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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염병 앓고 난 기분
충격적인 밤이 마감을 하는 새벽.
염병을 앓고 난 기분이 됨으로서 장티브스에 걸렸던 1962년이 떠올랐다.
사후 관리 잘못으로 재발하여 사경을 헤매던 나는 법정전염병이라는 이유로 전염병
사망자들의 시체실 입구까지 실려갔다.
현대의학은 하찮은 병으로 간주할 뿐 아니라 이즘에는 전염병 리스트에서 아예 삭제
(아마도) 했지만 당시까지도 치명적인 전염병, 공포의 살인병이었다.
오죽 심했으면 저주하는 욕으로 '염병에 땀 못 낼 놈"이라는 말이 있을까.
운좋게 탈출해 갖은 신고 끝에 회생함으로서 질병과 싸워 살아난 2번째가 되었으며
보상으로 받은 것이 잔병치레와의 단절이다.
나를 괴롭혀 오던 오만 병으로 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으니까.
일명 염병으로 불리는 장티브스(typhoid fever)의 특징은 이 병이 물러갈 때 자잘한
병들을 모두 이끌고 가는 점이다.
워낙 높은 열에 체내에 잠복중인 제반 병균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
그 때 앓은 것이 육체의 염병이었다면 간밤에는 영혼의 염병을 앓았다.
처음이 아니지만 성 야고보의 길에서 재발할 줄이야.
'그 분'의 뜻은 대간에서 정맥으로, 산에서 산으로 울려퍼지던 늙은山나그네의 사모
곡이 멀리 이베리아 반도까지 퍼지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나와 다름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늙은이를 또 한번 치신(각성하게 하신) 것이다.
이 영혼의 염병 또한 육체의 염병과 동일한 역할(자잘한 병의 퇴치)을 해주기를 기대
하며 알베르게를 나선 시각은 새벽 5시 50분.
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산상의 새벽공기처럼 맑고 싱싱한 영혼이 만들어 내는 체력은
더욱 충천했으니까.
전혀 잠자지 못했는데도 마치 여러날의 산속 생활에서 내려와 목욕한 후처럼 가볍고
상쾌한 몸이 결국 또 문제였는가.
어제 새벽의 지혜로움은 어디 가고 새벽의 칠흑 속으로 들어간 것일까.
깜깜한 새벽에는 알베르게에서 LU-633지방도로를 타고 가는 것이 정석이련만 어제
석양에 눈에 담아뒀다 해서 아레아 산(Area) 숲길을 택했으니까.
요며칠간 사용하지 않았는데 방전이 됐는지 손전등은 반딧불에 불과했고 오직 복불
복의 심정으로 감(feel)에 의존해 더듬으며 나아갔다.
분기 지점에서는 표말을 찾아 라이터불로 확인하며 작은 마을 리냐레스(Liñares)를
지나 순례자상이 서있는 고개, 1.270m 산 로케(Alto de San Roque)에 올라섰다.
그러므로, 여기까지 4km 정도는 내게 없는 갈리시아 고산 풍광과 카미노다.
'오 세브레이로'에서 '트리아카스텔라'까지
어둠이 물러감으로서 15km에 이르는 해발1.200m대~1.300m대 갈리시아의 고원을
신명나게 감상하는 순례가 시작되었다.
카미노 프랑스에서 4자리수 고원의 길도 마지막이고.
껴입었던 옷을 오스피탈 데 라 콘데사 (Hospital de la Condesa)에서 정리했다.
어제도 새벽에 7도c였던 기온이 낮에는 25도c를 넘어 일교차가 무려 20도c에 육박
했는데 오늘 새벽에는 더 쌀쌀하여 몸단속을 했던 것이니까.
인구 40명 남짓 되는 작은 마을이지만 최초로 순례자 병원이 있었다 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마을 이름도 병원이라는 뜻인 오스피탈이 되었단다.
콘데사 역시 그 병원을 만든 백작부인(Condesa)을 기려서 붙인 이름이고.
12c에 세웠으며 1960년대에 일부를 개축했다는 교회의 이름도 오스피탈(Iglesia de
Hospital)이다.
카미노는 잠시 도로를 빌렸다가 숲길로 돌아온다.
초기 순례자들은 혼란스런 산군 때문에 길 내느라 애먹었겠다.
먼데서 보면 잘 이어지는 듯 하나 지리멸렬 상태로 중추능선이 애매하다.
이와 정반대로 끊기는 듯 하지만 이어지고 계곡으로 떨어지는 듯 하면서도 연결되어
있는 불가사의한 우리의 대간과 정맥이 더욱 보배롭게 느껴지는 아침이기도 했다.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키가 훤칠하다"는 말은 잘 난 사람 뿐 아니라 산에도 적용된다.
