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대 출간 대표시조집 조명 : 고정국 『서울은 가짜다』
강골(强骨)들을 깨우는 변방의 노래
박 설 희
1
작년 한 해 우리는 세월호로 대변되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충격과 놀라움 속에서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비상식이 상식이 된 사회를 상식이 통하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누누이 다짐했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다시 화제에 오른 것도 그 때문이리라.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눈이 머는 전염병이 퍼지는 극적인 상황을 통해 혼란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과, 보아야 할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 인간이 얼마나 추하고 절망적인 존재가 되는지를 그려냈다. 또 재난상태에서도 정치적 이익을 따지는 권력자들, 눈먼 자들을 향한 폭력, 무능력한 정부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열네 살 삘기꽃들이
촛불 하나씩 켜들고
미선이 효순이 부르며
마을 쪽으로
가고 있다.
(중략)
미안타 미안타 하며
절뚝
절뚝
유월이
가네.
-「유월의 시」 부분
2003년 발간된 고정국의 시집 『서울은 가짜다』의 ‘여는 시’다. 2002년 6월에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미선이 효순이를 추모하고 있다.
문학은 현실을 떠나서 존립할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시인은 현실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상상이라는 것도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을 도외시하고 펼쳐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정국 시인은 철두철미 ‘대지의 시인’이다. 그의 발은 항상 대지를 굳건하게 딛고 있으며 시선은 그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투철하게 지켜보고, 자라는 생명들을 어루만지고 있다.
십여 년의 간극을 둔 ‘세월호’나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나 왜 이리 닮은꼴일까. ‘침몰한 사월’과 ‘절뚝이는 유월’에 남은 말은 ‘미안타’. 미안하다. 세월호 이후 가장 많이 뇌였던 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했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말.
문학은 무력하다. 그러나 문학은 본질적으로 중심이 아닌 변방에 위치하면서 연약하고 상처받은 자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
2
제주도에서 시작(詩作)을 하고 있는 고정국 시인은 변방에 살고 있고 시조의 위상은 현대시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 그이기에 서울을, 서울이라는 중심을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패러디 인 서울」 연작 14편이 그렇다.
고정국 시인에게 있어서 서울은 어떤 의미일까? 1996년에 펴낸 그의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을 인용해 보면 서울은 “왠지 지상에서 가장 슬퍼 보이는 도시”다.
시인 유하가 80년대와 90년대 초의 서울을 압구정동의 세속적 향락에서 읽었다면 고정국의 서울은 모든 것의 중심이면서 차마 웃지 못할 갖가지 진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다국적 자본들이 춤추는 서울은 모순으로 가득 찬 도시여서 상층부와 하층부를 이루는 인간군상의 모습은 극과 극을 이룬다.
가끔씩 죄짓는 맛에
이 세상은
살만
하다며
저마다 죽자 사자
돈줄 따라
뛴다는
서울
다국적 가발 쓴 꽃들이
검은 강에
내린다.
-「패러디 인 서울·2」
주일마다
헌금하라며
저금통을 넘보시던
“하느님, 아니 큰삼촌 용돈 좀 주십시오!”
민들레 제 동생이랑
철문 밖에
피었다.
-「패러디 인 서울·9」
서울은 위에서 보듯 “죄짓는 맛”에 “살만”하다며 “돈줄 따라” 뛰는 “다국적 가발 쓴 꽃들”이 있는 곳이다. 다른 한편, 교회 정문에서 “민들레” 형제가 구걸하고 야근하는 “누이”들이 있으며 “다리 꺾인 제비”가 “새끼를 치”는 곳이다. 그래서 슬픈 도시다.
“근대적 자본주의의 병폐와 모순이 집결된 타락의 최정점을 보여주고 있는 공간”(고명철)인 서울은 외형만 화려하게 급성장한 탓에 IMF 이후 다국적 자본에 의해 휘둘리며 옷로비 청문회, 자기 당의 이익만 챙기는 정치적 이기주의, 난개발로 인한 부작용, 낙하산 인사, 제 역할을 못하는 세속적 종교의 모습 등으로 나타난다. 가짜이고 헛것인 서울의 모습은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서울에 관한 시들은 제목에서 ‘패러디’임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패러디는 대상에 대한 조롱인 동시에 뼈아픈 통찰을 담고 있어, 당대에 대한 비판을 통해 시대의 현실과 자기의 처지를 새롭게 각성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가히 현대적 기법인데 그는 그것을 과감히 끌어들였다. 시조라고 하면 고즈넉함, 예스러움, 서정성 등을 떠올리는 사람이 그의 작품을 읽는다면 시조에 대한 고정관념을 단번에 깰 수 있을 만큼 그의 시는 현실에 밀착해 있고 힘이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패러디의 대상에 대한 무겁고 진지한 발상이 형상화에까지 영향을 미쳐 작품의 재미를 감소시키는 역효과를 낳고 있는 시들이 있다는 점이다. 패러디일수록 기발한 발상과 톡톡 튀는 감각이 아니면 독자에게 진부한 느낌을 준다. 시조든 자유시든 감춤과 드러냄의 어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서울로 표상되는 중심에 대한 예리하고 날카로운 비판 의식은 그 시대 상황을 생각해볼 때 충분히 의미 있는 시도였고 시조의 시야를 넓힌 것으로 평가를 받아야 할 일이다.
3
앞에서 언급한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을 다시 인용해보자.
“제주에는 4월이면 민들레가 피고 또한 그때의 흉터가 아려온다. 아직도 규명되지 못하는 4·3의 진상……누가 큰 거짓말을 퍼뜨려 이 작은 섬에 그토록 많은 무덤을 쌓게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제주섬에는 무덤의 숫자가 너무 많다.”
