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왕궁에서 북 소리로 시각 알려… 제왕의 중요한 책무였죠
입력 : 2022.10.20 03:30
시보제(時報制)
▲ 고구려 오회분 5호묘 벽화 중 해신과 달신의 모습. 해와 달은 인류에게 하루와 한 달, 일 년이라는 시간을 선사한 중요한 천체에 해당해요.
오는 23일은 24절기 중 서리가 내릴 무렵이라는 상강(霜降)이에요. 밤 기온이 낮아지고 쌀쌀해지며 서서히 겨울 준비에 들어가는 시기라고 하지요. 24절기는 중국 주나라 때부터 있었는데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1년을 24개로 나누어 정한 날들이에요. 고구려나 동예 사람들은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10월에 동맹(東盟)이나 무천(舞天)이라는 큰 축제를 열었는데요.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시간을 재고, 무엇을 기준으로 모일 시각을 정했을까요?
해와 달 움직임 관찰하고 시각 측정
인간의 눈에 보이는 천체의 순환은 시간을 측정하는 가장 원초적 수단이었어요. 하루라는 시간은 지구가 스스로 한 바퀴 도는 자전주기이고, 한 달은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공전주기인데요. 1년은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공전주기에서 유래했어요. 이런 천체의 운동 주기는 매우 규칙적이어서 사람들이 임의로 고칠 수 없어요. 또 지구 어디에서나 관찰할 수 있죠. 그래서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는 천체의 운행 주기에 상응한 1일, 1달, 1년을 가장 기본적인 시간 단위로 삼았어요.
하루라는 시간은 흔히 태양의 유무를 기준으로 낮과 밤으로 나뉘죠. 이처럼 별다른 도구 없이 태양의 운행만 관찰해서 시간을 구분하는 것을 '자연시법(自然時法)'이라고 불러요. 고대인들도 자연시법을 널리 사용했는데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낮[晝]'이나 '밤[夜]'이라는 용어와 함께 '날이 밝을 무렵[黎明]'이나 '새벽[晨]' '날이 저물 무렵[日暮]'처럼 밤낮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현이 많이 나와요. 태양의 운행 가운데 관찰하기 쉬운 일출과 일몰을 기준으로 특정 시점을 나타냈음을 보여주고 있지요.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해시계나 물시계를 사용해 시각을 측정했어요. 특히 '누각(漏刻)'으로 불린 물시계는 일정한 양의 물을 흘려보내 그 눈금으로 시각을 측정했는데 해시계와 달리 밤에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양나라 때인 507년에는 하루를 동일하게 등분해 시각을 측정하는 정시법(定時法)이 시행돼 시각을 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됐어요.
시보제 속에 깃든 정치학
삼국시대 사람들이 직접 남긴 1차 사료라 할 수 있는 금석문(쇠로 만든 종이나 돌로 만든 비석 따위에 새긴 글자)이나 목간에는 연·월·일까지만 기재돼 있어요. 그래서 당시 실제 시각을 어떻게 관측하고 사용했는지 정확히 알기 어려운데요. 하루의 특정 시점을 표기한 것으로는 울산 천전리 서석(書石)에 539년 쓰인 "지난 을사년(525) 6월 18일 매(昧)"라는 기록이 거의 유일해요. 여기에서 '매'는 '매상(昧爽)'의 줄인 말로 새벽 가운데 '먼동이 틀 무렵'을 가리켜요. 울산 천전리 서석에는 법흥왕을 비롯해 왕비와 누이·형제 등 신라 왕실 가족이 대거 등장하는데요. 이것을 보면 신라 왕실에서는 6세기 전반까지도 일출과 같은 태양의 운행을 기준으로 하루의 시각을 파악했던 것으로 생각돼요.
삼국시대 사람들은 언제부터 정시법을 도입해 시간을 측정했을까요? 신라 태종무열왕 2년(655)에는 왕궁이 자리한 월성에 고루(鼓樓)를 설치했다고 하는데요. '고루'는 북을 설치한 누각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왕궁 일부에 고루를 설치해 시각을 알렸어요. 당나라의 경우 태극궁(太極宮) 정문인 승천문(承天門)에 고루를 설치해 물시계로 측정한 시각을 북과 종을 쳐 알렸다고 해요. 아스카 지역의 북서쪽에 위치한 미즈오치(水落) 유적에서는 671년에 설치한 물시계와 관련된 각종 유물과 유구가 확인되기도 했어요.
이렇게 왕궁에서 시각을 측정해 알리는 것을 '시보제'라고 하는데요. 중국의 경우 처음에는 병사들이 고루에서 울리는 북소리를 듣고 말을 타고 다니면서 통행금지 시각을 알리다가 636년부터는 도성 곳곳에 북을 설치해 시각을 알렸어요. 승천문의 고루는 당 장안성에 사는 이들에게 시각을 알리는 시계 역할을 했던 거예요. 일본의 경우 660년 처음으로 물시계를 제작해 시각을 알렸고, 671년에는 누각대(漏刻臺)를 지어 물시계로 시각을 측정한 다음 북과 종을 쳐 시각을 알렸다고 해요.
이처럼 655년 신라 왕궁 월성에 설치한 고루는 단순히 북을 매달아 놓은 누각이 아니라 시각을 알리던 시보(時報) 시설로 짐작돼요. 이 무렵 신라는 관료들의 복식을 당나라 스타일로 바꾸고, 651년에는 당나라 양식을 참고해 조원전(朝元殿)이라는 대형 건물을 짓고 신년 하례식을 거행했어요. 따라서 655년 월성에 고루를 설치한 것 역시 당나라 승천문의 고루를 참조해 경주에 사는 사람들에게 시각을 알리기 위한 조치로 생각돼요.
그 뒤 신라는 성덕왕 17년(718)에 물시계인 누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야간 시간도 측정할 수 있게 된 거죠. 야간까지 포함한 정시법이나 시보제가 718년 이후 비로소 실시된 거예요.
고대국가에서는 왜 시보제를 시행했을까요. 농경 사회였던 당시에는 계절의 변화를 정확하게 관측해 백성에게 알리는 것이 제왕의 중요한 책무이자 고유한 권한이었어요. 전근대 왕조 국가에서 제왕은 국가권력의 표상이고 왕궁은 가장 핵심적인 정치 공간이었어요. 시보제를 시행해 성문의 개폐 시각이나 통행금지 시각, 관료들의 출퇴근 시각 등을 일률적으로 규제한 거예요. 사람들은 왕궁에서 울리는 북소리를 들으며 국왕의 존재를 떠올렸고, 그 소리에 맞춰 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을 꾸려나갔답니다.
▲ 일제강점기 경주읍성에서 발견된 원반형 해시계 파편이에요.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원을 24등분 해서 24글자를 새겼어요.
▲ 조선시대 해시계인 앙부일구. 안쪽에 24절기를 나타내는 눈금을 새기고, 북극을 가리키는 바늘을 꽂아 시각을 알 수 있게 했어요.
▲ 중국 한나라 무덤에서 출토된 물시계. 일정량의 물을 흘려보내 눈금으로 시각을 측정했어요.
▲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경주 첨성대. 신라에서 일찍부터 천문 관측을 실시했음을 짐작할 수 있어요. /한성백제박물관·국립경주박물관·문화재청·위키피디아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