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읍 예산리 예동마을 입구 도로변의 배씨정
아버지가 죽자 따라죽은 딸
배현복(裵玄福, 1552-1592)은 배덕문의 제자이다. 배덕문은 임진왜란 때 고령의 나이에도 몸을 사리지 않고 왜적과 싸워 성주성을 탈환하는 등 큰 공을 세운 선비이다. 물론 의병을 모집하여 전투에 나섰으니 배덕문은 관군 사령관이 아니라 의병장이었고, 그의 제자 배현복은 스승을 도와 왜적과 싸운 의병의 장수였다. 하지만, 배현복 역시 스승 배덕문과 마찬가지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었으니 본래는 무장이 아니라 선비였다. 그렇게 보면 두 사람은 출장입상(出將入相)의 본보기라 할 만하다. 평화시에는 문관으로서 벼슬을 했고 전쟁이 일어나면 칼을 들고 싸워 큰 공을 세웠으니 말이다. 혹은, “그 스승에 그 제자답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왜적과 한창 혼전을 벌여 일전일퇴를 거듭하고 있을 때 배현복이 의병들 앞으로 나서며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나라의 녹을 먹어온 사람으로서 이제야 비로소 몸을 바쳐 그 은혜를 갚을 때가 왔다. 그 동안은 글을 쓰고 관청 일을 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왔지만 지금은 나라에 큰 전쟁이 일어났으니 어찌 칼을 들지 않겠는가. 자, 나를 따르라. 신라의 김유신이 낭비성에서 고구려와 싸울 때 당신의 아버지 서현 장군에게 아뢴 말을 기억하는가. 소장이 나서서 단신으로 고구려 군사를 공격하여 아군의 사기를 북돋울 터이니 적당한 때가 되면 총공격을 감행하십시오. 여러분! 내가 앞장서서 적을 칠 테니 모두들 뒤를 따르시오.”
배현복은 칼을 치켜들고 적진을 향해 말을 달렸다. 갑자기 한 장수가 말을 달려 뛰어드니 왜적들은 놀라면서 좌우로 갈라졌다. 그렇다고 왜의 장수들까지 모조리 몸을 사릴 리는 없었다. 칼과 칼이 허공에서 부딪히는 소리가 벌판을 찡찡 울려댔다. 마침내 배현복의 칼이 왜장의 목을 꿰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바라보던 아군의 진지에서는 함성이 솟구쳤다. 다시 왜장 한 명 앞으로 푹 꺼꾸러지며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또 한 명…….
하지만 끝내 배현복도 기운이 다하고, 둘러싼 왜장들을 모두 무찌를 수는 없었다. 앞뒤 좌우로 공격해오는 왜장들의 칼을 막던 배현복의 옷은 마침내 붉은 피로 진하게 물이 들었다. 이미 여러 번 칼끝에 살을 베인 처지였다. 와, 와— 기세가 오른 의병들이 왜적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왜군들이 진을 정비하면서 대항했지만 하늘을 찌르는 의병들의 기세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드디어 왜적들은 물러갔다. 그러나 배현복은 숨을 거둔 지 오래였다.
“아버지, 제가 사내아이로 태어났더라면 이럴 때 칼과 창을 들고 천추의 원수를 갚을 것이오나 약한 계집아이로 출생하였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나이까? 원통합니다, 아버지— ” 죽은 아버지를 붙들고 울음을 쏟는 딸의 모습에 살아남은 모든 의병들은 한결같이 눈물을 흘렸다.
전투는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서 배현복의 딸은 왜적들에게 생포되었다. 그자들은 그녀가 의병장 배현복의 딸인 것을 알아보았고, 적장의 딸이라 하여 자신들의 본진으로 압송했다. 적진으로 끌려가는 길은 성주향교가 바라보이는 예동마을 앞 넓은 길이었다. 그 길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었다. 우물 근처에 당도했을 때 그녀가 큰소리로 말했다. “너무 목이 마르니 물 한 모금만 먹게 해주시오.”
왜적들은 배씨의 딸을 우물가로 데려갔다. 그녀는 우물을 향해 몸을 세웠다. 그녀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뿜은 다음 그 붉은 선혈로 우물가 돌에 표식을 남겼다. 왜적들에게 끌려가 치욕을 당항 수는 없다는 한많은 맹세였다. 왜적들은 그녀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배씨녀는 두레박을 우물 안으로 집어넣는 시늉을 했다. 눈깜짝할 찰나였다. 몇발짝 떨어져 그녀를 감시하고 있던 왜적들이 미처 팔을 뻗치기도 이전에 그녀는 우물 안으로 몸을 날렸다. 낭자한 혈서의 흔적만 돌 위에 남긴 채 그녀는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싸우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사람들은 그 우물을 배씨정(裵氏井)이라 부른다. 배씨의 딸이 목숨을 던진 우물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그 우물은 성주읍 예산리 예동마을 입구의 넓은 도로변에 자리잡고 있다. 성주향교에서 보면 비닐하우스 사이로 배씨정이 직선으로 눈에 들어온다.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던진 아버지와, 그 아버지 못지 않은 딸이 남긴 슬픈 사연을 기원전의 공자도 알고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