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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세상이 기다리는 교회
I. 재림교회 공적 역할에 대한 평가
1.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실용주의적 접근
역사를 살펴볼 때, 재림교회는 일관되지 않고 때로는 모순되는 방식으로 공적인 영역에서 인권의 문제에 반응해 왔다. 노예제도 반대와 노예제도 폐지 운동은 교회의 초창기에 선구자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지만, 인종 관계와 여성의 권리에 관한 문제는 20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건강교육에 대한 교회의 강조와 종교적 자유에 대한 주장으로 인해 인권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생겨났지만, 교회의 구성원들은 민족주의, 전체주의 및 양성평등과 같은 다른 분야에서는 인권 원칙을 분명히 적용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공적인 영역에서 인권 문제를 포함한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이러한 재림교회의 모순과 불일치는 사회를 향한 공공신학과 인권 윤리의 결여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어드벤티즘(Adventism)이 막 시작된 초기에, 그 운동에 동참했던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더 넓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그 역할을 정의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기존의 기독교가 집중을 소홀히 했거나 잊어버렸던 ‘현재진리’(present truth)라는 특정한 교리에 관심을 돌렸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구체화하고 조직에 집중하며 자기 이해를 명확히 하면서 그 사명을 찾는 동안, 재림교회는 교회 역사 초기의 경험처럼 더 넓은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행동에 집중할 시간과 기회를 거의 가지지 못했다. 그저 교회 구성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인종차별과 관련한 인권 문제만이 교회의 반응을 이끌어 냈을 뿐이었다. 어쩌면 초기 재림교회가 자기 이익의 윤리로서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러한 실용적인 반응을 했던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구성원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만 사회적 불의의 문제에 반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정도로 성장했다. 또한 이제는 더 큰 비종교적 문제들까지도 교회의 관심사가 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재림교회는 일관된 공공신학을 세워야 한다.
2. 사후대응적 접근
대부분의 경우, 재림교회의 정책은 선제적이라기보다는 사후 대응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재림교회의 반응은 미리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보다는 나중에 수정하거나 변증하는 방식이었고, 선험적인 원칙에 근거하기 보다는 성격적으로 실용적인 것에 더 가까웠다. 예를 들어, 종교 자유의 문제, 인종 관계, 그리고 교회의 초기에 있었던 군대 참여 등이 그런 경우였다. 보다 최근에는 과거와 유사한 실용주의적이고 반응적인 의사결정 패턴이 민족주의의 분열 문제와 여성의 역할의 범위를 설정하는 문제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현재의 재림교회는 당면한 문제들에 집중하는 것과 교회의
가능성을 펼쳐 나가는 것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그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끊임없는 변증과 방어적 태도 대신에, 특별히 진정한 그리스도인 삶에 매우 기초적인 인권 문제 등을 포함하여 공적인 영역에서의 여러 분야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보수적인 재림교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교회는 분명 선구자들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러한 보수적인 재림교인들의 이해와는 달리, 교회는 단순히 내부의 투쟁과 논쟁에 집중하기 보다는, 선구자들의 신념을 이 사회의 더욱 적극적인 요소들을 향하여 실용적이고 긍정적인 방법으로 실천하는 것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과거에 있어서, 급진적인 개신교 요소는 재림교회 정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급진적인 제자도의 모본과 증거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켜야 하며, 이 특별한 부름에서 우리는 다른 교회들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들의 거대한 무리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사회 변혁의 과제와 분명히 연결시킴으로써, 재림교회 정체성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발전시켜야 한다.
초기의 재림교회는 확실히 20세기의 상반기보다 훨씬 더 넓은 부분에서 그 시대의 도덕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심지어 정치적 딜레마에까지 관여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빈곤 지역에서 그 현상이 계속해서 유지되고 인종적 긴장감이 고조되며 동등한 기회 영역에서 급격한 감소를 보이고 있는 것은 교회의 사회 인식과 불의, 불평등에 대한 반응이 그만큼 적극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사회적 책임윤리에 대한 적극적인 의식이 제도주의에 의해 대체되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3. 사회 신학적 연구에 관한 관심의 증가
이러한 경향은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재림교회 안에서 사회가 당면한 다양한 문제를 사회적 신정통주의(social neo-orthodoxy)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모습도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신학은 특정 인권을 향한 재림교회적 태도의 반전에서 주요 요인으로 확인되었다. 보다 최근에 교회의 신학자들은 두 가지 이유로 지금까지 무시되어 온 사회 신학적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첫째는 일반적인 사회적 풍토에 대한 대응이고, 둘째는 교회 밖의 학자들과의 대화의 결과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재림교회 안에서 그것들이 다루어지기 시작했고 실질적인 원칙들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인종에 관계없이 리더십의 직책을 얼마나 서로 동등하게 공유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생각, 재림교회 신앙에 대한 새로운 강조, 여성의 역할과 평등의 영역에서 새로운 발견을 다시 한 번 강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 인권과 사회윤리를 다루는 기사들 중 상당수는 재림교회 내의 진보적 성향의 잡지인 스펙트럼(Spectrum)에 의해 출판되고 있다. 어떤 저자들 중에 일부는 교단적 고용을 벗어나 독립적인 사역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재림교회 신학계에서 신정통주의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오늘날 이 사회 속의 교회가 공적인 영역에서 사회적 책임과 윤리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신학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전통주의자들이 정의, 평등, 자유를 위한 싸움에서 자리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적 영역에서의 사회적 관심사가 단순히 독특한 재림교회의 가르침을 피하기 위한 쉬운 선택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그것은 보다 특별한 재림교회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일반 기독교적 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선택이어야 한다. 재림교회 안에서 확인될 수 있는 전통적인 신학적 주제들은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공적인 책임윤리의 실천에 관심을 가지도록 장려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창조의 주제, 하나님의 도덕법의 중요성, 안식일의 의미, 예언적 역할, 하나님 왕국의 두 가지 측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확실성 등이 그것이다.
