하악질도 맘에 걸렸다. 변비구나. 이번 지름은 부작용이 심했다. 세척한 후 다용도실에서 보송보송 말라가던 파란 모래 화장실이 보름만에 복권되었다.
그래서 다음 지름은 고양이 유산균.
변비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 땅꼬의 짜증에는 이유가 있었다. 고양이 유산균을 구입해서 습식사료에 섞어 먹였다. 다음날 미약하지만 땅꼬의 맛동산이 돌아왔다. 또 다음날 아침 유난히 컨디션이 좋아보이는 생글거리는 땅꼬의 미소가 눈을 뜬 나를 맞았다. 혹시나 하고 확인해보니 꽤 큼직하고 굵은 맛동산을 수확했다. 계속 이렇게만... 시큼한 유산균 맛 때문에 저항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깨작깨작 삼키니 점차 나아지길.
매사에 진취적인 사람은 없다. 누구나 어떤 면에서는 예민하고 어떤 면에서는 대범하다. 고양이들도 마친가지다. 소심하고 겁많은 장군이는 의외로 대범한 구석이 있고 진취적이고 영리한 땅꼬도 의외로 예민한 구석이 있다. 성격 상의 문제...아니, 어쩌면 노화현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요즘 땅꼬가 부쩍 피곤해한다.
어릴 적엔 너무 잠을 자지 않아 나를 걱정시켰던 땅꼬. 조증 고양이! 주체할 수 없는 활기와 호기심으로 늘 깨어있고 싶어 했던 아이가 늦은 밤 어두운 서재, 내 의자를 차지하고 웅크려 있는 모습을 보면 형언할 수 없는 연민에 사로잡힌다. 무언가가 변했다. 늙어가는구나. 곁에 앉은 나를 응대하느라 밀어 올린 무거운 눈꺼풀, 충혈된 눈으로 졸음과 싸우면서도 내 손을 잡아채 할짝할짝 핥아주는 땅꼬가 오늘밤 유난히 부스스해 보인다. 고단한 땅꼬. 그럼에도 어린 시절과 변함없는 하루의 일과를 꼬박꼬박 수행하고 있는 너. 이러다 하루아침에 밀어닥칠 무기력... 너도 그럴까?
이젠 영양제를 사야하나?
조만간 건강검진을 받아야 할까?
지를 결심을 고민하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