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성선설(性善說)
繭之性爲絲 弗得女工燔以沸湯 抽其統理 則不成爲絲 卵之性爲雛 不得良雞覆伏孚育 積日累久 則不成爲雛 夫人性善非得明王聖主扶携 內之爾 則不成爲君子 詩曰 天生烝民 其命匪諶 靡不有初 鮮克有終 言惟明王聖主 然後使之然也
飜譯
누에고치의 본질은 실을 만들기 위한 것이지만 여공이 불을 지펴 끓는 물에 삶아
내어 그 끝을 뽑아내지 않으면 실을 만들 수 없다. 달걀의 본질은 병아리가 되는 것이지만 좋은 어미
닭이 달걀을 잘 품고 굴려 오랫동안 안고 있지 않는다면 병아리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본성은
착하지만 명석한 왕과 훌륭한 군주가 잘 이끌어 도로써 감싸주지 않는다면 군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詩經에서는 이를 두고 이렇게
노래했다.
‘백성 낳은 하늘
뜻이 한결같이 않은지라, 처음에는 잘했으나 끝까지 가는 이 드무네.’
이는 오직 명석한 왕과 훌륭한 군주의 가르침을 받은 후라야 끝까지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紬繹
성선설(性善說)은 孔子와 더불어 유가(儒家)의 대표적 사상가인 孟子가 주장한 인간의 심성(心性)에 대한 학설로, "인간의 본성(本性)은 선(善)하다"는 학설이다. 맹자의 성선설의 주된 내용은 사람의 본성(本性)은 본래 선하고, 누구나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이
능력들은 수양을 통해 각각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덕(德)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성악설(性惡說)은 孔子, 孟子와 더불어 유가(儒家)의 대표적 사상가 중 한 명인 순자(荀子: 기원전 298?~238?)가
주장한 인간의 심성(心性)에 대한 학설로, "인간의 본성(本性)은 악(惡)하다"는 학설이다. 荀子의 성악설은 그의 저서 荀子의 성악(性惡)편에 나타난 화성기위(化性起僞: 본성을 변화시켜
인위를 일으킨다)라는 명제로 대표된다. 즉, 사람의 본성은 악하여, 날 때부터 이익을 구하고 서로 질투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예의를 배우고 정신을 수련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性善說과 性惡說 모두 인간의 本質을 모르는 孟子와 荀子의 잘못된 주장이다. 인간에게 언어가 없으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생각이 없으면
마음(관념)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갓난아이는 말을 모르기 때문에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생각을 할
수 없으므로 그 어떤 마음(관념)도 만들어지지 않는 상태에다. 따라서 善과 惡도 구분할 수가 없다. 아이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생각을 하기 시작하고, 부모, 학교 또는 주변에서 듣고 배운
바에 따라 마음이라는 관념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그 관념을 자기라고 믿고, 그 관념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삶을 살아가는 데 기준으로
삼는다.
예수도 老子도 어린아이에 대하여 많이 언급했다. 예수가
말한 어린아이를 살펴보면,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 18:2-3).’라고 했는데, 이는 어른의 머리 속에 고착화되어 있는 모든 마음(관념)을 버려서 어린아이가 되지 못하면 결코 천국이라는 영생의 삶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천국은 우리가 예수를 믿어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다. 지금 현생에서 우리의 삶을 천국의 삶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지옥의
삶으로 만들 것인가는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마음(관념)을
버려 어린아이와 같이 되면 바로 우리는 지금의 삶을 천국의 삶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의 본성은 착하지만 명석한 왕과 훌륭한 군주가 잘 이끌어 도로써 감싸주지 않는다면 군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孔子와 孟子가 말한 仁〮義〮禮를 잘 지켜 자신을 수양하면 君子는 될 수 있다. 仁〮義〮禮를 잘 지킨다는 것은 마음을 절제한다는 것이고, 마음을
절제한다는 것은 참고 견디는 인내(忍耐)의 삶이다. 참고 견딘다는 말은 그 자체가 고통의 삶이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마음을 절제하고 참고 견디는 인내(忍耐)의 삶을 살았지만, 자신들은 양반이라 하여 상놈에게 저지른 온갖 횡포를 보면 과연 그들이 인간인가 싶을 정도이다. 그들의 仁〮義〮禮는 온갖 모순으로 가득 차있다. 모순은 갈등을 낳게
마련이고, 갈등은 곧 고통과 번뇌가 되기 마련이다.