4. 개인적 차원의 사회적 책임윤리의 실천
공적인 영역에서 사회적 책임윤리의 실천을 위해 다수의 재림교회 프로그램들을 개별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간과해서는 안 되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이다. 분명히 많은 재림교인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필요와 요구에 압도당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몇몇은 그들의 한계가 허락하는 데까지 무엇이든 실천에 옮기기로 결정했음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공식적으로 전 세계적인 재림교회 프로그램이 된 것들이 처음에는 매우 작게 개인적 차원에서 시작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헨리 가드너(Henry Gardner) 부인의 집에 있는 가정 친교그룹에서 몇몇 사람들이 ‘도르가와 자선 단체’(Dorcas and Benevolent Association)를 결성했다. 켈록의 개인적인 노력과 카리스마는 시카고 메디컬 미션(Chicago Medical Mission), 라이프 보트 미션(the Life Boat Mission), 메디컬 미션 및 자선단체(Medical Missionary and Benevolent Association) 등과 같은 기관과 제도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소위 ‘수확운동’(Ingathering) 프로그램은 보육원의 세일즈맨이었던 재스퍼 웨인(Jasper Wayne)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로버트 베이넘(Robert Bainum)은 개인이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강한 열망으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라고 할 수 있다. 재림교회 개발 및 구제 기관(Adventist Development and Relief Agency, ADRA)과 재림교회 난민 돌봄(Adventist Refugee Care), 크로아티아 구제 기구(Croatian Relief Organization) 및 다른 유사한 기관들은 모두 개별적인 재림교인에 의해 시작된 것들이다. 이러한 개별적인 실천과 노력은 가난한 사람들, 난민들, 혜택 받지 못한 소수자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큰 성과를 가져왔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재림교인으로서 우간다의 수상인 바비 물룰루 키세카(Babi Mululu Kisekka)와 같이 중대한 정치적 역할을 하는 것이 매우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사람들에게 올바른 태도와 사랑의 마음을 실천할 때 그것이 더 큰 일을 이룰 수 있음을 이들 개인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재림교인들 각자가 사회적 책임윤리에 대한 관심에서 어떤 역할을 맡든 간에,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고 고양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5. 사회적 책임윤리에 대한 재림교회 해석학의 재정립의 필요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당신의 생애에서 직접 모본으로 보여주셨던 것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이 이타적인 봉사는 어떤 사회적 책임윤리 이론 중에서도 가장 높은 소명이라고 할 수 있다(요 15:13). 그것은 하나님의 공통된 아버지성과 하나님의 이미지로 창조된 다른 사람들과의 공통된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또 다른 인간에 대한 내적 관심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의 이웃에 관심을 가지며, 그의 이웃들의 권리를 보호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오직 이런 맥락에서만이 재림교회의 재림 교리, 안식일과 안식년 교리, 십계명의 맥락과 하나님 왕국의 원칙이 의미 있고 더욱 적절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교리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기독교 현실주의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구원과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통해 표현된 사랑으로부터 이기심 없는 동정심과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에 관한 관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미 세운 왕국에 대한 반응으로서만 그리스도인은 그 왕국의 모든 측면과 책임을 떠맡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복음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는 복음이 된다.
