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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9.07 15:51
호수 2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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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팔고 전답 팔아 대한적십자사 창설
박정희와 맞짱 뜬 언론인
ⓒphoto 유동선
원봉(圓峯) 유봉영(劉鳳榮)은 고향에서 3·1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옥고를 치렀고 상하이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대한적십자사를 창설했다. 이후 조선일보 폐간과 복간을 함께하며 주필·부사장으로 공화당 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언론자유를 지켜내려 했다. 그는 최남선·김도태·이병도·김상기 등 역사학자와 교유하며 간도 등 북방영토에 대한 연구 모임인 백산학회를 창설하여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일찍이 대비해 온 선각자이기도 하다.
유봉영은 1897년 1월 27일(음력) 평북 철산군 고성면 동부동 230번지에서 강릉 유씨 유학요(劉學堯)와 하동 정(鄭)씨 사이의 1남5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호 원봉은 ‘고향의 산 이름에서 따온 것이나, 그분의 원만한 성격과도 잘 어울린다’고 장손인 동선(72·전 문화일보 제작국장)씨가 전했다.
“저는 장손이라 진지 드실 때도 함께 모시곤 했는데 말씀을 잘 하시지 않는 분이셨지요. 집안 형편은 넉넉해서 조부께서는 어린 시절 독선생을 두고 공부하셨다고 들었고… 한문뿐만 아니라 영어, 지리, 역사 등 신학문도 학교에 입학하시기 전에 이미 독선생을 통해 배우셨다니까요.”
유봉영은 1902년부터 동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907년에 철산읍내 신명학교에 입학한다. 1909년 3월 탁영련(卓濚鍊)의 3녀 탁윤소(卓潤昭 )와 결혼한다.
1910년 신명학교를 졸업하고 이웃 박천군 육영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105인 사건’의 여파로 육영학교가 문을 닫아 학업을 중단한다. 유봉영은 1911년 상경하여 YMCA학관 영어과에 입학하고 1916년에 고향의 명흥학교 교사가 되어 영어와 역사, 지리를 가르친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유봉영은 고향에서 8~9명의 동지들과 수차례 모의하여 철산읍 장날을 기해 시위를 벌인다. 시위는 9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00여명의 부상자를 냈다. 유봉영은 시위 주동자로 수배되자 상하이로 망명하여 선우혁 등 독립지사에게 국내 정세를 보고한다.
5월에는 길림(吉林)에 가 여준(呂準)이 주재한 재만주 독립운동자회의에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하며, 서(西)간도 동지들과 함께 만주 곳곳을 돌면서 한족회 간부들과 독립운동에 관한 협의를 한다. 8월에는 상하이로 돌아와 프랑스 조계에 머물면서 이희경 등과 협의하여 대한적십자사를 창설한다. 이해 11월 만주 안동현으로 가서 부인을 만나 고향의 토지를 처분하게 하여 5000원을 마련해 상하이 독립신문의 평판인쇄기계를 구입하는 데 썼다.
유봉영은 아예 만주 봉천에서 농지를 매입해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국내와 상하이, 만주 곳곳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기관들의 연락임무를 담당하는가 하면, 이 기간에도 사재 1000원을 염출해 임시정부에 송금한다.
“유봉영은 1919년 3월 7일 평안북도 철산읍 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명흥학교 영어교사였던 그는 인근 지역 동지들을 규합했다. 유봉영의 집 사랑채에는 밤마다 피 끓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3·1 독립선언서를 찍는 등사기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당시 유봉영에게 전달됐던 독립선언서는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존돼 있다. 독립만세운동 이후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된 유봉영은 100여석 소출의 전답과 집을 팔아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로 갔다. 이 돈은 적십자사 창립과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였다. 임시정부 재무부에서 일하던 그는 항일 선전 자금과 군자금 모금을 위해 만주 신흥무관학교와 국내, 일본 등을 오갔다. 상하이 독립신문 발간에도 참여했다. 이런 활동 중에 그는 일제에 체포돼 여섯 차례 옥고를 치렀다.”(‘조선일보 사람들’ 조선일보 사료연구실)
1920년 유봉영은 일본 도쿄로 가서 보급영어학관에서 영어공부를 하고 봉천으로 돌아갔다. 이때 대구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40여일 구금되었다가 철산경찰서로 이송된다. 그는 3·1운동에 관한 문초를 받은 후 기소유예로 풀려난다.
