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련 사진은.... 카페앨범에서 보세요>
동양의 진주 스리랑카 紀行
<2011년 4월>
◆ 스리랑카의 역사와 배경 ◆
「동양의 진주」,「인도의 눈물」,「실론 티」등으로 알려진 스리랑카는 인도 남동부 바다에 위치한 아름답고 자그마한 섬나라이다.
면적 6만 5천㎢, 인구 약 2천 만, 종교는 불교 약 70%, 이슬람교, 힌두교, 기독교는 7.5%정도로 비슷하며 싱할리족 74%, 타밀족 8.5%, 무어족 7.4%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언어는 싱할리어, 타밀어, 영어를 공용어로 쓰며 1971년 영연방 실론(Ceylon)에서 스리랑카로 완전 독립하였다.
기후는 고온다습한 전형적 열대기후로 삼림이 울창하고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으로 덮여있는 아름다운 나라이다. 또 전형적인 불교국가로 풍부한 불교 유적들, 독특한 민속무용, 친절하고 순박한 국민성, 코끼리 축제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아름답고 풍부한 자연유산과 자원에도 불구하고 국민 1인당 GDP 4천 달러 정도로 매우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고 하겠다.
1. 수도 콜롬보(Colombo)
대만에서 콜롬보 행 비행기 표를 끊었는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까지 5시간, 공항에서 8시간 머무르다 다른 비행기로 옮겨 타고 다시 4시간을 간다고 하여 무심코 앉아 에메랄드빛 바다와 아름다운 산호섬들을 감상하는데 비행 3시간 만에 느닷없이 고도를 낮추더니 공항에 착륙하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물어보니 코타 키나발루(Kota Kinabalu) 공항이란다. 비행 스케줄에 없던 일이어서 놀랐는데 임시 기착 티켓을 받아들고 1시간 쯤 공항에 기다리다가 그 비행기를 다시 탄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보르네오 섬이었고 거기도 말레이시아였다.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도착하여 8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너무 아까워 열차를 타고 다운타운 구경을 갔는데 예상보다 상당히 멀었다. 쿠알라룸푸르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진도 찍고 식사도 하였는데 시내가 비교적 깨끗하고 매우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았다.
콜롬보 공항에 내리니 밤 12시, 미리 예약해 둔 숙소인 트로픽 인(Tropic Inn)에서 보낸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1박에 아침식사 포함 15달러(16,000원)짜리 싸구려 숙소인데 픽업비용이 31달러나 되어 의아 했었는데 공항에서 콜롬보 시내까지 40km가 넘는다니 이해가 된다.
♣ 아름다운 해변 라비니아(Mt Lavinia)와 콜롬보 시내관광
숙소 바로 옆이 이름난 휴양지인 마운트 라비니아 해변이어서 여기에서 3박을 하며 시내 관광을 하는 한편 아름다운 인도양 해변에서 마음껏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시내 도심의 공원(Vihara Maha Devi Park)은 널찍하며 열대 수림들로 우거져 시원하고 아름답다. 부근에는 시청, 독립기념탑(Independence Memo rial)과 초대 대통령 동상 등이 있고 많은 관공서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공원 바로 옆에 한국 대사관이 있어 찾아 갔더니 30대 중반의 대사관 여직원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며 스리랑카 여행에서 주의할 점도 일일이 짚어주었는데 헤어질 때 명함도 주며 곤란한 일이 생기면 전화하라고 하여 더욱 고마웠다.
콜롬보 도심에는 서양식 건물도 눈에 많이 띄는데 포르투갈과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오랫동안 받았던 영향이라고 한다. 공원을 나서 조금 걸으면 자그마한 호수(베이라 호수)가 나타나고 호수 가운데 아담한 불교 사당(Sima Malaka)이 있는데 들어가 봤더니 젊은 무용수 7~8명이 열심히 전통무용 연습을 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니까 포즈를 취해주며 마음껏 찍으라고 한다. 호수 주변을 산책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고, 호수에는 엄청나게 큰 펠리컨과 가마우지들이 떠 있다. 그리고 이따금 까마귀보다 훨씬 큰 검은 새들이 무리지어 날아가서 자세히 보았더니 박쥐 떼였는데 주변 나무에 내려 앉아 과일처럼 주렁주렁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이 신기하였다.