이 땅에서 다양한 공적 역할의 실천을 위한 노력의 일시적 결과에 상관없이, 영광의 왕국이 여전히 실현될 것이라는 약속 안에서 영구적이고 궁극적인 결과가 보장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여기서 그리고 현재(here and now) 실현된 종말론의 효과는 동일한 종말론의 미래적 측면에서도 여전히 충족되어야 한다. 이 두 단계 사이에서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눅 19:13)는 예수님의 계명은 의미 있게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림교회는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 재림교회 해석학은 아직 사회적 윤리와 관련해서는 초기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문자적인 접근 방식은 역사적, 문법적, 구문적, 문학적, 그리고 사회학적인 맥락에 대한 질문을 어둡게 했다. 또한 문화적 조건화(cultural conditioning)의 측면은 ‘현재 진리’라는 어드벤티즘에서 구체화된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시와 함께 고려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계시의 올바른 이해가 사회적 책임윤리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한 현대적 이해에 적용되는 것이라면, 해석학을 더욱 강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6. 보다 실천적인 행동주의로의 전환 필요
마지막으로, 재림교회 신학은 묵시와 종말론적 측면뿐만 아니라, 그것이 아무리 어드벤티즘과 자기이해적 측면에서 중요하다 하더라도, 많은 재림교회 교리가 가리키는 사회윤리적, 사회정치적 이해관계에 관해서도 역동적이고 활기차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안식일 교리에 대한 단순한 변증적인 견해 대신에 재림교회는 그 의미를 더 깊이 연구하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재림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날에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 방어적으로 논쟁하기보다는, 진정한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사회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탐구함으로써 이 사회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안식일에 대한 앞으로의 논의는 단순히 ‘언제’와 ‘어떻게’의 문제에서부터 ‘무엇’과 ‘왜’의 문제로 바뀌어져야 한다. 평등, 위엄, 삶의 안식적 방식, 해방, 자유의 날과 같은 훌륭한 개념들은 단순
히 인권에 뿐만 아니라, 지구와 환경 윤리와 같은 다른 일반적인 권리들과도 관련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재림교회는 안식일의 깊이를 보다 자세히 숙고하고 안식일 개념의 아름다움으로 공동체를 풍요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재림교회 신학의 종말론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 사이의 이러한 균형은 재림교회가 가정하는 현대의 예언적 공동체로서의 역할, 특별히 하나님 왕국의 두 개의 단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아직’(not yet)인 왕국의 두 번째 단계로서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시작된 ‘여기서 지금’(here and now)의 첫 번째 단계와 동일해야 한다. 재림교회 사상에서 대부분 놓치고 있는 이러한 교리들의 사회적 측면들은 더욱 연구되어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공적 영역에서 적용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기독교로서의 재림교회는 교회를 시작하신 그분을 바라보아야 하고 사회적 행동에 대한 그분의 태도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땅에서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관심은 분명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것과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눅 4:18-19).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위한 당신의 삶과 같이 관심과 사랑의 삶을 추구하도록 초청하신다. 굶주린 자에게 음식을 먹이고, 목마른 자와 벌거벗은 자와 외국인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고, 병자와 억울한 죄수들을 돌보는 사심 없는 윤리는 ‘지금’과 ‘아직’ 둘 다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마 25:31-4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공적 책임에 대한 문제는 교회가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하고 창조된 인류에 대한 그분의 소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궁극적인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재림교회는 이 시험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II. 재림교회 공적 역할에 대한 제안
1. 사회적 책임윤리에 대한 재림교회의 신학적 이해의 필요
지역사회 봉사가 단순히 선교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더 깊은 신학적 이해에서 실천될 필요가 있다. “교회는 봉사를 위하여 조직되었으므로” 기독론, 교회론, 종말론적 관점에서 다각적으로 공적인 영역에서의 책임 있는 사회윤리의 실천의 의미가 되새겨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이해에 대한 노력은 교회로 하여금 바른 성경적 토대 위에서 균형진 신앙과 실천의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한 하나님의 주권 사상과 청지기 신앙, 만인제사장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가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의 삶이 이미 시작된 새로운 시대와 지금 세대가 긴장을 유지하면서 공존한다고 말한다. 긴장 가운데서 공존한다는 이 성경적 개념이야 말로 역사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창조적 힘이다. 그 안에서 언약 백성은 생명의 하나님의 심판과 해방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 변화는 하나님 백성들 각자의 개인적 환경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의 성실함, 즉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을 드러내는 우리 삶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물리적 실재를 다루는 지식과 인간의 능력이 놀랍도록 확장된 시대이다. 과거에는 제기되지 않았던 수많은 도덕적 문제를 제기하며 교회는 그 문제의 대부분에 대해 공적 판단과 참여를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신앙의 중심으로부터 목소리를 낼 때 두 가지 근본적인 신념 즉 하나님은 죄지은 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종교적 정체성은 통과할 수 있는 경계로 둘러싸여 있음을 전제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진공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지역공동체 안에서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교회가 분명한 공적 영역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이것을 시민공동체와 기독교공동체의 관계로서 설명했다. 시민공동체라는 하나의 큰 원 안에 기독교 공동체라는 작은 원이 존재하는데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위치하신다. 그리스도는 두 공동체 모두의 중심이 되신다. 그리스도는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더 큰 범위의 온 세상에서도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만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 일상의 삶의 무대인 시민 공동체 안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더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루터는 이 개념을 “그리스도인들은 다름 아닌 이웃에게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러므로 교회 역사의 현재 시점에서, 교회가 세상에 그리스도의 진리를 실현하는 대안문화를 납득시키는 것보다 더욱 절실한 것은 교회가 스스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는 분명 “하나의 문화 혹은 문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다양한 문화와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모든 외적인 사회관계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공적으로 행동할 때마다 공적 영역의 다양한 사항들 즉, 어떤 질문, 이유, 위기, 문화적 동향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특정 이슈들에 대해 사적인 영역을 초월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할 수 있도록 신앙의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의 믿음에 수반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한다.