우리 산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며 스페인의 산을 그림 보듯 원시용(遠視用)이라 하
면 나의 과문 탓일까.
산 옥산 예배당(Ermita de San Oxan)이 있는 미니 마을 파도르넬로(Padornelo)를
통과해 해발1.335m 포이오 고개(alto do Poio)에 올라섰다.
넓은 대지(臺地)에 순례자를 위한 시설이(알베르게와 바르) 있어 얼마난 다행인지!
갈리시아 자방의 성 야고보 길에서는 최고로 높은 지점이며 최상의 조망권이 확보된
위치로 알려져 있지만 아직 채광 부족(이른 아침이라)으로 아쉽게 되었다.
카미노는 도로와 거의 동행하여 폰프리아(Fonfria)를 지나 산 페드로 예배당(Ermita
de San Pedro)이 있는 비두에도(Biduedo)로 나아간다.
현란한 지능선들을 거느린 주능선을 탈 때는 마치 도열한 제병(諸兵)을 사열중인 것
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우리의 산군과 달리 혼란스러운 산군(시에라 델 라냐도
이로/Sierra del Rañadoiro)이 계속된다.
그래도 트리아카스텔라 한하고 왼쪽에 우뚝한 오리비오 산(Oribio)은 군계일학이다.
구분이 애매한 산과 밭, 띄엄띄엄한 집과 목장, 전형적인 산간마을들을 눈요기하며
내려가는 카미노는 피요발( Fillobal)을 지날 때 고도를 3자리수로 낮춘다.
1.300m대에서 600m대로 떨어지려 하니 급격한 내리막 길일 수 밖에 없으며 이후로
다시는 4자리수로 오르지 못한다.
아스 파산테스(As Pasantes), 라밀(Ramil), 오크와 밤나무 숲을 지나면 산티아고
교회(Iglesia Romanica de Santiago)가 트리아카스텔라의 수문장처럼 서있다.
넓게 차지한 묘지 속에 있으며 성 야고보에게 봉헌된 이 교회는 순례자들로 하여금
세요를 찍어가도록 안내하고 있다.
지금은 없지만 한 때 3개의 성(tres castros)이 있었다 해서 마을이름을 트리아카스
텔라(Triacastela)라 했으며 교회의 종탑에도 특이하게 3개의 성이 부조되어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돌들은 이 지방 채석장의 돌이란다.
중세순례자들은 이 채석장에서 캐낸 돌을 100km가 넘는 카스타녜다(Castañeda)의
석회석 불가마까지 각기 체력껏 운반했단다.
마을 광장에는 돌 운반에 공헌한 이들을 기리는 순례자 기념비가 있다.
시에스타 직전에 우체국 안에 들어가는데는 성공했으나 우체국에 우표가 없다니?
은행에 돈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는데 태연한 여직원이 신기하게 보였다.
그래도 미안한 생각은 있는지 세요를 찍어주겠단다.
최초의 우체국 스탬프다.
그저께 엽서를 띄웠으므로 급한 것은 아니지만 황당한 것만은 틀림 없잖은가.
풍광을 즐기라고?
트리아카스텔라에서는 2개의 프랑스 길이 선택을 기다린다.
나는 이미 확정하고 왔으므로 망설임 없이 사모스 길로 들어섰으나 카미노 프랑세스
에서 택일의 기로에 서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대부분 짧은 구간이지만 거의 하룻길도 있다.
성 야고보 길의 역사적 의미와 비중을 떨어뜨릴 뿐인 대체루트를 왜 만들었을까.
더구나, 여기 산 실(San Xil) 길에 대해 "풍광이 아름다운 길"운운하며 홍보에 열성적
인 것은 더욱 넌센스(non-sense)다.
지방자치단체 또는 이해관계자들의 파워게임의 현장인가.
우리나라에서는 다반사인 지역이기주의자들의 횡포가 야고보 길에 까지 파들었는가.
어차피 성 야고보가 걸었던 길이 아닌데 둘 또는 셋인들 어떠냐고?
고난과 형극을 적극적으로 자초할 이유는 없지만 기피해서도 안되는 것 처럼 수려한
풍광이 금기는 아니라 해도 적극적 선택의 대상도 아닌 것이 순례자의 바른 자세다.
성 야고보의 길에서 이처럼 전통적 순례자의 길을 고수하다가 세상을 뜬 적지 않은
이들을 우직하다 하겠는가.
하긴, 무리(無理)를 피하고 버스와 기차, 택시 등 대중교통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순례 매너라는 황당한 한국인에게는 이같은 대체루트야 말로 축복이겠다.
대부분의 순례자가 풍광을 즐기려는지 10km 사모스 길이 적막 강산이었다.
오리비오 산자락은 LU-633도로 개설로 인해 많이 절개되었고 낙석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잠시나마 긴장되는 길이다.