♣ 스리랑카 최대의 사찰 강가라마야(Gangaramaya Temple)
호수에서 골목길을 요리조리 걸어가면 스리랑카에서 제일 오래된 유명한 절 강가라마야 사원(Gangaramaya Temple)이 있다. 해변에서 제법 떨어져 도심 가운데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4년 12월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해일이 이곳까지 덮쳐와 건물 일부가 파손되어 복구하는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이 절은 스리랑카 불교의 중심으로 교육센터이자 박물관, 도서관뿐만 아니라 고아원도 경영하고 있는 등 명실상부한 스리랑카 정신교육의 센터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절은 또 수많은 국보급 보물들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세계 각국으로부터의 많은 경제적 도움으로 건축되고 운영된다고 하며 한국에서 보내온 불상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로부터 보내온 불상과 불교관련 보물들이 모셔져 있었다.
이 강가라마야 사원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들은 그 엄청난 양과 질적인 면에서 놀라움으로 입을 다물 수가 없을 정도다.
박물관에 있던 한 스리랑카 스님이 내 손목에 오색으로 된 실타래를 매어주며 여행의 안전을 기원해 주었는데 귀국 직전까지 계속 매고 다녔고 여행 내내 기분이 좋고 한결 마음이 든든했다.
2004년 당시의 해일(쓰나미)로 스리랑카는 막대한 재산과 인명 손실이 있었는데 수많은 고아들이 발생하였다고 하며, 우리나라 한류스타 배용준이 학교를 지어 기증하였다고도 한다.
내가 만난 많은 스리랑카인들은 당시의 해일피해로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하소연하였다. 콜롬보에서의 마지막 날은 아름다운 라비니아 해변에서 수영도 즐기며 인도양의 푸른 파도에 취해 꿈결처럼 푸근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바닷물은 따뜻했고 해변의 노천가게에서 마시는 커피도 향기롭다.
이곳에서 보는 석양의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도심 인근의 갈레(Galle Face)도 이름난 휴양지로 넓은 시민공원을 조성해 놓은 멋진 해변이 있었는데 수많은 시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2. 가장 스리랑카적인 도시‘캔디’- 불치사와 데갈도루와 사원
콜롬보 북동쪽 120km, 고원의 도시 캔디(Kandy)는 가장 스리랑카적인 고대도시로 관광책자에 소개되어있는데 16세기 싱할리족의 수도로 세워져 1815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기까지 300여 년간 왕도(王都)였던 도시이다.
실론섬 서부 해안에 위치한 콜롬보에 비하여 지대가 높은 중부지역에 위치한 까닭으로 날씨도 한결 선선하고 도시 경관도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도시였다.
♣ 불치사(佛齒寺-Dalada Maligawa sacred)
캔디의 가장 유명한 명소인 불치사는 이곳에 모셔진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眞身齒牙舍利) 때문인데, AD 362년 인도에서 모셔와 고대도시 아누라다푸라에 안치되어 있던 것을 싱할라 왕조가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왕권의 상징으로 모셔와 불치사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름다운 불치사는 캔디호수 바로 옆에 분홍색 담장, 붉은 기와를 덮은 전형적인 싱할라 건축양식으로 우뚝 솟아있어 수많은 불자들과 관광객들로 항상 길게 줄을 서야 입장할 수 있다.
입장료 1,000루피(25,000원), 신발보관료 20루피를 내고 들어가려니까 반바지 차림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다시 200루피를 냈더니 커다란 천을 발목까지 오도록 내린 뒤 한 바퀴 감아 허리에다 찔러 주었는데 이곳 남자들의 평상차림이다.