2. 사회적 책임윤리에 대한 강조와 교육의 필요
오늘날의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인 대중교육(popular education)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실행할 필요가 있다. 인류의 삶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인격을 드러내는 것이며, 자신을 망각한 이타적인 봉사는 개인을 활기 있게 만드는 큰 법칙이기 때문에 교회는 깨어 있는 공동체의 영향을 통해서만 제도주의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다. 즉 교회는 그 자신의 영속성과 자기계발을 위해서도 사람들을 교육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은 공동체에 의해서 그 힘과 역량이 발휘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정, 교회, 학교와 같은 공동체의 긴밀한 연결을 통한 대화의 협조가 필요하다. 교회는 그동안 지역사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삶보다는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삶에 더 많은 관심과 초점을 맞추어왔음을 부
인할 수 없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교회와 사회 모두에게 불행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교조주의나 교회중심적인 교육은 분명히 지양해야 한다. 조지 앨버트 코우(George Albert Coe)는 이것을 사회화된 종교교육이란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도덕 교육과 훈련을 포함하여 민주적 시민으로서의 자세, 활동, 습관, 목적을 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교육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품성과 인격의 개발을 포함한 전인적(wholistic) 교육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이 사회가 현재의 상황에서 직면한 다양한 도전들을 인식하고 그것들의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상황성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문화적 가치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수용 가능한 윤리적 이상을 제시하고 실천할 수 있는 보편성도 함께 지향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기독교가 공적인 영역에서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공동선을 지향하고 사회공동체에로의 공헌을 위한 개혁이 되어야 한다.
재림교회는 28개의 신조들 가운데 스물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의 품행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위한 소금이 되어야 함을 언급하면서도, 그보다는 오히려 세상과 분리되어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에 더 많은 궁극적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세상에 거하면서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얼마나 달라야 할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생활양식을 지녀야 한다. 그것은 다르게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원칙에 따라 살도록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그들이 그대로 살기를 원하시는 생활양식은 그분의 사업을 능률적으로 수행케 만듦으로써 그들을 당신의 피조물로서 충만한 가능성에 도달하게 한다.
기본교리에는 성전으로서의 몸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지, 또한 어떠한 음식을 멀리하고 어떻게 의복을 입어야 하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 생활양식의 표준으로써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사회 공동체의 공적인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삶의 윤리를 실천해야 하겠는지에 대한 언급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그 구체성 또한 떨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현재 재림교회의 방향성이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앨런 록스버그(Alan Roxburgh)는 교회 안에 변화의 필요성을 자각하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지만, 문제는 그들에 대한 적절한 교육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향과 방법을 모색하는데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교회의 눈이 더욱 세상을 향하도록 지도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일상의 삶의 영역인 지역사회에서의 실천적인 삶의 이야기가 드러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오늘날 세상에서 변화에 대한 가장 부정적으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기관들 가운데 하나가 교회임을 기억해야 한다. 많은 경우에 교회가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작 교회 자체는 변화하지 않으면서 단지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 역시 교회가 공적인 영역에서 진정한 교회로써 존재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교회가 의도적으로 변화에 대한 분명한 목적과 실천의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교회 구성원들이 교회 안과 밖에서 균형진 삶을 살도록 강조하면서 사회적 책임윤리를 교육하여 보다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이란 결국 교회 안에서만이 아닌, 세상에서 십자가를 감당하며 그것이 요구하는 삶
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때때로 그리스도의 제자직 수행을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이나 퇴거 정도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는 지역 사회를 단순히 전도의 대상만으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 공동체에서의 사랑을 나누는 책임적 삶을 통해서 이웃들의 목소리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 구성원들이 이러한 논의에로의 접근과 이해가 가능하도록 다양한 지원과 정보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 분야는 하나님의 주권의 지배를 받는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한다. 교회가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영역들과의 대화의 노력도 필요한데 이러한 분야에 속한 재림교인 학자들과 가능한 물적 자원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교회와 사회 사이에서 효율적인 다리 역할을 감당하게 함으로 양자 간의 바른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3. 재림교회의 한국적 선교 모델의 개발을 위한 노력과 실천의 필요
선교적교회는 21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도래한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의 포스트-포스트모던(Post-postmodern) 세대들을 향한 선교적 접근을 위해 출현한 운동이다. 선교적교회는 교회 안에서 신앙과 고백이 중요한 것처럼 교회 밖에서의 믿음의 실천도 똑같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지역사회 공동체 안에서 버림받고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정의가 실현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친근하고도 진실한 인간관계를 통해 자비와 은혜가 임하게 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세상과 교회 사이의 경계선은 분명히 필요하다. 경계선이 없으면 공동체는 소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는 경계선을 한 곳으로만 계속해서 고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부를 향해 한없이 경계선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가 적극적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곧 세상을 향한 가장 강력한 공격이라고 이해했던 본회퍼와 결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의 사역은 끌어들이는 방식(attractional) 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성육신적(incarnational) 사역을 결합하여 ‘곳간에 저장하는