“상처받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습관, 그래서 흉터가 있는 존재들에게서 나는 남다른 애정을 느낀다. 65% 3도 화상을 입었던 내 심신의 절반은 흉터다. 그 까닭에 나는 다른 존재들의 흉터에서 위안을 받는다. 나도 그들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이고 싶다.”
그가 평생 몸담고 있는 제주는 4·3의 상처에서 자유롭지 않다. 어떤 집안이든지 내력을 살펴보면 그때 희생된 분이 있을 정도로 아직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사람들이 그럴진대 그들이 흘린 피가 스며든 제주의 자연에는 얼마나 많은 흉터가 남아 있을까. 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후로 “다단계식 슬픔”은 얼마나 넓고 깊게 뿌리를 내린 것일까.
세상 뜬 청둥오리들 천당 가듯 가고 있네
四 ․ 三 四 ․ 三
五 ․ 六 五 ․ 六
죽을 맞춰 가고 있네
(생략)
돌아보면 반도천년 다단계식 슬픔은 남아
도래지 갈대 숲에
눈칫밥 숨어서 쪼던
아기새 배고픈 혼백
깃털 두엇
떨구고
가네
-「청둥오리 산천을 뜨네」 부분
고정국의 시조에는 식물들, 특히 꽃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두 번째 시조집 『겨울 반딧불』의 경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과 풀을 노래한 시편들이 대부분이고 『서울은 가짜다』를 포함한 다른 시조집들에도 꽃을 노래한 시편이 제일 많은데 묘하게도 작품성도 뛰어나다. 가히 ‘식물적 상상력’이라 할 만하다. 『서울은 가짜다』에서는 그 중 상처와 흉터를 드러내는 꽃으로 동백과 민들레가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다.
바위도 등이 가려워
투구를 벗는
사월
꽃들이 만장일치로
봄의 섭정을 찬미하지만
올해도 눈뜨고
지
네,
저 등신
제주
동백.
-「4월, 제주 동백」
동백은 질 때 목이 통째로 툭 떨어져 섬뜩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기에 숱한 시인들의 글소재로 사랑받아 왔다. 고정국 시인은 동백을 뭔가 하려던 일을 하지 못하고 그 한이 남아 “눈뜨고” 지는 “저 등신”으로 형상화했다. 「4월, 제주 동백」이라는 제목으로 미루어 4·3과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녀님 손가방처럼
너의 행보는 가벼웠다
영토를 섬기지 않는
풀꽃들의 쓸쓸한 자유
인연을 다 떨군 홀씨가
하늘이 낸 길을 간다.
민들레야 섬에 피지 마라
민들레야 섬에 피지 마라
입양 절차도 없이
혈육 한 점 날려보낸
미혼모 홰를 켠 눈빛이
하얀 밤을 설친다.
폭풍에, 풍문에 떠돌다
어둠 속에 뿌리를 내려
밤이면 백만 송이
피워 밝힌 민들레 바다
빨갛게 아빠도 모르는
염색머리 소녀가 웃네.
-「빨간 민들레」
섬의 민들레가 육지의 민들레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 시를 읽으면서 처음으로 생각했다. 민들레는 포자로 번식하는 식물이다. 포자들이 바람에 실려 가다가 땅에 내려앉지 못하고 바다로 떠밀려 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다행히 땅에 내려앉은 포자는 뿌리를 내리겠지만 바다에 내려앉은 포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디로 실려 가는 걸까. 미혼모와 입양아의 무거운 문제를 다루면서도 이미지가 잘 살아 있다.
4
고정국 시인은 지금도 스님이 용맹정진하듯 시를 쓰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삼년 작정하고 시작한 만 수 계단 내려걷기를 11개월에 마쳤다는 그가 아닌가. 소재에 대한 끈질긴 천착이 「패러디 인 서울」,「밤에 우는 것들에 대하여」,「추상(秋象)」 등에서 보는 것처럼 연작의 형태로 나오는 것도 그의 특색인 것 같다. 최근에 나온 시조집 『민들레행복론』에 이르기까지 그는 줄곧 관찰과 기록, 성찰과 통찰에 입각한 글을 써왔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꽃묘를 지켜보는 진지하고 애정 어린 시선과 마음이 느껴진다. 그것은 고정국 시인이 농사를 짓는 농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굳이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시인들은 이미 농부가 아닌가?
파란 것은 파란 것끼리 빈 하늘로 올라가고
빨간 것은 빨간 것끼리 사루비아 꽃밭에 가고
농부는 콩밭을 지나 낮술 찾아 들어가고,
쓸쓸한 것은 쓸쓸한 것끼리 밤바다로 쓸려가고
환장한 것은 환장한 것끼리 억새밭으로 달려가고
(중략)
쾡 하니 젖은 눈 깔며
내 빛깔을
묻는
시월
-「추상(秋象)·1」 부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반성, 자기 존재의 근거를 묻는 것, 자기다운 시와 삶을 찾아가는 끝없는 행보, 생활 주변에 대한 관심과 애정,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 내가 읽은 시조집과 산문집 속에 그는 그렇게 살아 있었다. 앞으로도 “뿔뿔이 초야에 묻힌 강골(强骨)들을 깨우”(「깃발」) 는 시를 계속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겨울 반딧불』에 실린 「엉겅퀴·2」를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엉겅퀴에서 ‘反骨의/뼈’를 읽어낸 그의 시어들을 “무겁고도 뜨거운 말들”(서벌)이라고 했던가.
쉽사리 야생의 꽃은
무릎 꿇지 않는다.
빗물만
마시며 키운
그대 깡마른
反骨의
뼈
식민지
풀죽은 토양에
혼자
죽창을 깎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