웅장한 건물의 중앙에 모셔져 있는 탑 모양의 부처님 진신치아사리함은 루비와 사파이어,·다이아몬드 등으로 장식되어 있고, 둘레에 일곱 겹의 황금 띠가 둘러져 있다는데 사람들에 가려 잘 볼 수도 없었다. 사리(舍利)를 모시는 법당은 물론 복도와 바깥까지 불자(佛子)들은 두 손을 합장하고 바닥에 앉거나 꿇어 엎드려 열심히 불경을 외고 있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스리랑카 최대(最大)이자 아시아 최고의 축제로 꼽히는 캔디의 부처님 치아사리 친견법회(Esala Perahera)는 매년 7~8월에 열흘간 열리는데 이곳에 모셔진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함을 열기 위해서는 지방에 흩어져있는 장관 4명이 열쇠를 가지고 모여야 한다고 한다.
황금 연꽃 좌대에 모셔진 치아사리함을 태운 성스런 코끼리가 앞장서면 아름답게 치장한 100여 마리의 코끼리가 그 뒤를 따르고 연이어 북치는 사람, 무용을 하는 댄서들, 휘황한 연등행렬이 따르는데 시내를 한 바퀴 돌며 축복을 내린다고 한다.
♣ 쓸쓸한 데갈도루와(Degaldoruwa) 사원
호텔 직원이 꼭 한 번 가보라고 권한 데갈도루와 석굴사원은 시내버스로 30분 정도 가야하는데 관광객은 나 혼자뿐이고, 포장도 되지 않은 작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한없이 가는데 놀랐다. 표지판도 제대로 없는 산 한가운데 나 혼자만 덜렁 내려주고는 저 숲속 오솔길로 들어가 보란다.
좁고 험한 언덕길을 올라가자 작은 건물이 보이고 건물 안에서는 초등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이 10여명이 공부를 하고 있다.
그곳을 조금 지나자 마당 한 켠 그늘 밑 나무테이블에 모여앉아 공부하는 중․고등학생들로 보이는 7~8명과 선생님도 보이는데 쓰나미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절에서 데려다고 하는데 공책을 들여다보니 모두 불교관련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바로 뒤 바위산에 있는 쓸쓸하기 짝이 없는 작은 석굴로 들어서는 순간 놀라움으로 가슴이 울렁거린다. 길이 7~8m의 부처님 와불상, 또 한쪽 벽면에는 부처님 좌불상과 두 제자의 입상, 그 둘레를 가득 메운 아름다운 채색의 벽화들과 또 빼곡히 그려진 천정화로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 데갈도루와 석굴사원(Degaldoruwa Cave Temple)은 18세기 초에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달랑 석굴 하나로 크지는 않지만 석굴내부의 부처님 와불 조각상과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고 한다.
3. 담불라(Dambulla) - 황금사원과 석굴사원
캔디에서 버스로 2시간 정도 북쪽으로 달리면 담불라(Dambulla)라는 작은 마을(邑 정도)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유명한 시기리야(Sigiriya) 요새와 폴론나루와(Polonaruwa) 고대도시 관광의 거점이 된다.
담불라(마르지 않는 샘) 부근에 이르면 평원(밀림)가운데 꼭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 같은 커다란 바위산이 우뚝 솟아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 바위산 밑에 황금사원이 있고 정상 부근에 석굴사원이 있다. 황금사원은 바위산 밑에 엄청나게 큰 황금색의 부처 좌불상(높이 30m)을 모셔서 지붕 역할을 하고 그 밑에 대웅전에 해당하는 법당들을 배치하였으며, 널찍한 마당과 또 한 쪽에는 각종 유물들을 전시한 전시관도 있는데 특히 야외에는 바위산을 깎아 황금불상을 향한 스님들과 코끼리의 행렬 등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모신 것이 이채롭고 화려하였으며 어디서나 보이는 거대한 불상은 햇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것이 인상적이다.
입장료를 받는 곳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냥 법당을 드나들기에 유물 전시관 입장료인가보다 하고 나도 입장료를 내지 않고 법당과 둘레를 둘러본 후 계단을 올라가 황금불상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다가 보니 불상 뒤쪽 바위산 위쪽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들 행렬이 보인다.
