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을 보내며
바로 엊그제 모심기를 한 것 같았는데 벌써 벼는 베어 나갔다. 그 자리에 새싹이 제법 자라고 있다. 오는 겨울에 대해 반항하는 것일까. 아니면 지극히 자연적인 것을 너무도 빨리 가버리는 세월에 대한 나만의 불만을 부여하고 있음일까. 아무튼 내가 담아두고 그리워하는 가을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만큼 자연의 변화와 세상의 변화에 무디어 졌다.
어제의 발전된 모습도 오늘에는 과거에 치부될 정도로 그 변화의 속도는 참으로 가늠하기 힘든데, 스스로 변화를 싫어했고, 귀찮아했으며, 두렵기까지 했었기에 지금의 나다. 살아남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항상 ‘변화’해야 하는데 애써 피해버렸던 것이다. 당장 무언가를 준비해야 하는데 잡히는 것도 없고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인지 망설이다가 저물어 가는 가을 논에서 내 모습을 찾는다. 급변하는 시대의 끝만 쫓아가려는 나의 모습! 이러다 뒤쳐지는 건 아닌 것인지 항상 불안해왔던 생활, 그리고 현실에 안주했던 나약함에 약간의 울분도 느낀다.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지금 이 순간도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라는 변화의 지속성을 강조했던 한 석학의 말이 떠오른다.
변화해야 한단다. 세상이 바뀌고 있단다. 디지털이란다. 변화하지 않으면 죽음이란다. 혁명적인 기술적 발전은 이미 우리의 상상과 인식을 초월하고 있으니 정말 이제 뛰지 않는다면 단지 그 이유만으로 이미 낙오자로 남는 단다. 그러니 정말 변화해야 한단다.
그렇다면 정말 내가 변화해야 할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내가 살고 싶어 하는 세상은 어떤 것이며, 그 세상을 위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행동해야 되는 것일까? 아니다! 너무 쉽게 물질만능으로 세상이 뒤범벅되고 있다. 아니 변화되어야 할 것들까지도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것을 지키려함은 마치 보수라 몰아 부치며 이 시대의 변화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니, 내가 생각해도 한심 그 자체였다.
개구리는 민감하면서도 둔감하다고 한다. 23도 전후이면 언제까지라도 참고 가만히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10도 높은 따뜻한 물로 갑자기 옮기면 놀래서 뛰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1도씩 시간을 맞추어서 온도를 높여 가면 개구리는 익을 때까지 가만히 있단다.
그렇다면 난 변화해야 할 것과 변화하지 않아야 할 것 두 가지에 둔감하기 짝이 없었던 것일까. 지금 이 시대 정말 필요한 것은 변화가 아니라 변화하지 않으려는, 내가 믿고 그리는 그 세상, 아이가 엄마를 믿듯이 믿음의 세상, 채우기 급급하기보다는 콩 한 조각도 나누는 그 옛날의 삶이 면면히 흐르도록 말이다.
변화하길 원한다면 변화하지 않아야 하는 나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그리고 절대 변화하지 않은 나만의 변화의 이유를 찾아보자. 그게 변화의 시작이며, 변화의 끝이니까.
등산로에서
방림동 동화여고 뒷산에서부터 진월중학교 뒷산에 이르는 등산로가 있어 방학때면 어김없이 나의 건강로다. 꽤 많은 등산객이 오르내린다. 그런데 주위의 소나무보다 유난히도 유풍 당당하게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만약에 저 놈이 어느 고관댁 정원에 있다면 억은 쉽게 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나칠 때마다 하곤 했었다.
지난 겨울 폭설이 왔을 때다. 소나무마다 한 짐의 눈덩이를 이고도 끄떡없이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나무만 눈을 이기지 못하고 가지가 뚝 부러져 어느 소나무보다 보기 흉하게 서 있지 않는가. 참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서 왜 그렇게 되었을까를 잠시 머물러 보았다. 저 부러진 소나무를 보고 오가는 이들은 어떤 생각들을 품었고, 어떤 말을 내뱉었을까?
