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 목 : 요한복음(44) /
"섬김의 본을 보여 주신 예수님처럼!”
☞ 말 씀 : 요 한 복 음 13장 1절 - 17절 (신약성경 p.170)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아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사건’ 은 사 복음서에서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유명한 섬김의 사건입니다.
문맥으로 볼 때, 오늘 본문 말씀의 사건은 - 유월절 식사 중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3절 말씀에 ‘저녁 먹는 중’ / 4절 말씀에 “저녁 잡수시던 자리” 라는,
표현으로 볼 때, 유월절 식사 중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어 주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에는 유월절 식사 중,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행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성만찬 이야기는 빠지고, 세족식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만찬과 세족식 – 분리 될 수 없는 성례전입니다. 둘 다 각각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성만찬은 은혜를 보여주고, 세족식은 섬김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성만찬과 세족식을,
함께 거행하기도 합니다. 은혜와 섬김의 의미를 동시에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께서 왜 이 시점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을까요?
제자들과 3년 반 동안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다니실 때 발을 씻어주실 수 있으셨을텐데,
공생애 마지막 시점인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을 발을 씻어주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공관복음서라고 말하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증거에 의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면서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유월절 만찬 중에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사건입니다. 공동체를 깨뜨리는 교만과 시기와 다툼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4절 - 27절 말씀입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아멘!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아주 중요한 문장은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라는 문장입니다.
제자들은 세상 권력자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그들도 한 자리 씩 차지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그런 생각 때문에,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로 말다툼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김의 도를 가르치시기 위해 “종의 리더십” 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시는 섬김의 본도 보이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가히 혁명적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 구조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종이 주인의 발을 씻어 준다든지,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어 주는 일은 자연스럽지만, 주인이 종의 발을 씻어 준다거나,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문화 속에서는, 종이 손님들의 발을 씻어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인이 종의 발을,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자신의 발을 씻으려하자 강경하게 거절한 것입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이 예수님의 말씀에 거절을 합니다.
제자 베드로가 스승인 예수님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리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제자인 자기가 예수님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지, 어떻게 스승이신 주님께서,
자기의 발을 씻어주실 수 있느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 된다고 말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제자들에게, 세상 나라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에 대해 가르치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시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스승인 자신이 제자들을 섬기듯이,
주인이 종을 섬기고,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섬기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관점에서는 혁명적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새로운 질서를 만드셨고, 제자들을 향해 자신을 본받으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주신 후에, 다시 옷을 입고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장 12절 - 17절 말씀을 다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아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스승인 내가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는 본을 보이셨으니,
너희도 그렇게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는 본을 보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높은 자리는 섬김을 받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교회 직분은 섬기는 자리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주관합니다. 권력자 맘대로 사람들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위를 두고, 은인이라 칭함 받기를 좋아합니다.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공을 내세우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종이 되어 섬기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고자 했던 첫째는 사랑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 요한복음 13장 1절 - 2절 말씀을 다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아멘!
사도 요한이 볼 때, 예수님의 삶에서 가장 특징적인 면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한 마디로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상을 떠날 때가 이른 줄 아시고,
더욱 더 제자들을 사랑하셨는데, 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끝까지 사랑하셨다.” - 시간적으로 보면, 마지막까지라고 해석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맥으로 볼 때, 시간적으로 마지막까지라기보다는 ‘비록 제자들이 배신하고,
부인하고 다 버리고 도망쳐도’ 끝까지 완전한 사랑을 베푸셨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적 사랑은 선택적 사랑입니다. 사랑스러운 사람만을 사랑합니다.
나를 좋아하고, 내 맘에 드는 사람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를 좋아하지를 않거나,
힘들게 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이고 변하기 쉽습니다.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든지,
무조건적인 사랑을 끝까지 베푸십니다. 무조건적이며, 끝까지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렇게 사랑하셨던 제자 가운데는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도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팔 그런 배신자 가롯 유다의 발도 씻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의 배반의 의도를 유다에게는 암시해 주셨지만, 제자들에겐 비밀을 지켜 주셨습니다.
그 제자 속에는 베드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베드로 - 말이 앞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지언정, 결코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였지만,
하루도 안돼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제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고 그런 베드로를 부활 후에 다시 만났을 때, 그 사건을 언급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고 그의 사랑을 확인하시고, 다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이런 끝까지 사랑을 깨닫는 것은 중요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진실로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기도할 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에베소서 3장 14절 - 19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아멘! 아멘!
