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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천문화관광해설사회◈ 원문보기 글쓴이: 임명미
<되돌아보는 인천의 큰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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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인하대학교 한영국(韓榮國)교수가 쓴 것입니다.
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가 2002년 8월에 발간한 『인천광역시사(2), 인천의 발자취』에「서설」이란 제목으로 실려있습니다. 인천의 역사를 매우 쉽게 집약한 글입니다.
인천문화유산해설사모임의 자료팀은 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의 허락을 받고 이 글을 home page에 올리기로 했습니다. 다만 제목을 「되돌아보는 인천의 큰 발자국」으로 고치고 회원들이 좀더 편안하게 보고 읽을 수 있도록 중간 중간에 작은 제목을 붙이고 사진을 삽입했습니다.한영국 교수님과 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에 사의를 표합니다.(자료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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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 동북아의 허브(Hub)
바다도시 인천광역시는 지금 동북아시아의 중심도시로 세계를 향해 웅비하고 있다. 서울의 관문으로서 항만·상업도시를 이루어 온 원인천**[인천부]에다가 농·공업도시 부평을 아우르고, 이어 농·수산과 문화·관광의 보고(寶庫) 강화와 옹진 등을 합하면서[인천광역시 : 1995]동북아시아의 허브(Hub)공항을 더하여,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거대한 관문이자 국제적 물류중심지, 산업·정보단지, 관광·휴양단지로 비약적인 성장을 기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날의 인천(원인천)과는 완연히 다른 새로운 차원의 국제도시로 변화하고 있다고 보겠다.
인천지역사회(원인천·부평·강화·옹진·김포 일부)가 이같이 성장·변모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가 근래에 이룩한 경제적 정치적 성장과 뒤이어 이루어진 환(環)황해권의 개방화가 인천지역의 지정학적 특성과 맞물린 때문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난날 오랜 세월에 걸쳐 인천지역사회에 쌓여 온 역사적 토양에 기반한 바도 간과할 수 없으리라 본다.
{**[인천부] : 오늘날 인천광역시는 인천직할시의 시역에다가 강화·옹진군과 김포 검단면을 더 하고 있다. 따라서 광역시 이전의 인천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시사편찬위원회에서는 인천광역시의 시역을 '인천지역'으로 표현하고, 인천직할시는 '구인천'으로, 인천도호부~원인천~인천시는 '원인천'으로 표현하기로 하였다.}
인천의 옛 이름 : 미추홀
인천지역사회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동틀 무렵, 이미 한반도 서해안지역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기원 전 5,000년 경부터 강화도를 비롯한 인천지역 곳곳에서 구석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고, 이들의 사회적 문화적 유산은 신석기·청동기시대를 거치는 동안 날로 새롭게 축적·확장되어 기원 전 1세기 경에는 '미추홀(彌鄒忽)'을 건설케 하는 기반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2000) 강화 고인돌 무리를 비롯하여 인천지역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고인돌들은 이를 말하고 있다. 단군(檀君)의 유향(遺香)이 강화도 곳곳에 전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겠다.
그러나 한강 중류에서 백제가 세력을 떨치고, 대동강 유역에 고구려가 자리하게 되자 인천지역사회는 점차 그 독자적 세력을 잃어 갔다. 이들 두 세력의 신장에 밀려 더 이상 서해안지역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끝내 백제의 평범한 군·현으로, 이어서 고구려의 군·현으로 편입되어 간 것이다.