나도 무작정 따라 오르는데 그다지 가파르지는 않지만 더워서 그런지 무척 멀게 느껴지고 힘이 든다. 중간 중간 구걸하는 사람들, 음료수를 파는 잡상인들, 사람들이 던져주는 음식물들을 받아먹느라 정신없는 원숭이 떼들로 제법 북적인다. 30분쯤 오르면 정상 바로 밑까지 오르는데 거기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그 유명한 석굴사원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결국 황금사원(Golden Temple)과 석굴사원(Rock Temple)은 같은 하나의 사원이었고, 입장료는 이 석굴사원을 들어가는 입장료였던 셈이었다. 이곳을 들어가려면 일일이 몸수색도 받고 전자문(電磁門)도 통과해야 한다. 표를 받는 사람한테 표를 사지 못했으니 이곳에서 구입하면 안 되겠냐, 혹은 돈을 직접 내면 안되겠냐고 하니 다시 내려가서 표를 사오라고 막무가내다. 이런 낭패가 있나 이 더운 날씨에 어떻게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 올수 있겠는가?
옆에서 지켜보던 40대 남자가 재빨리 달려와서 자신이 대신 끊어다 줄 테니 수고비를 달라고 한다. 입장료 1,200루피, 수고비 200루피를 합하여 총 1400루피(35,000원)다. 조금 억울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돌아설 수도, 내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올 자신도 없어 결국 돈을 내밀고 올라올 때까지 나무그늘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40분쯤 기다렸더니 헉헉거리며 올라와 표를 내민다. 바로 나 같은 사람을 겨냥한 전문 심부름꾼(?)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니 신발 맡기는 곳의 사람이 생각보다 먼 거리라며 심부름 값 200루피(5,000원)가 비싼 것이 아니라고 위로를 한다.
신발 맡기는데 다시 20루피.... 그러나 석굴사원을 보는 순간 모든 억울함이 일시에 사라지고 말았다. 총 다섯 개의 석굴로 석굴수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크기와 섬세함, 그리고 화려한 색깔에 완전히 압도되고 말았다. 중국의 용문석굴, 둔황의 막고굴도 보았지만 결코 뒤지지 않는 훌륭한 석굴사원이었다.
BC 1세기 싱할라 왕조 때 건축되었다는 이 석굴사원은 암벽 밑의 흰색 벽으로 이루어진 회랑 안쪽에 자연 상태의 바위산을 파낸 5개의 석굴이 연이어져 있는데 제일 큰 제2 석굴은 가로세로 52m× 23m, 높이 7m의 어마어마한 규모로 황금색의 불상과 신상(神像)들이 안치되어 있는데 다섯 굴을 합하면 모셔진 불상이 총 157좌나 된다고 하니 놀랍다. 뿐만 아니라 천정과 벽에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현란한 색채의 프레스코화가 빽빽이 들어차 있어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제2 석굴 외에도 제1 석굴의 거대한 부처님 열반상, 제3 석굴의 수많은 좌불상과 입상들이 인상적이었고, 화려한 색깔로 그려져 빽빽하게 채워진 천정화 등은 2,000년 전에 조성 된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중한 불교의 보물이자 인류의 유산으로 생각되었으며 가슴가득 밀려오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제3 석굴 이었던가 석굴 가운데 철망으로 둘러쳐진 작은 공간 가운데에 항아리가 하나 놓여있고 사람들이 들여다본다. 석굴천정에서 작은 물줄기가 쉴 사이 없이 떨어져 항아리에 넘치는데 아무리 가물어 다른 샘들은 말라도 이 물은 절대로 마르지 않는다고 하며, 이곳 지명이 담불라라고 부르게 된 연유로 ‘마르지 않는 샘’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4. 경이(驚異)의 성채(城砦) - 시기리야(Sigiriya)의 미녀들
담불라에서 1시간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시기리야 성채와 1시간 40분 거리의 폴론나루와 고대도시는 하루에 모두 볼 수 있다고 하지만 내 체력을 감안하여 하루에 여유 있게 한곳씩만 보기로 하고 시기리야로 향했다. 세계적인 유적지(인류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도로가 엉망이고 교통편(버스)도 형편없어 스리랑카의 경제사정을 말해주는 듯 안타깝다.
수 km밖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원통 모양의 붉고 둥근 바위산(높이 180m)에 조성된 시기리야 성채(城砦)는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AD 5세기, 궁녀소생의 서출왕자였던 카샤파 1세는 아버지가 이복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아버지인 국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였는데 정적들에 의한 암살의 두려움에 이 바위산 위에 궁전을 세우고 이 위에서 18년간 통치하였다고 한다.