것’과 ‘추수하는 것’ 모두에 동일한 관심을 가지는 선교적교회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성육신적인 사역은 어느 특정한 그룹의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문화를 인정하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자연스럽게 이해시키기 위한 선교적 수단을 모색하고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과정에서 교회가 자발적으로 교회 밖으로 나가서 지역사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문화와 삶 속에서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복음을 구체화시키고 현실적이고 영속적인 동참을 통해 그들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본회퍼가 ‘궁극이전의 것’ 환경에서 ‘궁극적인 것’을 기다리면서도 궁극이전의 것에서의 진지성을 강조했던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가 속해 있는 위치를 고수하면서도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에서 기독교 정체성을 확립하고 능동적으로 문화 속에 참여함으로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세상에 대한 교회의 참여는 단순히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어떤 비전을 제시하고 사회제도를 변화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또한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개인의 변화를 위해 살아가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삶 전체가 자신의 전 존재(whole being)를 통해 인간의 행복과 번영(flourishing)을 위해 노력하고 공공의 유익을 위해 섬기는 것과 관련이 있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개인적인 것과 공동체적인 것이 구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이 서로 보완하고 의존하면서 통합을 이룰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참여는 문화의 모든 영역과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하고 모든 영역에서 선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이 과정은 매우 긍정적이고 반드시 필요하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교회 밖으로부터 그들의 신념과 관행에 대해 다시 심사숙고할 수 있게 만드는 예언적 자극과 도전이 필요함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예언의 역전(reverse prophetism)이라고 표현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외부의 자극들로 인해 성경의 내러티브와 공명하는 과정을 통하여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며 그들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 일하며 모든 이들의 삶이 풍성해지고 그들 각자가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지혜롭게 이끌어 갈지를 배우는 것이다.
오늘날은 복음의 명제를 분명히 이해하기 어려워하거나 그 이해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자신 밖으로 끌어내어 그리스도의 현실과 직면하게 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초기 교회의 영적인 부흥과 성장은 그들의 논증이 이교들보다 탁월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무엇인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옳은 믿음(orthodoxy)은 그 하나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옳은 행실(orthopraxy)을 끌어낼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발휘할 수 있다. 옳은 믿음을 옳은 행실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조언했던 것(딤전 4:7)이나 베드로는 지성(mind)과 마음(heart)과 몸(body)이 영적 성장을 위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설명(벧후 1:5-8)했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재림교회는 서구교회들이 실천하고 있는 선교적교회론의 내용들을 참고로 하면서 한국적 상황에서 적용 가능한 것들을 찾고 지역교회별로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 지역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지역사회에 다가가기 보다는 이미 그 지역사회에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면서 영적인 삶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지역사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하기 위해 교회가 변화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먼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4. 지역사회의 공동체성 개발을 위한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창조
애널리스트인 정희선은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최근 일본의 수도인 도쿄를 중심으로 불고 있는 매우 인상적인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로서 “콜라보”(collabo)를 그 특징으로 들었다. 품질만으로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업들이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명품 브랜드인 까르티에(Cartier)가 편의점을 열고, 여성 잡지사인 린넬(リンネル)은 주택을 설계하여 판매한다. 물건이 아닌 경험을 사고 싶어 하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자동차 회사 렉서스(Lexus)가 카페를 열어 브랜드와 삶을 연결시키고, 화장품 회사가 독서모임이나 건강음식을 체험할 수 있는 복합공간을 제공하고, 의류 브랜드가 호텔을 오픈할 뿐만 아니라, 백화점을 그간의 통념을 깨고 1층 전체를 식당으로 만들며 이발소에서 술을 팔고, 편의점이 피트니스 센터를 개설하는 등 고객들에게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통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이야기(story)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호주에서 시작된 멘스 쉐드(men’s shed)는 지역사회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는 운동이다. “어깨에서 어깨까지”(shoulder to shoulder)라는 슬로건을 가진 이 운동은 일반적으로 서구사회의 가정에서 집 마당에 위치한 창고(shed)를 지역사회에 개방하여 연령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개인의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서로의 건강과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것의 효용과 가치는 효율적은 다양한 연구를 통해서도 증명되었는데,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 99.5%의 응답자들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가치를 발견했다고 응답했으며, 97%는 자신들이 지역사회 공동체 안에서 소속감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또한 90%의 응답자는 자신이 지역사회로부터 잘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오레곤 주에서 시작된 킨포크(kinfolk) 역시 공동체성 지향적이다. 텃밭에서 가꾼 채소들로 요리를 하여 주변의 가족들과 이웃들을 초청하여 함께 어울려 소통하면서 느리고 여유로운 삶을 공유했던 것이 이제는 낯선 사람들과도 음식을 나누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소셜 다이닝(social dining) 문화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공동체성을 위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기독교가 그것에 오히려 더욱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믿는 “십자가의 도는 단지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