이후에도 유봉영은 여러 차례 일경에 구금되는 곤욕을 치른다. 1922년 2월 경의선 기차 안에서 경찰에 붙잡혀 신의주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며칠 후 출감된다. 1924년 8월 19일 경성 종로서에 구금되었다가 8월 26일에 풀려난다.
1926년 2월 9일 봉천 일본총영사관 경찰서에 피검되어 구금당했다가 2월 19일에 출감한다. 1927년 5월 11일 경의선 기차 안에서 경찰에 피검되어 신의주서에 구금당했다가 5월 20일에 출감한다. 1929년 7월 6일 철산경찰서에서 피검되어 5월 16일 신의주형무소로 이송되며 5월 25일 불기소 석방된다.
유봉영은 이처럼 일제의 박해 속에 청춘 시절을 보내다가 1936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그후 생애의 대부분을 함께한다.
“유봉영은 1920년대부터 시인 김억 등으로부터 신문사에 들어가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활동해야 할 처지에 어떻게 직장을 가질 수 있나 하는 생각에서 거절했다.
그러나 3·1운동 후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면서 독립군의 활동도 어려워졌다. 그는 ‘장기적인 방법을 취해서 민족의 정신적·물질적 역량을 배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호형호제하며 지내던 조선일보 교정부장 김찬룡이 1년 넘게 유봉영에게 입사를 재촉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이 어렵게 된 마당에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신문사였다.”(‘조선일보 사람들’)
유봉영은 1940년 10월 30일 조선일보 폐간으로 퇴사했다가 1945년 11월 22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재입사한다.
그 후 1971년 5윌 퇴직하기까지 교정부장, 문화부장, 편집부장에 한때는 정치부장, 사회부장을 겸임하기도 하며, 편집국장·논설위원·주필·부사장이 됐다. 유봉영은 광복 후 조선일보 복간 과정에서 천군만마의 역할을 해낸다. 교정부장을 하면서 정치면 편집을 하고, 학예부장을 하면서 편집주임을 겸하는가 하면, 편집을 하면서 사설을 쓰기도 했다.
“좌익 성향의 문동표와 이갑섭이 각각 편집국장과 주필을 맡았을 때 유봉영은 조선일보가 적색신문이 되지 않게 지키는 방패막이가 됐다. 편집국장이 좌익 기사의 제목을 이렇게 붙여라, 크기는 몇 단으로 하라고 지시해도 편집부장인 그는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된다, 안된다는 의사표시를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문이 나오고 보면 좌익의 선동적인 문구나 컷은 빠져 있었다. 편집국장도 그의 소리 없는 저항에는 별수가 없었다.”(‘조선일보 사람들’)
1948년 12월 편집국장 문동표가 갑자기 사라져 공석이 된 자리를 유봉영이 맡는다. 편집국장만 맡은 게 아니었다. 재정이 어려운 데다 좌우 대립까지 겹쳐 인력에 공백이 생기다 보니 정치부장, 사회부장 등 서너 개 직책을 함께 맡는다. 덕분에 그는 편집국 사정을 속속들이 꿰뚫게 된다.
“신문사에서 유봉영은 돌부처로 통했다. 말수가 적고 얼굴에는 항상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남로당 청년들이 공장에 들어와 문선대를 뒤엎고 난동을 부릴 때도 태연자약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난입자들이 오히려 맥이 풀려 그냥 돌아가기만 했다. 아랫사람이 잘못했을 때도 조용 조용 타일렀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 상대방이 ‘네?’ 하고 물어야 할 정도였다.”(‘조선일보 사람들’)
원봉이라는 아호가 말하듯, 풍모도 인품도 행동거지도 둥글고 큼직하며 태연했다. 1946년 이래 26년간 조선일보에서 함께 지낸 유건호 부사장은 단 한 번 유봉영이 크게 노한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1949년 한 편집기자가 동료 기자와 말다툼을 하다가 홧김에 조판해 놓은 것을 엎어 버렸을 때였다.