수직의 바위벽을 쪼아 만든 계단과 좁은 바위벽 통로를 올라야만 하는 이 요새는 지금 보면 어떻게 오르내렸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철로 만든 원통형 계단과 지그재그 식 계단을 오르다보면 당시 바위벽을 쪼아 만든 계단흔적이 보이는데 철망사이로 내려다보아도 아찔한 수직에 가까운 바위벽을 어떻게 기어올랐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원통형 나선 계단을 7~80m 쯤 오르면 바위벽을 파내어 만든 높이 2m, 길이 10m 정도의 작은 통로가 보이는데 이곳 벽면에 그 유명한 시기리야의 미녀들(Lady of Sigiriya)이 기다리고 있었다. 풍만한 여인들을 그린 프레스코 채색화는 원래 5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대부분 훼손되고 지금은 18명의 여인그림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현란한 색채로 당시의 복식(服飾)과 장신구 등을 보여주고 있다.
가슴을 드러낸 반라의 이 프레스코화는 그 아름다운 색채와 관능미로 지금도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또 바깥쪽으로 열린 반대편 가슴높이의 벽면에는 당시의 글씨들이 흐릿하게 보이는데 여인들 그림이나 이 글씨들은 경비원이 지키고 서 있어 만질 수도, 카메라로 찍을 때 플래시를 사용할 수도 없다.
이곳을 지나 비스듬히 옆으로 돌아 올라가면 바위산 중턱쯤으로 제법 넓고 평평한 공간이 나타나고 나무들도 자라고 있어서 쉴 수 있다. 이곳에서 고개를 젖히고 쳐다보면 다시 까마득히 철 계단을 지그재그로 올라 정상에 이르는 길이 보인다.
왕은 이곳에 다시 바위산을 오르는 돌계단을 파고 그 입구 양쪽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사자 발(獅子足)을 새겨 놓았다. 사자는 불교를 수호하고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상징성이 있다고 하는데 왕은 암살의 두려움을 이곳에 다시 사자 발을 새겨 지키게 함으로써 털어내고자 했던 모양이다.
사자 발 사이를 지나 다시 손잡이를 움켜잡고 철 계단을 오르다 철망을 통하여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나는데 곳곳에 당시 가파른 바위벽을 파내어 만든 좁은 계단이 보인다. 도대체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오르내렸을까? 위로부터 밧줄이라도 내려서 잡고 올라갔을까? 정말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사자발 문에서 올려다보면 계단은 마치 사자의 목줄기를 따라 머리위로 오르는 형상이다.
산의 정상은 평평하고 상당히 넓은데 당시의 왕궁건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바닥의 주춧돌이나 축대만 보인다. 그리고 탁 트인 사방으로는 푸른 밀림이 뒤덮인 넓은 벌판과 악어가 우글거린다는 호수(늪지)들이 한눈에 펼쳐져 보이며 기분이 상쾌해 진다. 스리랑카는 단위 면적당 악어와 코끼리가 가장 많다던가.....
이 시기리야 성채의 또 하나의 신비는 ‘물의 정원’이다. 꼭대기 왕궁터의 조금 낮은 곳에는 정교하게 조성된 물의 정원이 있는데 넓이는 대략 사방 10m 정도의 야외 풀장모양으로 맑고 푸른 물이 그득하여 관광객들이 발을 담그고 있었다. 이 바위산 꼭대기에 샘이 있는 것도 아닐 테고 빗물이 고였다면 썩거나 더러울 텐데 나도 손을 씻어 봤지만 비교적 깨끗하고 시원했다. 이 물의 정원에서 왕궁으로 오르는 계단이 서너 군데 남아 있었는데 바위벽을 쪼아 정교하고도 아름답게 설계된 계단이 귀엽고도 놀라웠다.