중국과의 교역 항 : 능허대
그런데 백제의 지배 하에서 원인천 사회는 대외교통의 창구로 기능하는 경험을 처음 갖게 되었다. 고구려와는 달리 해상으로 중국과 교통할 수밖에 없었던 백제가 그 수도를 충청도 공주로 옮길 때까지 100여 년 동안 능허대(凌虛臺;연수구 옥련동)를 항구로 하여 중국과의 교통을 취한 것이었다. 그러나 상호 왕래가 빈번하지 못했던 탓인지, 이러한 기능이 원인천사회에 미친 영향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으로나 전설로나 그 어떤 변화의 모습을 살필 만한 자료가 전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시기의 지방행정 편제로 보아도 그에 따른 특별한 배려나 조치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대동강과 원산만을 연결하는 지역까지 그 영토를 넓힌 통일신라는 중국과의 해상교통의 거점을 남양만(南陽灣)으로 하였다. 그리고 인천지역에는 군진[軍鎭 ;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하여 외침의 방어와 함께 해상교통의 안전을 기하는 군사기지로 삼았다. 고구려의 지배하에서 다시 평범한 농·어촌사회로 돌아갔던 인천지역사회가 이번에는 군사적 요충으로 부상되는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부평에 안남 도호부
인천지역사회가 경험했던 이같은 기능들은 대외관계에서 매우 개방적이었던 고려왕조가 개성에 도읍하면서 더욱 확대·촉진되었다. 일찍이 해로를 통한 대외무역에서 뛰어난 활동을 보였던 고려 왕실은 개성에 이르는 수로(예성강)입구에 위치한 강화·교동·자연도 등을 중심으로 대외교통의 거점을 개발·정비하는 한편, 이를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원하면서 수도 개성의 남방지역을 방어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부평[수주(樹州)]에 설치한 것이다. 안남도호부에는 원인천[소성현(邵城縣)]과 시흥·양천·통진·김포 등이 예속되어 있었다. 이제 인천지역사회가 '꼬레아'로 서방세계에까지 알려지는 고려의 국제교류의 관문으로 정립된 것이다.
칠대어향(七代御鄕)의 고을
인천지역사회는 이후 고려왕조 일대에 걸쳐 날로 번성하여 갔다. 먼저 원인천이 인주 이씨의 왕실과의 혼인으로 경원군(慶源郡;숙종 때)이 되고, 이어 다시 인주(仁州;인종 때)로 그 위상을 높여 갔으며, 고려 말에는 '칠대어향(七代御鄕)'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1390)로까지 격상되었다. 그리고 부평도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에서 길주목(吉州牧;1308)으로 승격되었다가 부평부(富平府;1310)로 고쳐졌고, 강화는 몽골[蒙古]의 침입 때(1932) 40년 가까이 피난수도[강도(江都)]로 자리하면서 대몽항쟁의 중심을 이루어 그 위상이 극에 달하였다. 고려가 몽골의 지배아래 놓이면서, 또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1392)강화도에 이룩하였던 모든 문물·시설과 원인천에 보였던 경원부의 위용이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고는 말았지만, 고려 500년 동안의 인천지역사회는 명실공히 수도 개성에 다음가는 번화했던 사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특히, 몽골 지배 하에서도 고려의 대외교류는 활발하여 개성 외곽에 이슬람(Islam)의 자치적 거주지가 존속한 것으로 보면, 인천지역에도 일찍부터 외국인들의 집단거주지가 형성되어 국제도시로의 면모를 보이지 않았나 추측된다.
「어진고을」이 된 인천(仁川)
고려왕조에 이은 조선은 유교지치주의(儒敎至治主義)를 내걸고 대내적으로는 자급자족적인 토지경제와 유교적인 교화에 힘쓰고, 대외적으로는 중국 명나라와 같이 해금책(海禁策), 곧 쇄국정책을 폈다. 따라서 황해의 해상교통이 전면 금지되었음은 물론, 낸·외국인의 왕래가 극도로 규제되었고, 귀화하지 않은 외국인들은 모두 추방되었다. 사신의 왕래와 대외무역으로 번형하였던 인천지역사회도 자연 그 기능을 상실하면서 평범한 농·어촌으로 변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속에서 고려왕실의 잔재 청산과 중앙집권의 강화에 맞물려 경원부는 인천군(仁川郡;1413)으로 강등·축소되고, 강화·부평등도 군사적의미 만을 지니는 일개 도호부(都護府)로 하락되고 말았다. 경원부의 지난 날 이름인 인주(仁州)에서의'인(仁)'자와, 지방행정구역의 이름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산(山)이난 천(川)을 붙이도록 한 행정구역 개편의 원칙에 따라 '천(川)'자가 합해져서 '인천(仁川)'이라는 행정구역명이 비로소 나오게는 되었으나, 인천지역사회로서는 쇠락의 길로 들어서는 지점이 되었다.
이후 200여 년 동안 인천지역사회는 자급자족적인 한적한 농·어촌사회로 존속하였다. 다만, 세조 때 국방체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강화나 부평처럼 도호부가 되는 변동이 있었을 뿐이다(1460).