“신문 제작 중 다 짜놓은 조판을 자신의 감정 때문에 둘러엎은 한 편집기자에게 ‘이놈! 버르장머리 없는 놈’.”(발인식 조사에서)
“그의 평안도 말투는 한결같았지만 평소의 선생은 말소리도 걸음걸이도 항상 찬찬하고 조용했다.”(조선일보 ‘만물상’ 1985년 9월 28일자)
국어학자 이숭녕은 유봉영에 대해 “처음 뵈올 때는 원만·중후·과묵의 성격에서 우리가 학자로서 바라는 장점을 고스란히 지니신 분이라고 보았으나 해를 겪고 보니 ‘맹호출림(猛虎出林)’의 기상이 느껴졌다”며 “오직 이를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조선일보 사람들’)
유봉영은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자 조선일보 사설 ‘경계를 요할 괴뢰의 행동’을 집필한다. 마치 전쟁을 예고하는 듯한 내용이다.
“북한 괴뢰집단이 자기네 목적을 위하여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동안 그들의 행동이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금번 조만식 선생과 김삼룡·이주하 양인을 교환할 문제는 괴뢰 측에서 먼저 제의하여 놓고 이제 와서 이러니 저러니 구실을 붙여가지고 시일을 천연하고 있으니 그 의도가 나변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주저하는 그 이면에 무슨 내막이 있지 않을까. 금후 그들의 행동을 충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당시 북한의 태도가 수상하다고 생각했던 유봉영은 전날 무슨 예감이라도 받은 듯 이 사설을 썼다. 그는 오랜 기간 독립운동과 여러 분야의 신문기자 생활을 통해 정세를 읽어 내는 안목을 터득해 온 것이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1952년 정월 초하루. 신문을 만들기 위해 출근한 기자는 네 명뿐이었다. 월급도 제대로 안 나오는 판에 정월 초하룻날까지 회사에 나오기가 다들 심란했던 탓이었다. 그래도 유봉영은 묵묵히 신문을 만들어냈다.
유봉영은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있던 1964년 ‘언론윤리위원회법 철폐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제3공화정을 탄생시키면서 언론을 조일 목적으로 1964년 8월 4일 야간국회에서 언론윤리위법을 전격 통과시키고, 다음날 임시국무회의에서 시행을 공포했다. 이에 언론계는 즉각 이 법을 언론악법으로 규정하고 ‘언론법 투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언론계가 한데 뭉쳐 투쟁위원회를 결성했지만 위원장 자리는 누구도 맡으려 하지 않았다. 발행인협회·편집인협회 대표들이 연일 회합을 거친 끝에 외유내강의 유봉영을 적임자로 추대했다. 유봉영은 당시 조선일보 주필로서 고재욱(동아일보 주필)·홍종인(신문연구소 소장)·김남중(전남일보 사장) 등과 함께 정부를 상대로 ‘악법철폐’ 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한다.
박정희 정부는 △신문구독 중지 △정부광고 의뢰 중지 △신문용지 배급 및 은행융자 제한 △언론인 사찰 △신문 정간 폐간 위협 등 온갖 유형 무형의 압력을 가해 왔으나, 언론계는 굴하지 않고 유봉영을 중심으로 악법철폐 운동의 도를 높여갔다.
정부에 대한 국내외 비난 여론이 비등하고 언론계의 악법철폐 투쟁의 열기가 고조되자 정부 측은 동양통신 사주 김성곤 의원을 중재자로 내세워 막후교섭을 추진하였으며, 홍종철 공보부 장관과 이후락 청와대비서실장이 박 대통령과 ‘악법철폐투쟁위원회’ 간의 회동을 주선한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손자 동선씨.
유봉영은 언론악법철폐투쟁위원들과 함께 대전 유성에 묵고 있던 박 대통령과 9월 8일 만년장호텔에서 대좌한다. 유봉영은 “언론윤리위원회법 강제 시행으로 국민이 더 이상 유리되어서는 안된다”고 설명하면서 “언론 스스로가 책임있고 공정한 언론이 되도록 노력할 터이니 언론윤리위원회법 시행을 보류해 달라”고 건의, 박 대통령으로부터 선처 약속을 받아냈다. 유봉영은 38일간의 외롭고 힘든 대정부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 한국 언론사에 큰 족적을 남긴다.