인도 아잔타 석굴사원과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성된 이 성채는 고대 세계 8대 경이(驚異: 8th Wonder of the Ancient world)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이곳에서 젊은 일본인 커플을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5. 고대도시 폴론나루와 왕궁유적과 갈 비하라야(Gal Viharaya) 사원
다시 담불라로 돌아왔다가 다음날 버스로 1시간 40분을 달려 폴론나루와에 도착하였다. 완전히 시골 완행버스(버스비 68루피)인데 차창으로 이따금 논도 보이고 야자와 바나나 밭도 보이지만 거의 밀림지역이다. 날씨가 너무 더워 차타기도 너무 힘이 든다. 달리면 뜨거운 바람, 서면 온통 땀으로 흠뻑 젖는다.
파라크라마 사무드라야(Parakrama Samudraya) 호수 옆에 조성된 폴론나루와는 신시가지(New Town)를 중심으로 작은 마을이 형성되었고 구시가지는 사람이 살지 않는 상당히 넓은 밀림지역인데 온통 유적이고, 갈 비하라야 사원은 그 가장 안쪽 바위산에 조성되어 있다.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폴론나루와 유적과 갈 비하라야 사원은 박물관 입장료를 포함하여 5,550루피(50달러)로 상당히 비싼 편이다.
숙소를 정하고 제일 먼저 세 바퀴 오토릭샤를 200루피에 대절하여 제일 안쪽의 비하라야 사원으로 향하였다. 툭툭이 기사는 기다릴 테니 사원을 보고나서 툭툭이를 타고 나오며 왕궁유적을 보라며 흥정을 하잔다.
나는 걸어 나오며 유적을 보겠다고 했더니 혀를 차며 멀기도 하고 더워서 도저히 못할 거라고 조르는 것을 쫓아 보냈다.
갈 비하라야 사원은 허술한 정문을 지나면 비교적 잘 정비된 공원이 나타난다. 넓고 잘 손질된 잔디밭과 나무들, 작고 아담한 호수사이로 조성된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갑자기 유적이 나타나는데 사원건물은 없고 자그마한 바위언덕에 조성된 엄청난 불교유적과 마주하게 된다.
AD 12세기 외적의 침입으로 싱할라 왕국은 수도를 아누라다푸라에서 이곳 폴론나루와로 옮기게 되는데 그때 이 갈 비하라야사원도 건축되었다고 한다. 바위산을 쪼아 조성한 5m 높이의 명상하는 부처좌상(坐像), 연꽃위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는 듯 한 제자 아난타의 7m 입상(立像), 오른팔로 머리를 괴고 누워있는 길이 14m의 부처의 열반상(涅槃像)이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또 부처 좌상과 아난타 입상 사이에는 자그마한 석굴을 조성하고 다시 조금 작은 부처님 좌상을 모셔서 창살로 막아놓고 있었는데 좌상 뒷면의 조각이 특이하고 아름답다. 바깥의 5m 부처좌상 뒷면의 바위도 광배와 비슷한 조각으로 둘러져 있어 신비롭다.
이곳 안내인의 설명으로 부처님이 누워있는 모습은 발이 포개진 모양을 보고 열반상(死亡)인지 주무시거나 쉬고 있는 모습인지 판별한다고 한다.
아무튼 신발을 벗고(벗어야 들어갈 수 있다) 뜨거운 마당을 걸어 들어가 가까이에서 살펴 본 유적의 구석구석 모습은 감탄과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맨 안쪽의 갈 비하라야 사원으로부터 연이어져있는 폴론나루와 고대도시(Sacred City) 유적은 대부분 석조로 된 궁궐이나 불교사원 건물 유적들로 목조부분은 흔적도 없고 석조건물 일부와 기둥과 벽, 그 초석과 불탑(다고바:Dagoba) 등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정비되어 있었다.
외세의 침입으로 11세기 초 2.000년간 수도였던 북쪽 아누라다푸라를 떠나 이곳 폴론나루와로 천도하였다가 다시 인도 타밀족의 침입을 받자 13세기 더 남쪽의 캔디로 수도를 옮기면서 이곳은 폐허로 변하였다.
높이 2~30m, 벽두께 3m, 방이 50개에 이르렀다는 거대한 왕궁은 7층 규모였다고 하는데 흩어진 건물잔해와 허물어진 초석들만이 쓸쓸히 밀림 속에 누워 있었고, 그 밖에도 수많은 불교 사원,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를 모셨던 사원 건물, 반듯하게 뻗어있는 도로들과 그 양 옆으로 들어섰던 건물들의 초석들만이 당시의 화려했던 도시 면모를 짐작케 한다.