청정한 오리비오 강(rio Oribio) 물소리를 벗해 한가로운 도로를 걷게 하는 카미노는
산 크리스토보 도 레알(San Cristobo do Real)에서 도로를 떠난다.
해발 600m대의 지역은 한반도 남부에서는 고원지대에 속하나 대서양과 거리를 둔
이베리아 반도의 북부에서는 저지대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산간지대인 이 지역 마을들은 안온한 느낌을 준다.
산 실 길은 내가 걷지 않았으므로 언급할 수 없으나 산 크리스토보 이후의 카미노는
사모스 한하고 성 야고보 길의 원형을 상상해 봄직한 길이다.
루시오(Lusio),렌체(Renche),라스트레스(Lastres), 프레이툭세(Freituxe), 산 마르
티노 도 레알(San Martino de Real), 빌라데트레스(Viladetres) 등 미니 마을들은
오리비오 강을 끼고 자리잡은 전형적인 옛 시골마을들이다.
오리비오 강의 낙차를 이용한 옛 물방앗간이 있고 낚시터도 있다.
연륜의 때가 묻은 낡은 집들, 작은 예배당과 이에 따른 묘역, 좀 지저분한 소규모 농.
목장 등이 농기계가 없다면 현대문명을 거부하는 듯이 보인다.
일부 좁은 농로와 정돈되지 않은 오크와 밤나무 숲길도.
마치 퇴적암층 같고 오래된 성벽 같기도 한 석벽들이 궁금증에 점화하기도 한다.
사모스, 수도원과 바르
터널을 통해 LU-633도로를 건너면 얕은 숲속에 갇혀 있는 사모스가 발 앞이다.
오래된 성벽같은 돌담과 골목을 따라 내려가면 갈리시아 지방의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는 사모스(Samos)다.
사리아 강(오리비오) 가에 있는 사모스 수도원(Monasterio de Samos)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베네딕트 수도회가 도나티보로 운영하는 아주 심플한 숙박시설이다.
문이 열리는 오후 3시까지 한참을 기다렸는데 시간 맞춰 나온 관리인의 치노(Chino)
냐고 묻는 첫마디에 내 인상이 일그러졌던가.
자기의 결례를 깨닫지 못하는 이태리노 관리인이 내게 호의적일 리 없다.
그러나, 내 나이를 확인하고 내가 화난 이유를 알게 된 그는 곧 바뀌었다.
내게는 2개의 다른 스탬프를 찍어주고 내 디카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등 우호적으로.
내가 보내준 사진을 받은 마누엘(D.V.Manuel)은 무뚝뚝한 이태리노 답지 않게 부엔
(buen/good)과 아미고(amigo/friemd)를 연발한 답장을 보내왔다.
'산 훌리안 과 산타 바실리사 수도원(Monasterio de San Julian y Santa Basilisa)'
이라는 긴 이름도 가지고 있는 사모스 수도원의 이미지를 요약하면 '거대하다'.
스페인에서 가장 넓은 부지를 확보하고 있으며 서방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5c~6c)
수도원이란다.
19c초, 나폴레옹 전쟁 때(반도전쟁 또는 독립전쟁)는 군병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20c초에 발생한 화재로 거의 소실된 내부를 1951년에 재건하였단다.
한데, 화인이 저유탱크의 폭발이라니 이 유서깊은 건물도 화마에 무방비 상태였던가.
내가 지닌 Mp3에는 우리 가곡과 20c중반의 팝송 및 스페인어 회화 프로그램이 저장
되어 있는데 기분 따라 선택해 들으며 걷는다.
숙소에 주방시설이 전무하기 때문에 외식이 불가피했다.
마침 스페인어 강의를 들으며 바르에 갔는데 젊은 바텐더가 무얼 듣고 있느냔다.
한국인이라 스페인어를 못해서 익히는 중이라며 그에게 한쪽 이어폰을 빼주었다.
듣고 난 후 내 나이를 물은 이 청년은 늙은이의 열성(?)에 감동했나.
자기네끼리 뭐라 주고 받더니 보카디오와 맥주 1잔을 주문했을 뿐인 내 앞에 생소한
먹거리들이 자꾸 나와 극구 사양해야만 했다.
순례자를 잘 대접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마을이라 그런가.
이방 늙은이가 격정적이고 단순하다는 이베리아 반도인들로부터 동정 아닌 호의를
받는다면 어찌 못마땅한 일이겠는가.
상기된 기분으로 돌아온 숙소에서 4명의 한국 젊은이를 만났다.
어제 오'세브레이로에서 함께 보낸 자매와 한쌍이다.
90명을 수용하는 너른 실내에 순례자가 14명 뿐이고 그 중에 한국인이 5명이다.
"한국인이 몰려오고 있다"는 누간가의 말이 허언이 아니구나.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