해안 지역 방어의 보루
그러다가 1600년을 전후로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을 연달아 겪으면서 인천지역사회는 다시 한번 국방상 요충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일본의 침입을 받을 경우에는(南漢山城)을 보장처(保障處):왕실과 조정이 잠시 피난하면서 전란을 극복하는 곳)로 하고, 대륙세력의 침입을 받을 경우에는 강화도를 보장처로 한다는 전략이 수립되면서 남한산성의 경영과 함께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인천 해안지역의 방어체제와 시설이 새롭게 보강되어 간 것이다. 강화도호부가 부윤(府尹)의 부로(1618), 다시 유수(留守)의 부로(1627) 격상되어갔고, 왕실이 머물 행궁(行宮 ; 강화읍·월미도)과 각종 관아가 건축되었으며, 강화 외성과 내성이 축조되어 갔다. 그리고 때마침 전개된 상·공업 발달에 따른 해상교통로의 확보 요구와도 맞물려 교동도에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이 설치되고(1629) 각종 해안군사시설들[자연도의 영종진(永宗鎭), 강화도의 12진보(鎭堡)·53돈대(墩臺), 통진의 문수산성(文殊山城)등]도 하나 하나 추가되어 갔다.
이리하여 17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인천지역사회가 강화를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한 육·해구의 기지로 변모하면서 왕실의 보장처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어디까지나 행정·군사편제사의 변동이었을 뿐, 이 지역의 사회구조나 주민 생활에 특별한 변화를 가져 오지는 않았다. 다만,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고려 강도(江都)시절부터 추진되었던 강화도의 깃벌 매립사업이 한층 확장되어 오늘날의 강화평야를 이룩하는 지형적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외세(外勢)의 관문
그런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미 중국과 일본에 진출했던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조선에도 통상(通常)을 요구해 오기 시작하자, 이들 군사시설은 보장처의 수호보다는 서양세력의 진입을 저지·차단하는 최전방 방어시설로 기능하게 되었다.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서양세력들이 서해안지역, 그 중에서도 수도 한양(漢陽)에 이르는 입구[이른바 인후지지(咽喉之地)]인 인천해안으로 밀려 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에 진출하려는 서양세력의 끈질긴 시도와 이를 저지하려는 조선의 해금책은 끝내 인천해안에서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 ; 1866)와 신미양요(辛未洋擾 ; 1871)가 그것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의 경우와는 달리, 프랑스와 미국은 이 충돌에서 조선의 집요하고도 처절한 저항을 받았다. 이에, 그들은 모두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약탈로 만족하며 퇴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전쟁의 주무대가 된 강화도는 몽골의 침공때 보다 크나큰 상처를 입었지만, 500여 년 만에 다시 한번 조국수호의 성지(聖地)로 부각 되었다.
방어영(防禦營)이 된 인천도호부
프랑스와 미국의 침공을 물리친 조선정부는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조선 진출을 새롭게 기도하여 오던 일본에게 뜻밖의 장애가 되었다. 일본은 조선 진출에 기선을 제압하고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하야하는(1873) 정국의 변화를 기회로 이른바 운요오호(雲揚號)사건을 감행하였다(1875). 그리고 이 사건의 수습을 빌미로 새로운 수호통상 관계를 요구하였다. 조선정부는 이를 거부하는 회담을 강화에서 진행하는 한편, 인천도호부를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시키고(1875) 포대를 증설하는 등 무력 침공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과 국내 정세의 변화로 끝내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 강화도조약)에 응하고 말았다(1876). 수백년 동안 지속되어 오던 일본과의 교린(交隣)정책이 무너지고, 해금책이 또한 파기되는 단서가 된 것이다.
제물포 개항과 감리서(監理署)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자 중국(청나라)은 조선에서의 일본의 지위를 견제하기 위하여 서둘러 미국을 비롯한 구미 열강들과의 수호통상조약을 주선하였다. 그리고 스스로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常民水陸貿易章程)을 요구·체결하였다(1882). 중국과 일본의 문호개방으로 이른바 은둔국(隱遁國)이라 불리웠던 조선도 그 문호를 세계에 개방하게 된 것이다. 원인천은 바로 이같은 역사의 현장이 되었고, 또 문호개방의 최전방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의 끈질긴 요구로 수백년 동안 한적한 어촌으로 존속하여 왔던 제물포(濟物浦)가 개항되자(1883) 중국과 서양 여러 나라들도 속속 이곳으로 밀려들었기 때문이고, 또 조선정부도 이들의 조선 진출을 가능한 한 개항장에 국한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제물포에는 인천해관(海關 ; 1883)과 인천감리서(監理署 ; 1883)가 설치되고, 각국영사관과 전관조계(專管租界 ; 일본 1883, 중국 1884) 및 공동조계(共同租界) ; 1884)가 들어 섰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각국의 상·공업시설과 종교·교육·문화시설들도 빠르게 설립되어 갔다. 황해를 통한 외국과의 해상교통이 폐쇄된 지 500년 만에 다시 인천지역사회가 국제적 도시사회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천의 개항'을 이 제물포 개항으로부터 기산(起算)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라 보겠다.