엄청난 유적숲 속에서 혼자 어슬렁거리다보니 금방 지쳐버렸다. 너무 더운데다 밀림 속 왕궁을 둘러싼 도시유적이 너무나 넓게 펼쳐져 있어 둘러 보다보니 너무 힘들어 툭툭이 기사를 쫓아 보낸 것이 금방 후회가 된다.
안내책자에 나와 있는 주요 건물 유적만도 15개나 된다. 11세기에 건축되었다는 거대한 다고바(Dagoba)의 키리 베헤라(Kiri Vehera), 조금 아래쪽의 또 하나의 다고바(둥근탑)인 랑코트 베헤라(Rankoth Vehera), 승려들의 숙소였다는 투파라마야 와타다게(Thuparaya Watadage), 입구에 있는 시바 데바라야(Siva Deval!aya), 석조 목욕시설이었던 쿠마라 포쿠나(Kumara Pocuna)등 대부분 둘러보았는데도 나중에 사진을 보니 어느 것이 어느 건물인지 분간도 못하겠다.
6.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유적군과 세계 최고(最古)의 보리수
폴론나루와에서 북서쪽으로 3시간 20분 거리의 고대도시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도착하여 거대한 호수 누와라 웨와(Nuwara Wewa) 옆 아담한 호텔에 숙소를 정하였는데 1박에 1.500루피의 호텔은 경관은 좋았지만 내부시설은 말이 호텔이지 게스트하우스 수준이다.
BC 5세기 싱할라 왕조가 처음 시작 된 아누라다푸라는 AD 8세기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렸지만 이후 인도 타밀족 등 외세의 침공으로 폴론나루와, 캔디로 계속 수도를 옮기면서 버려져 지금은 폐허로 변하였지만 매년 수많은 외국 관광객이 찾는 스리랑카의 고대 신성도시(Sacred City) 중 으뜸으로 불리어지는 곳이다. 이곳 역시 신도시(New Town)과 고대도시(Sacred City)로 나누어지는데 폴론나루와 유적보다는 좁다는 인상이다.
스리랑카에서 가장 크다는 아바야기리야 다고바(Abayagiriya Dagoba : 원형의 불탑, 3세기)를 비롯하여 많은 다고바와 불교사원(寺院)터, 석조 연못 등 넓고 거대한 스케일의 건물 흔적이 남아 있으며, 독특한 스리랑카 스타일의 스투파인 다고바(Dagoba)가 처음으로 나타나게 된다.
유골을 매장하는 인도의 화장묘(火葬墓)인 스투파(Stupa)와 ‘성스런 사리를 모시는 곳’이라는 의미의 실론어 다고바(Dagoba)는 모두 불탑으로 형태는 비슷하지만 상층부 모양에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한다. 또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이었다는 이수루무니야(Isurumuniya) 사원은 호숫가 바위에 새겨진 춤추는 코끼리의 조각으로 유명한데 스리랑카 불교미술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엄청나게 큰 원통형의 다고바가 궁금하여 현지인들에게 저 속으로 들어갈 수 있나, 속에는 무엇이 모셔져 있나 물어 봤더니 안은 비어있고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넓은 경내와 함께 가장 오래된 사찰의 불탑인 투파라마야 다고바(Thuparaya Dagoba), 또 가장 큰 다고바를 자랑하는 제타와나마라야(Jethawana maya)사원의 다고바(불탑)는 높이가 100m가 넘었다고 하는데 현재 위쪽이 부러져 있다. 또 아름답고 거대한 흰 돔(Dome)으로 유명한 루완벨리세야(Ruwanveliseya) 사원의 다고바도 유명하다. 또 근처에 박물관도 있어 들어갔더니 모두 작은 불상이나 조각들로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없다.