니라 길이자 방법이며 원리이자 방식이”기 때문이다. JR 우드워드(JR Woodward)는 이제 교회가 새로운 운동을 일으켜야 함을 주장하면서 공동체와 지역사회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 사랑과 경청, 너그러움과 환대를 특징으로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하나의 방법으로 그가 제안한 것은 식탁을 통한 교제(shared table)이다. 실제로 예수가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당부하셨던 일 한 가지가 바로 “함께 먹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찬 공동체(eucharistic community)로서 식사는 그리스도인 모임의 표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분명 환대, 소속감, 그리고 은혜의 표기이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참여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실습이다. 후한 대접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다.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이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낯선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먹는 것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기독교 안에서 시작되고 있는 만찬교회 운동(dinner church movement)은 매우 의미 있는 것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현재 미국의 기독교 안에서 보수나 진보, 도시나 시골 등의 지역에 상관없이 전국적으로 성장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성경 속에서 나타난 예수의 사역은 많은 부분이 식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사역이었음 주목한다. 그리고 그것은 생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기쁨에 관한 것이고 공동체 형성에 관한 것이었다. 평범한 식사의 경험을 통해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우리 일상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실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들의 참여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공동체에 대한 심오한 필요를 충족시킨다. 이것은 기독교의 단순한 선교적 모델이 아니라 실제적인 실천이라는 점에서 매우 구체적이고 특정한 방법이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개방적이며, 식사를 함께 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이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점에서 맥락적이다. 또한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다양한 역할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참여적이며, 이웃과 낯선 사람 등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공적이며, 예약이나 정해준 수 없이 모두가 환영받는다는 점에서 환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유된 식탁을 통하여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사회에서 낯선 이들을 환대하고 소통하며 그들을 포용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주적 보편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재림교회는 이처럼 지역사회의 공적인 영역을 향한 실제적 접근이 가능한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개발하고 사회에 제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5.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위한 대비와 전략적 접근의 필요
많은 미래학자들은 제4차 산업혁명 시대가 계층 간의 양극화와 세대 간의 단절을 악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이러한 시대일수록 일자리 문제의 해결은 큰 사회적 이슈가 될 것이기에 이에 관한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지구의 역사를 살펴볼 때 새로운 일자리는 기존의 산업에서보다는
새롭게 등장하는 산업에서 창출되었다. 일자리는 개인과 기업, 또한 사회 모두의 가치 창출과 가치 분배를 위한 연결고리이기 때문에 미래의 산업 환경에서는 더욱 사회 전체의 생산과 분배의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시대의 인공지능 로봇의 등장과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등은 분명히 인간의 노동력을 빼앗아 갈 것이지만, 창의력을 요구하거나 인간의 감정을 인지하는 업무는 여전히 인간의 역할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교회가 공동체의 유익과 공공선의 실현을 위해 지역사회에서의 참여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전 세대를 아우르는 교육적인 방향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Z세대는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낯설지 않을 것이지만, 기성세대에게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는 생소함과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특별히 양극화의 심화될수록 사회의 취약계층과 피해계층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 구축을 위해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Z세대를 위해서는 감성과 감정을 발전시키고 바른 윤리를 교육이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여 제공하고, 기성세대를 위해서는 정부가 개입하여 평생교육분야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공동체 안에서 교회가 바른 중재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 안에서의 정체성과 신앙의 회복만을 목표로 했던 것이 아니라 사회의 현실까지도 염두에 두고 사회적 윤리를 책임 있게 실천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는 포스트모던 문화와 디지털 문화가 공존하는 시대이다. 따라서 교회는 포스트모던 상황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보다는 기계와의 소통을 하는 세대들을 향하여 관계성에 근거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하다. 작은 규모로 자연스럽게 아래서부터 시작하여 이웃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또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위해서 그들 가까이에서 관계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성을 포용하고 수용하면서 목적지와 더불어 그 여정의 중요성도 강조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6. 지역사회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그리스도인 삶의 필요
현대를 일컬어 기독교는 들리지만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시대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Yes Jesus, No Church”라고 외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서 교회의 사회에 대한 책임적 윤리를 표현하는 방법은 분명 세상의 것과는 질적으로 달라야 한다. 가령, 민주주의 국가에서 투표는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는 과정으로서 자신들 스스로의 뜻을 표출함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수단이다. 전통적 정치의 틀 안에서 도덕적 가치를 기준으로 투표하는 사람들을 ‘가치관 투표자’(values voters)라고 표현하는데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부류에 속했다.