일제의 수탈
제물포 개항은 인천지역사회에 또다른 시련을 가져왔다. 외세의 진입과 이질적 문물의 유입에 따른 갈등에서도 그러하였지만, 그 보다는 일본이 원인천을 한국식민지 경영의 발판으로 삼은 데 있었다. 청·일전쟁(1894~1895)과 노·일전쟁(1904~1905)을 치르면서 한국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 일본은 우선 제물포와 한성(漢城)을 잇는 도로와 철도를 부설하고(1899) 이들과 연계되는 항만의 확장·수축에 착수하였다(1906). 그리고 이어 일본의 식량(쌀)과 공업원료(주로 목면)를 확보하기 위한 토지조사사업(1910~1918)과 산미증식계획(1920년대), 수리조합 설립(부평수리조합 : 1923)등을 추진하였다. 인천지역사회는 이과정에서 다른 지역에 앞서 많은 토지와 인력을 수탈당하고 대부분의 농민이 몰락하였다. 그리고 몰락한 농민은 저임금의 노동자와 가계보조적 노동인구(부녀자·아동들)를 증대시켜 조선인의 노동 여건을 더욱 악화시켰다. 인천지역사회에 통곡과 신음 소리가 가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정구역 개편과 인천부(仁川府)
그런데 일본은 이에 더하여행정구역도 개편하였다(1914). 지방 군·면을 폐·치·분·합(廢置分合)함으로써 한국인의 전통적인 생활권역과 공동체 질서를 파괴·약화시키는 한편, 일본인 거주지 중심으로 도시시설을 집중 투자하여 일본인에게만 유리한 일본인 중심의 도시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인천지역에서는 자연 제물포를 중심으로 한 원인천사회가 그 촛점이 되었다. 앞서 경기도 인천군에서 인천부로(1910) 바뀌었던 원인천사회는 이 개편에서 도시지역과 농·어촌지역으로 양분되었다. 인천부는 일본인 시가지를 중심으로 부역(府域)이 크게 축소되고, 나머지 농·어촌지역은 부평을 중심으로 신설된 부천군(富川郡)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각국공동조계와 청국전관조계도 모두 철폐되고, 부의 하부 행정조직도 모두 일본식[町, 丁目]으로 바뀌었다. 인천부는 완전히 일본인 도시로 변하였고, 한국인은 각종 생활편의시설에서 완전히 소외·격리되었다.
이같은 일본인 중심의 행정구역 개편은 일본의 식민지경영이 강화되고 대륙침력정책이 본격화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원인천사회에 일본인 이주자가 크게 증가하자 부역의 확장이 요구되어 1936년에는 부천군에 편입시켰던 원인천의 일부(문학면의 학익·옥련·관교리와 다주면의 도화·용정·사충·장의·간석리)를 다시 인천부에 편입시키고, 이어 중·일전쟁(1937)을 계기로 경인시가지계획이 마련되자(1940) 부천군의 4개 면(서곳·문학·남동·부내면)을 인천부에 더 편입시켜 갔던 것이다. 경인시가지계획이 경성부(京城府)의 서남단에서 인천부의 동북단에 이르는 350㎢ 지역에 7개 공단(중공업·군수공업기지)과 11개의 거주지를 건설하고 김포·부평평야를 절대농지로 하여 식량공급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생활권이 된 제물포
이리하여 인천부는 1910년의 부역, 곧 옛 인천도호부의 부역에다가 부평군의 일부까지 차지하는 넓은 부역을 갖게 되었다. 개항 직후 제물포 중심의 작은 항구도시·상업도시였던 원인천사회가 거대한 항만도시이자 커다란 중공업단지와 농업단지를 배후에 두는 산업도시로 그 모습을 바꾸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인천지역사회는 철저히 일본화된, 일본인 중심의 도시와 농·공단지로 변하여 갔다. 따라서 그만큼 일본인의 억압과 수탈은 심하여 갔고, 그에 따른 한국인이 저항도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개항 직후 개항장에서의 한국인과 일본인간의 마찰·갈등은 극히 개별적이고 간헐적이었다.