대부분은 그저 그러느니 하고 아무 관심도 나타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냥 지나치는 말로 참 아깝다고 한 마디 내 뱉고 가는 이도 있겠고, 그 소나무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던 나를 포함한 이들은 못내 안타까움을 표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소나무만 왜 눈을 이기지 못하였을까. 옆에 있는 소나무보다 훨씬 굵고 잎도 튼튼하여 윤기가 자르르 흘렀었는데 말이다. 어쩌다 자리가 좋아 땅속의 풍부한 거름도 햇빛도 독차지 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혼자 잘랐다고 너무 뻐긴 것은 아닐까. 주위의 소나무는 서로 부둥켜 앉고 자랐기에 그 정도의 눈덩이는 맞들어 거뜬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저 색다른 음식이 마련되면 불러들여 먹이는 따뜻한 우리 이웃, 평생에 집 한 채 사서 다리 쭉 뻗고 자보는 것이 소원이고, 점심 한 끼로 연명하는 노숙자가 있는가 하면, 조상 잘 두어 또는 투기 한 번 잘해 수십억 하는 자기 아파트가 어느 곳에 있는지 조차 모르고 강아지의 먹이며 병원비로 수십만원을 아깝지 않게 지출하는 우리의 이웃도 많이 늘고 있지 않는가. 내 돈 내가 벌어 쓴다는데 무슨 개소리냐, 자본주의 사회가 그런 것 아니냐 하고 반문하면 무어라 답해줄까.
‘가지 부러진 소나무야, 네가 말해 주렴.’
이웃과 함께하는 자 자기를 지킨다. 나눔을 실천하는 자 세상을 밝게 한다. 세상살이 거칠고 힘들어도 마음이 따뜻한 자 우리 함께 쉴 곳을 만들어 준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일하여 넉넉한 살림을 꾸리는 이들을 평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쯤해서 그들도 나의 이웃이기에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보아야 겠다. 이것이 그들에 대한 배려와 여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의 화와 가슴앓이를 다스리는 힘이요,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한 박자만 늦추면 호흡 맞추지 못 할 자 누가 있겠는가.
그들이 있어 나는 정말로 행복합니다
교직에 들어와 처음 인연을 맺은 그들이었기에 잊지 않을 수밖에 없단다.
지금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었드라도 내 마음속에 담아있는 그들은 순박하고 귀엽고 예쁜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말고.
흔히들 첫 사랑은 못내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듯 아마 그들을 난 영원히 잊지 못하듯이 너희 또한 그렇단다.
그런 인연이기에 쉽사리 내 마음 안에 들어온 그들. 목소리만 들어도,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지닌 나의 잊지 못할 그들, 그런 그들이 자꾸만 생각난다. 한 번 만나자는 말에 그러자고 쉽사리 약속을 해버린 나를 너무 가벼웠지 않았나 생각도 했었단다. 왜 그리 콩당 콩당 뛰었는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만난 뒤로는 항상 가슴 벅차 오르고 어느 날엔 종일 그들의 생각으로 마무리한다.
"그들을 사랑해"하는 말보다 "그들이 자꾸 보고 싶다"라는 말이 내 가슴에 더 와 닿는다. 언제나 그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 하기를 바라는 게 나의 마음이니 그들도 마음 변함없어 주기를 소망한다.
그들에게 무엇의 의미로 남아있기를 바라기보다는 나의 마음을 알고 읽어주고 있는 그들이 있기에 이 순간에도 나는 정말로 행복함을 느끼고 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들을 떳떳이 자랑하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그들은 나의 행복한 보물이기도 하다.
간혹은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때로는 그들이 보고 싶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속으로 삼켜 버려도 나에게는 항상 변함없이 이 마음 그대로이기를 늘 기원하며 먼 날까지의 소망으로 간직한다. 그들에게 고맙고 감사함을 느끼며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몰라도 내 마음 전한다. 나의 추억인 그들! 언제, 어떻게 만날지라도 그들과 나는 처음처럼 늘 그렇게 고왔으면 한다.
늘 변함없이 나와 함께 더 큰 꿈을 향해, 더 높은 꿈을 이루기 위해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가면서 열심히 사회생활을 해주는 그들이 정말로 믿음직스럽고 좋다.
한양 천리에서 달려온 은숙이, 친구들의 네크워크망인 봉숙이, 이쁜 순희와 은하 그리고 멋진 머슴아들(광현이, 향수, 성구, 정이) 참으로 고맙고 잊지 못할 또 하나의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