교회는 분명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예언자적 음성을 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관심사는 단순히 낙태나 동성애와 같은 어떤 사회적 윤리 문제들과 싸우고 종교의 자유를 수호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특징을 강화하는, 즉 성경에서 근거한 일종의 ‘유수기 동안의 이방인’(strangers in exile) 의식을 강화하는 형태의 삶이 필요하다. 그래서 로드 드레허(Rod Dreher)는 진리가 공동체 안에서 실현될 수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이 사회 속에서 필요함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배타적 공동체가 아니라 현대 사회의 고립과 파편화의 흐름을 되돌릴 수 있는 공통적 기관들을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때대로 정치가 문화적 혹은 종교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은 종교적 회심과 문화적 변화이기 때문에 그것을 정치인들에게만 맡긴다는 것은 스스로의 유약함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업은 내적 질서를 회복해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러한 공동체의 개발과 구축을 통해 세상에 대한 대안적인 공동체로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 땅의 사람들로 하여금 분명하게 인식하고 눈에 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책임과 의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하여 소돔의 죄악에 대하여 자신만 옳다는 교만, 음식물의 풍족함과 더불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돌아보지 아니한 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신다(겔 16:49). 교회는 소극적인 죄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실천을 등한히 하는 것으로도 하나님을 잃어버릴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는 것”(약 4:17),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는 것(요일 3:17) 등은 예수께서 떠나가라고 명령하신 왼편에 있는 자들이다(마 25:41-46). 그러므로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교회 공동체로서, 혹은 그리스도인 개인으로서 실천할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내용들을 연구하고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제임스 파울러(James Fowler)는 공적교회를 개인의 신앙을 성숙하게 하여 통전적으로 보다 공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프락시스(God’s praxis)를 실천하는 교회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지향하는 프락시스는 단순히 교회 울타리 안에서 그리스도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프락시스(ecclesial praxis)가 아니라, 그 실천적 범주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체로 확대된 개방성, 타인과의 유대를 강조하는 연대성,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평등성 등이 나타나야 한다.
이 시대의 사회는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형이상학적인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의미와 가치를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로부터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적인 환경에서 경험되는 시민사회에서 현대 기독교가 공적인 이성(public reason)을 바탕으로 비판을 넘어 상호 공존을 위한 대화와 합의의 과정을 통해 기독교적 정체성을 바르게 실천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아미타이 에치오니(Amitai Etzioni)는 좋은 사회의 요소로서 국가와 시장, 공동체를 언급하는데, 그 중에서도 공동체가 좋은 사회의 가장 주요한 요소임을 밝히면서 이 세 가지가 모두 보완되고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자유를 앞세우기 보다는 다른 사람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황금률로써 실천할 때 바른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예배드리면
죽인다고 외부로부터 칼의 위협이 가해질 때 신앙적 양심에 따라 예배드리는 것은 분명 신앙의 행위이다. 그러나 예배의 모임 그 자체가 칼이 되어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건강을 위태롭게 한다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모이지 않는 것도 신앙임을 오늘날 현대 교회는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공동체에 대하여 행복과 평안을 주는 유익한 조직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 속에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분명한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와 관련하여 현대 기독교가 지역사회에 보여준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과히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비춰질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사랑을 말하고 그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누구와 무엇을 향한 사랑인지는 보여주지 못했다. 공동체 안에서 상생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서로 간에 최대한의 상식을 만들어 가면서 존중과 배려가 바탕이 된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풀어가는 현대 기독교의 모습은 매우 안타깝다고 할 수 있다.
현대 기독교는 지역사회에 대한 더 깊은 예의와 품의를 가지고 그것의 문제에 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지역사회의 번영과 발전은 번창하는 민주주의에 매우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공동체 안에서 공유된 의미가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잃게 되었을 때에는 사람들은 그것을 대신하기 위한 다른 공동체를 쉽게 만들어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지역사회 공동체에 대한 지극히 선택적 관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사실 이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사람들은 지리적으로, 정치적으로, 또한 문화적으로 동질화된 이웃과 심지어는 미국의 경우 주(states)까지로 그들 자신을 편향시키려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지역사회를 포기하거나 다른 지역사회를 스스로 선택하는 대신에 어떻게 지역사회를 돌볼 수 있을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필수적이다. 동시에 지역시민의 참여 문화를 활성화하는 방식으로 지역사회에 참여하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방법도 모색해야 한다.