비록 일본의 강압으로 개항되기는 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도 18세기부터 사회개혁을 모색·추구하는 기운이 있어 왔고, 또 그 과정에서 외래의 이질적 문물과도 접촉하여 왔기 때문에, 외래문물이나 시세의 변화에 대한 일방적인 거부감 보다는 그에 적절히 적응하고 수용하는 분위기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1897년에 설립된 인천항신상협회(仁川抗紳商協會)는 그 하나의 좋은 사례였다. 제물포 개항과 더불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객주들의 조합인 인천객주회(仁川客主會 ; 1885)를 모체로 사회유지들이 함께하여 설립한 이 협회서의 정립을 꾀하고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인천지역에서 외세에 대한 저항이 무력적 양태로 보다는 노동쟁의나 계몽활동 같은 사회운동에서 더욱 두드러졌던 것도 이같은 분위기가 남달랐기 때문이 아니었나 보겠다.
반일(反日)·항일(抗日)의 물결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일본의 무단적 식민지정책이 강행되면서 한국인의 반일·항일감정은 날로 높아만 갔고, 그것은 점차 조직적 집단적 저항·투쟁을 도모하게 하였다. 3·1독립만세운동은(1919) 이러한 운동 양태를 표출시키는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일본이 3·1운동을 계기로 무단통치를 파기하고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외에서나마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뚜렷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국외에서 임시정부와 광복군(光復軍)이 외교적으로, 또는 무력적으로 광복을 위한 투쟁을 벌이는 동안, 국내에서는 이들과 연계하여 이리본의 지배를 약화시키고 우리 민족의 실력을 배양하려는 다양한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1919년 3월 6일 원인천에서 시작하여 부평,김포,강화 등으로 확산되며 한달 넘게 독립만세를 불렀던 인천지역사회에서도 그 기운을 이어 수많은 조직이 결성되고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개항 후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 온 노동운동과, 기독교회를 중심으로 한 청소년운동은 그 중심에 있었다. 1920년대 초에 전국적으로 전개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금주(禁酒)·단연(斷煙)운동이 인천조선물산소비조합(仁川朝鮮物産消費組合 ; 1923)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또 전국적 민족운동 조직인 신간회(新幹會)와 근우회(槿友會)의 인천지회가 조직되기도 하였으나(1927~1929), 광복에 이르기까지 합법적 또는 비합법적으로 저항과 투쟁을 지속하여간 것은 노동운동과 청소년운동들이었다. 특히 노동운동은 인천소성노동회(仁川邵城勞動會)를 확대·결성한 인천노동총동맹(仁川勞動總同盟 ; 1924)의 지원아래 각 직업별 노동조합들이 조직적으로 저항하여 갔는데, 1930년대 후반부터는 일본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지하로 스며들면서 적색 노동조합의 성격과 무력투쟁의 성향도 지니게 되었다. 이승엽(李承燁)은 그 중심인물이었다.
한편, 청소년운동은 1920년대 초에 인천이우구락부[仁川以友俱樂部 ; 부장 하상훈(河相勳)]와 인천한용단[仁川漢勇團 ; 단장 곽상훈(郭尙勳)]이 조직되면서 20여 개 단체가 결성되어 각기 목적한 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시국강연회·웅변대회 개최, 야학(夜學) 운영, 노동쟁의 후원, 연예·체육활동 등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었는데, 뒷날 이들의 연합체인 인천청년동맹(1925)과 인천여자청년동맹(1926)이 결성되기는 하였으나,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억압으로 인하여 노동운동에서처럼 응집된 조직적 활동을 지속적으로 행하지는 못하였다. 당시 청소년운동이 주로 서울을 통학하는 학생들이나 내리교회(內里敎會)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던 데서 말미암지 않았나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항일운동들은 일본의 식민지배 말기에 전개된 다양한 한민족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을, 우리 인천지역 주민을 광복에 이르도록 보존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광복 이후 한민족이, 인천지역 주민이 민주사회로 새롭게 출발하는 밑거름도 되었다. 일찍이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했던 우리 민족, 우리 주민들이 이러한 운동들을 통하여 민주적 자치활동으 경험하고 민주주의 이념에 동참하게 되었던 것이다. 광복 후 이들 운동을 통해 성장한 인사들이 중앙과 지방에서 지도적 인물로 부상한 사실이나,. 제헌의원(制憲議員)선거에서 90%가 넘는 투표율을 보인 것은 모두 이를 뜻한다고 보겠다.