사도 바울의 중요한 기도 제목인데,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린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의 깊이와 높이, 너비와 길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고자 했던 두 번째 진리는,
섬기는 삶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섬김은 혁명적인 섬김이었습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서 종을 섬기는 섬김이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 우리 예수님과 같은 섬김을 보여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문화에서 주인이 종을,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어 주신 후에, 제자들을 불러서 그렇게 하신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인 너희들도, 서로 발을 씻어 주면서 섬기도록,
제자들인 너희도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라고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 요한복음 13장 14절 - 15절 말씀을 다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아멘!
이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섬김은,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중요한 특징은, 예수님의 섬김은 속죄의 섬김이었다는 것입니다.
섬김의 종류는 많습니다. 마르다처럼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할 수도 있고,
아픈 다리나 어깨를 주물러 줄 수도 있고, 등을 두드려 주는 섬김, 많은 섬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씻는다.’ 는 것은 세례의 의미 - 곧 예수님께서 죄를 씻어주시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속죄의 섬김을 베푸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 주시려 하자, 발 씻김 당하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 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번에는 “나의 발뿐 아니라, 나의 손과 머리도 씻어주세요.” 라고 했고,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심을 통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셨습니다.
비유하자면 은혜로 우리의 죄를 씻는 목욕을 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하심의 은혜를 받게 되는 은총이 주어집니다.
디도서 3장 5절 말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마가복음 10장 45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도 속죄의 섬김을 위함이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아멘! - 이 속죄의 섬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독특한 섬김이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이 독특한 속죄의 섬김으로,
이루어진 속죄의 섬김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여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섬김의 두 번째 특징은,
자신을 온전히 낮추시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시는 자기 비하의 섬김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와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섬김이 익숙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2000년 유대 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놀라면서,
“예수님! 예수님께서 결코 제 발을 씻으실 수 없습니다.” 라고 단호하게 말한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려야지, 어떻게 예수님이 내 발을 씻으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스스로 낮아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신 분이십니다.(빌 2:6-7)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김은 그 반대의 섬김이었습니다.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섬김을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만과 자존심을 죽이지 않으면 결코 자기 부인, 자기 비하의 섬김을 베풀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주님의 본을 따라 자기 비하의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살 때, 이런 섬김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 바하의 섬김을 하면, 섬김을 받는 섬김으로도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처음에 섬김을 받는 것을 거절하듯이, 사람들 중에는 섬기는 것은 잘 하는데,
누군가에게 섬김을 받는 것은, 무척 불편하고 어색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진실로 겸손한 섬김의 사람은, 섬김을 받을 때에도 겸손하게 받아들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섬김의 세 번째 특징은,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작은 섬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작은 섬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은, 생각해 보면 거창한 큰 섬김이 아닙니다.
돈이 들어가는 섬김도 아닙니다. 누구나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섬김입니다.
프랑수아 드 살르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큰 섬김은 설탕과 같다면, 작은 섬김은,
소금과 같다.” - 사람들은 작은 섬김보다는, 드러나는 큰 섬김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크고 중요한 일을 맡으려고 하고, 작은 일은 하기 싫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금과 같은 작은 섬김이 모여서, 교회가 아름답고 건강하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정에서 어머니들의 섬김은 매일이 작은 섬김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작고 섬세한 섬김이 없다면,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녀들이 어떻게 양육,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받아서 작은 섬김부터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섬김, 큰 것이 아니라 작고 성실한 섬김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세 가지 섬김에 대한 가르침을 깨달았을까요?
나중에 예수님처럼 섬김을 실천하면 살았을까요? 사도행전과 여러 서신서들을 보게 되면,
성령 받은 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 베드로 – 수제자로서, 교회의 수장 역할을 할 수도 있었지만, 베드로의 모습에서,
그 어떤 세상 권력자의 모습은 없었습니다.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1절 - 6절 말씀을 보게 되면, 사도 베드로가 만약에 교만한 리더였다면,
이렇게 권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닮은 겸손한 리더였습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아멘! -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사건을 연상시키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닮은 겸손으로 사람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예수님을 본 받아서 겸손히 섬김의 삶을 실천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 바울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그는 원래 유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울은 살기등등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변화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7절, 8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아멘! -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섬김을 닮은 섬기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복음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 주기를 기뻐할 정도의 철저한 섬김의 삶을 살았던, 섬김의 사도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아멘! - 이 말을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로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닮으려 했기 때문에,
모든 교회 성도들에게도 자기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로서, 그리스도를 본받읍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끝까지 사랑하며 삽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겸손하게 섬기셨듯이, 우리도 겸손하게 섬기며 삽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속죄의 섬김, 한 없이 낮아지신 자기 비하의 섬김,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성실한 섬김을 하셨듯이, 우리도 그런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아서,
예수님처럼 주고, 베풀고, 섬기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