7. 지혜로운 복음증거를 위한 선교적 전략의 필요
교회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선교정신이다. “교회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으로 “봉사를 위하여 조직되었으”며 교회의 “사명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신 것이었다. 교회는 불이 탐으로써 존재하듯이 교회는 선교함으로써 존재한다(The Church exists by mission, just as fire exists by burning)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포스트-크리스텐돔(Post-Christendom) 교회는 포스트모던 환경 속에서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수용자의 입장에서 보다 열린 접근이 가능하도록 고민해야 한다. 다원화된 세상에서 교회의 주된 사명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부질없는 희망에서 벗어나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고 서로간의 문제를 해결하며 더불어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앙의 지혜를 나누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내용 역시 선교였다(마 28:16-20, 요 20:21). 복음을 나누는 것은 이웃 사랑의 가장 큰 표현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듯이(요 3:16), 그리스도인도 타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킹은 “우리 우주의 중심에는 더 높은 실재, 곧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의 나라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러한 명령에 대한 순종이 동기화되어서 이웃에게 복음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는 복음이 그들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해기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고후 5:14).
복음을 나누는 것에도 매우 세심한 지혜가 필요한데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의 복음전도는 더욱 그러하다. 바르트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의 그림처럼 십자가 밑의 침례요한이 한 손을 뻗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킴으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복음을 나누는 과정에서 신앙을 강요하거나 단순한 그리스도인 책임 이행에 대한 위안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재림교회 성경학자인 존 폴린(Jon Paulien)은 산상수훈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에서 교회가 추구해야 할 두 가지 성경적 선교모델을 제시했다. 그는 예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렇게 되라고 명령하신 빛과 소금의 개념으로부터 요새모델(fortress model)과 소금모델(salt model)을 재림교회의 선교적 모델로 제안한다. 성경에서 이 두 모델의 실례들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사도바울(소금모델)과 야고보(요새모델)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것이 되었다고 고백했다(고전
9:19-23). 그러나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남아 사람들과 함께 요새를 지켰다. 그는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 안에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있다고 말했는데, 야고보는 바울이 하는 일에 대하여 항상 편하지 않은 마음을 가졌던 것처럼 보인다(행 21:17-21, 갈 2:1-10).
둘째로, 예수님과 침례요한의 사역에서도 이 두 모델이 발견되어진다. 침례요한은 광야에서 살았다. 사람들이 그에게 가까이 오지 않으면 그의 설교를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기본배경에서 사역하셨다. 그분은 가버나움에도 사셨고, 사람들과 섞이셨다. 도시에서 도시로 다니셨고 거기 있는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혹은 대중적으로 만나셨다.
폴린은 지금까지 재림교회가 요새모델에 집중해 왔음을 지적하면서 오늘날에는 소금모델로서의 선교사역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소금사역(the salt ministry)이 전근대적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가장 잘 통하는 접근방식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것이면서도 매우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요새모델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재림교회는 이 두 모델 중 어느 하나만이 아니라 반드시 함께 추구해야 할 선교사역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교제일 선교우선의 정신을 놓치지 않으면서 이 두 모델을 적절하고 균형 있게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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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회의 신학적 이해 속에서 공공 영역에서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개념을 찾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대응 능력이 약했던 것은 성서의 ‘텍스트’에는 충실하면서도 이 사회가 가진 상황적 ‘콘텍스트’에는 민감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은 제임스 헌터(James D. Hunter)의 표현처럼 “문화충돌”(cultural conflict)과 “문화전쟁”(culture wars)으로 인한 분열과 대립에 휩싸여 있다. 이것은 이 주제와 관련한 헌터의 책들 중 하나인 Culture Wars: The Struggle to Define America의 부제(副題)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가정, 예술, 교육, 법률, 그리고 정치 등의 모든 영역을 둘러싼 정체성과 관련한 전투”로 설명될 수 있는데 종종 사회의 진보와 보수 사이의 충돌 과정에서 보다 분명하게 부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사회와 문화가 그렇지만, 특히나 오늘날의 다원주의적 사회에서는 단순히 진보와 보수의 양극화된 이분법적 규정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중도적 입장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재림교회는 이러한 사회와 문화의 상황 속에서 창조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앞서 폴린이 설명했던 것처럼, 요새모델이 전근대적인 문화적 환경에서 교회가 더 많이 활용했던 방식이었던 반면, 소금모델 사역은 오늘날의 상황에서 더욱 효율적인 것인 것임을 생각할 때, 오늘날의 재림교회는 더욱 유연해 져야 하며 바울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더불어 발전시켰던 신학적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갈 2:1-10).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같은 접근방식을 통해서 전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 바울과 예루살렘 사도들은 선교에 있어서 서로
다른 방법들을 사용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차이는 교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온전히 선교를 위한 것이었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하나님의 메시지의 핵심에 동의했다. 그들 사이에서 달랐던 것은 그들이 무엇을 말했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말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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