인간이 言語를 개발한 이래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삶이 무엇인지, 眞理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하여 고민하고 또 고민했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결론을 내리는 순간 또한 모순에 빠져버리고 만다. 言語는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는 단순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어에 의하여 의존하여 생각을 한다. 言語는 단순한 수단이고, 虛像에 불과한 實體가 없는 것이다. 그 言語에 의한 생각 또한 虛像에 불과한 것이다. 어차피 결론이
없는 것을 그렇게 고민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삶과 眞理란 우리의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 그저 잘 사는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삶과 眞理란 그것이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잘 사는 것이다. 그것은 虛像에 불과한 言語와 생각에서 벗어났을 때 찾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지식이란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眞理는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발현(發顯)되는 것이다. 眞理가
무엇이라고 말하는 철학자 및 사상가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미친 놈의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일 뿐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詩經의 대아 탕지습(大雅 蕩之什)에 있는 탕(蕩)이라는 시를 감상해 보자.
蕩蕩上帝 下民之辟 넓고 크신 하느님은 백성들의 임금일세
疾威上帝 其命多辟 위엄 있는 하느님
그 명이 일정치 않네
天生烝民 其命匪諶 백성 낳은 하늘 뜻은 한결같지 않은지라
靡不有初 鮮克有終 처음엔 잘했으나 끝까지 가는 이 드무네
文王曰咨 咨女殷商 문왕께서 이르시길 아아 그대 은나라는
曾是彊禦 曾是掊克 포악한 사람들과 가렴주구 하는 사람들
曾是在位 曾是在服 높은 자리 차지하고 정사를 담당하니
天降慆德 女興是力 하늘 내린 과도한 덕 그대 더욱 힘쓰네
文王曰咨 咨女殷商 문왕께서 이르시길 아아 그대 은나라는
而秉義類 疆禦多懟 착한 이 등용 않고 포악 등용 원망
많네
流言以對 寇攘式內 헛소문으로 대응하니 도둑만 가득 하네
侯作侯祝 靡屆靡究 원망하고 저주하니 끝날 날이 언제인가
文王曰咨 咨女殷商 문왕께서 이르시길 아아 그대 은나라는
女炰烋于中國
斂怨以爲德 나라에 활개치며 백성 원망 덕으로 아네
不明爾德 時無背無側 그대 덕은 안 밝히니 곁에 신하 없다네
爾德不明 以無陪無卿 그대 덕은 밝지 않아 참된 신하 없도다.
文王曰咨 咨女殷商 문왕께서 이르시길 아아 그대 은나라는
天不湎爾以酒 不義從式 술에
빠지지 말랐거늘 못된 짓만 한다네
旣愆爾止 靡明靡晦 흐트러진 모습으로 낮도 없이 밤도
없이
式號式呼 俾晝作夜 소리치고 떠들면서 낮을 밤을 삼았구나
文王曰咨 咨女殷商 문왕께서 이르시길 아아 그대 은나라는
如蜩如螗 如沸如羹 쓰르라미 매미 울듯 물이 끓듯 국
끓듯
小大近喪 人尙乎由行 사람들 쓰러지는데 행실은 고치질 않네
內奰于中國 覃及鬼方 노여움 나라에 가득 멀리 멀리 퍼지네
文王曰咨 咨女殷商 문왕께서 이르시길 아아 그대 은나라는
匪上帝不時 殷不用舊 하느님이 아니라 옛 법 안 따라서라네
雖無老成人 尙有典刑 원로대신 없다 해도 옛 법은 남았거늘
曾是莫聽 大命以傾 그걸 아니 따랐으니 천명이 기울어졌네
文王曰咨 咨女殷商 문왕께서 이르시길 아아 그대 은나라는
人亦有言 顚沛之揭 사람들은 말을 하지 뽑힌 나무 뿌리
드러나
枝葉未有害 本實先撥 가지와 잎 안 상해도 뿌리 먼저 뽑혔다고
殷鑒不遠 在夏后之世 은나라 거울 멀지 않고 하나라 거울삼을걸
주나라 문왕이 은나라 관리들이 포악하고 못된 정치를 펴서 은나라를 정복했다는 그 이유와 타당성을
노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