충남 유성에서 열린 박정희와 언론계 대표들의 담판 자리에서 모두들 표정이 굳어 있었으나 유봉영만은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고 한다. 이 회담으로 언론윤리위원회법은 보류되었다. 이와 관련해 유봉영은 “신문의 자주란 스스로의 힘으로 지킬 수밖에 없음을 새삼 느꼈다”고 회고했다.
유봉영은 1971년 공화당 전국구 의원이 되면서 조선일보를 떠난다. 그는 정계로 나간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장손 동선씨가 말했다.
“조선일보에서도 극구 만류했다지요. 조부님도 언론인으로 생애를 마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박 대통령이 자꾸 추천하고 압력을 넣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하셔요.저도 물론 아쉽게 생각합니다.”
유봉영은 우리 역사에도 조예가 깊었다. 조선일보에 재직 중이던 1948년 4월부터 1957년 8월까지 역사학자 김도태의 부탁으로 그가 교장으로 있는 서울여상에서 역사를 가르친다.
유봉영은 1966년 ‘압록강 두만강 너머 만주 땅도 우리 영토’라는 기치를 내건 백산학회 창립에 부회장 겸 총무로 참여하여 회장까지 지낸다. 언젠가 중국과 국경 문제가 불거질 때를 대비해 학문적 기반을 마련해 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유봉영은 1972년에는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에도 선출돼 고전 번역 작업에도 힘을 쏟는다.
“제가 바로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원봉 선생님을 모시다가, 그후 백산학회 총무를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영토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도 꼭 기존의 역사학 중진들을 앞자리로 모시고 스스로는 뒷자리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지요. 재정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게 된 박 대통령께서 국가 예산으로 지원하고자 하셨지만 끝내 사양하고 민간 기업의 지원을 받기 위해 나서곤 하셨지요.”(육락현 백산학회 총무이사)
유봉영은 1985년 9월 25일 서울 장위동 자택에서 별세하며 경기도 용미리 가족묘지에 안장된다. 유봉영은 5남1녀를 두었다. 장남 인산(작고·고려대 상과 졸업)씨는 한영고교 교장을 지냈으녀, 2남3녀를 두었다. 인산씨의 장남 동선(72·성균관대 사학과 졸업)씨는 문화일보 제작국장을 지냈으며, 차남 남선(57·고려대 건축과 졸업)은 건축업을 하고 있으며, 장녀 명희(68·대전 신학대 졸업)씨, 차녀 혜란(54)씨, 3녀 영란(51·서울간호전문대 졸업)씨가 있다.
유봉영의 차남 인하(89·고려대 상과 졸업)씨는 기업은행 인사부장을 지냈으며 3남1녀를 두었다. 인하씨의 장남 화선(62·경희대 상과 졸업)씨는 사업 중이며, 차남 성선(59·서울대 공대 졸업)씨는 선경 상무를 지냈으며, 3남 창선(51·연세대 졸업)씨는 시사평론가이다. 장녀 미경(64·이화여대 성악과 졸업)씨가 있다. 유봉영의 3남 인홍(작고·서울대 공대 졸업)씨는 문교부 장학사를 지냈으며 2남2녀를 두었다. 장남 광선(56·성균관대 졸업)씨는 조선일보 방계기업인 조광출판인쇄 전무이며, 차남 지선(54·명지대 졸업)씨는 석탄공사 감사실장이다. 장녀 진경(50·서울여대 졸업)씨와 차녀 선경(48·대졸)씨가 있다.
유봉영의 4남 인태(75·한양대 기계과 졸업)씨는 미국에서 살고 있으며, 충선(대졸)·은경(대졸·재영 변호사)씨 남매를 두었다. 유봉영의 5남 인걸(67·한양대 졸업)씨는 사업 중이며, 태선(38·대졸, 회사원)·덕선(33·대졸, 회사원)씨와 국악인 숙경(35·한양대 국악과 졸업)씨 등 2남1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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