또 이곳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보리수(보제수 : 菩帝樹)가 있다. BC 245년 인도의 부다가야에서 옮겨온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는 현존 수목 중 가장 오래 된 것이라는데 유명세와는 달리 밑둥 부분은 철책으로 가려져 보이지도 않고 가지만 무성한 것이 그렇게 오래된 나무라는 인상이 들지 않는다. 이곳에서 의외로 한국 관광객들을 만났는데 포항에서 왔다는 10여명의 40~50대 아줌마들로 매우 반가웠다.
<신비(神秘)의 나라 인도로 가는 길>
당초의 계획은 콜롬보에서 시작하여 스리랑카 북쪽 끝 도시인 제프나(Jeffna)나 인도 쪽으로 삐죽 내민 반도의 만나르(Mannar)까지 가서 배로 인도에 입국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곳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인도로 가는 방법은 오로지 수도 콜롬보에서 비행기로만 가능하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콜롬보로 되짚어 가야하는데 썩을 대로 썩은 시골버스 정도의 버스를 타고 더위 속을 갈 자신이 없어 열차를 알아보았더니 7시간 정도 걸리고 2등 칸 차표가 290루피(7.250원)로 3등 칸에 비하여 100루피 정도 비싼데 좀 나을까 싶어 2등 칸 표를 사서 열차에 올랐다. 스리랑카는 대중교통(버스, 기차)은 무척 싸다.
아침 9시 10분 열차가 출발했는데 3등 칸을 건너다보았더니 2등 칸과 똑 같은데 2등 칸은 단지 좌석이 지정되어 있다는 것. 손님이 별로 많지 않으니 2등 칸이나 3등 칸이나 똑 같이 좌석이 텅텅 비었다. 제기럴....
마침 계속 비가 내려서 덥지 않아 다행인데 열차는 흡사 시골 트럭을 탄 느낌으로 엄청 덜컹거리고 역도 아닌 곳에서 무슨 이유인지 수시로 서고, 단선철도라 작은 역에라도 들어서면 다른 열차가 지나가기까지 한도 끝도 없이 기다린다. 열차 안에서 옥수수 한 개 20루피, 커피 한 잔에 30루피를 주고 사서 먹는데 옥수수는 푸석푸석하여 아무 맛도 없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순박하고 착한데 외국인들을 잘 못 만나는지 보는 사람들마다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며 아이나 어른이나 말을 건다.
<그네들과의 대화 패턴>
★ 어느 나라에서 왔냐? 중국? 일본?
☞ 한국에서 왔다.
★ 북한이냐 남한이냐?
☞ 남한이다.
★ 무슨 일 하냐?
☞ 교원으로 퇴직하고 여행 중이다.
★ 대학이냐? 영어선생 했냐?
☞ 초등학교다. <약간 실망한 모습>
★ 며칠 됐냐? 어디어디 관광했냐?
☞ ○일 됐다. ○○ 봤다.
★ 스리랑카의 인상이 어떠냐?
☞ 무지 좋다.
보통은 이정도로 끝나는데 조금 글줄깨나 읽은 사람을 만나면 골치가 아프다.
★ 연금은 얼마나 받나?
☞ 월 3천 불 정도다. <매우 놀람>
★ 너는 부자구나?☞ 아니다 중류쯤으로 생각한다. 일본과 비슷하다고들 한다.<매우 놀람>
★ 한국의 교육제도는 어떤가?
☞ 이러이러하다.<매우 귀찮다.>
★ 남북통일은 가능한가?
☞ 잘 모르겠다. 원하지 않고 현 상태 유지를 원하는 사람도 많다.
★ 왜 통일 되는 것이 좋지 않은가?
☞ 통일 비용이 만만찮을 것이다. ... 등
암튼, 골치가 아프다. 나는 별 관심이 없다고 하면 더욱 놀라며 왜 관심이 없냐고 또 따진다. 인도에서도 대충 비슷했는데 경제수준이 낮은 나라일수록 남의 나라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나는 편하게 여행하고 싶은데.....
7시간 30분 만에 콜롬보에 도착했는데 여행사를 통하여 비행기 표를 알아본 결과 다음날 콜롬보에서 인도 남동부 대도시 첸나이까지 가장 저렴한 항공사(King Fisher) 티켓으로 항공료가 미화 116달러였다. ※
|
첫댓글 세계 여행이 꿈이 였는데 배낭지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