해방과 「경기도 인천시」
광복 후 한동안 우리 나라는 나라 이름마저 각양각이하게 부를 정도로 다양한 성향의 정치세력들이 난립하여 혼란을 거듭하였다. 미군이 가장 일찍 진주하였다는(9월 8일) 인천지역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군정(美軍政)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경제를 지향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인천지역사회는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미군정 때 잠시 제물포시(1945년 10월 10일~27일)로 바뀌었던 인천부도 1949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경기도 인천시로 정립되었고(1949년 8월 15일), 시의회도 구성되었으며(1952년) 시장 또한 간선(間選)으로 선출되었다(1952년). 그리고 이들에 의하여 일본의 잔재와 미군정의 과도기적 조치들이 하나하나 청산되고 일신되어 갔고, 경제 안정과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시책도 속속 마련되어 갔다. 강화군·김포군 또한 다르지 않았으니, 인천지역사회가 역사상 처음으로 경험하는 민주적 자치행정이었다.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행정과 산업이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다.
쓰라린 한국전쟁의 시련
그러나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북한군의 남침(한국전쟁)은 인천지역사회에 다시 한번 시련을 주었다. 인명의 피해나 주민간의 갈등에서도 그러하였지만, 일본이 남겨 놓고 간 공장과 시설로나마 가까스로 일구어 가던 경제가 거의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휴전(1953년 7월 23일) 후 20여 만명의 이북 피난민까지 수용했던 인천지역사회는 각고의 노력을 다시해야 하였다. 인천항을 수·출입 창구로 하고 그 배후 공단(工團)을 주요 가공 공단으로 하였던 정부 정책과, 인천항을 한국의 관문으로 삼았던 미국의 특별한 배려(한·미친선위원회의 원조)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하여 휴전 이듬해 말에는 원인천에서만도 267개 공장을 갖게 되는 복구를 이루었으나, 자재난·전력난·자금난에다가 기술력의 부족까지 겹쳐 더 이상의 성장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발전의 동맥 : 경인고속도로
인천지역사회의 본격적인 성장은 1960·70년대에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거듭 추진되면서 이루어졌다. 원인천의 임해공단들과 부평공단(경인공단)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가 수출위주로 전개되고 이를 위한 각종 기간(基幹)시설의 확충과 편의시설의 확대가 우선적으로 마련되어 간 것이다. 인천 내항의 도크 확장(1966~1975), 그에 따른 연안부두의 축조(1973), 경인고속도로의 건설(1967~1968), 경인전철의 부설(1971~1974) 등이 바로 그러하였다.
한국 4대 도시로 발전
원인천사회의 이러한 성장은 주변 지역에도 영향을 주어 각종 산업을 발달하게 하고 아울러 원인천사회를 중심으로 인구 증가를 가속화시켰다. 인천시(원인천)가 구제(區制)를 실시하던(1968) 당시, 인천시는 서울, 부산, 대구에 이어 4대 도시로 성장하여 있었고, 지속된 경제발전은 인천시의 산업과 사회를 더욱 성장시켜 인구 100만명을 돌파, 인천직할시로 승격하게 하였다(1981). 그리고 나아가서는 세계화·정보화의 추세와 중국의 개방화 정책으로 인천지역의 지정학적 비중이 더욱 높아지자 1961년에 폐지된 지방자치제의 부활(1991)과 연계하여 인천광역시로 확장·승격되기에(1995년 3월 1일) 이르렀다. 인천지역사회가 지난 날 경험하고 축적한 다양한 토양을 바탕으로 피어낸 한송이 장미꽃[인천광역시 시화(市花)]이고, 인고(忍苦)의 세월을 거듭하여 획득한 월계관이 되겠다.
밝은 미래로 도약하는 인천
인천지역사회는 지금도 개발과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인천항과 인천국제공항(2001년 3월 개항)의 확장, 공유수면의 매립과 각종 산업·물류단지의 조성, 관광·레저단지와 다국적 업무단지의 건설, 인천지하철(1999년 12월 개통)과 고속화도로의 확대, 교육·문화시설의 증대 등이 친환경적 복지도시·문화도시의 건설과 함께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인천지역사회의 앞날이 밝기만 한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인천지역사회에는 아직도 과거 수도 주변의 수도 보조적·수도 의존적 의식과 성향이 적지아니 잔존하고 있다. 인천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하루속히 극복해야 할 지난날의 잔재가 아닌가 본다. 인천광역시는 이제 260만 주민의 대도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