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면(南二面) 하금리(下金里)
남이면의 중심지에 위치해서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으나 동쪽으로는 궁동천이 북쪽에서 흘러오고 또한 북쪽에서 흘러오는 역평천과 서남쪽에서 흘러오는 대양천이 합류하여 동쪽에 흘러와서는 궁동처노가 합류하는 그 지점에 들을 끼고 있는 지역이라 비교적 농경지가 제대로 조성되어 있는 곳에 하금리는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성곡리, 석동리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역평리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흑암리와, 그리고 북쪽으로는 상금리와 금산읍 양지리와 경계를 이룬다.
인류의 정착은 신라 이전으로 보며, 고려 때에 금이 많이 나는 쇠내가 있어서 당시부터 취락의 형성은 있었으나 부락의 형성은 없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 초기 태종 13년(1413)에는 금산군에 속했으며 전기를 전후해서 들이 개간되고 궁동천 주변과 마이산 서쪽 들을 끼고 차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며 부락이 형성되어 갔었다.
산악지대가 들을 끼고 비교적 수려하고 풍수지리설에 따른 명당자리가 많다해서 예부터 지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인데 밀양박씨(密陽朴氏)들이 이 지역에 처음 세거하는 것도 여기에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이면의 지역으로서 쇠내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쇠내, 아래새내, 하금천, 하금천리라고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용동리, 항강리, 중금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하금리라 하고 남이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5.327㎢이며 남이면의 행정중심지로 면사무소, 경찰지서, 우체국등이 있다. 반남박씨(潘南朴氏)가 많이 세거한다. 1925년 4월 1일에 설립된 남이초등학교가 있다. 부안김씨(扶安金氏)의 집성촌이 있었다.
자연부락(自然部落)
<높은땀, 덜구석, 쇠내, 용동, 음수동, 평촌>
덜구석
평촌마을 서북쪽으로 구석에 새로 된 마을을 덜구석 또는 신대(新垈)라고 부른다. 한 구석에 마을이 생겼으므로 덜구석, 신대라고 부른다. 부안김씨(扶安金氏)의 집성촌이었다.
쇠내
용동 서북쪽에 있는 마을을 쇠내 또는 새내, 금천(金川), 봉천(鳳川)이라고 부른다. 고려 때 금이 많이 나오는 금천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그리 부른다. 원하금은 쇠내의 원 마을이다.
평촌
원하금 들 건너 서북쪽에 있는 마을을 평촌(坪村)이라고 부른다. 주위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산 아래 내를 따라 집들이 늘어서 있는 마을이다. 평평한 들에 마을이 있으므로 평촌이라고 부른다. 김해김씨(金海金氏)가 많이 산다.
용동
원하금 남동쪽에 있는 마을을 용동(龍洞)이라고 부른다. 산 모퉁이를 돌아서 왼쪽에 마을이 있는데 옛날에는 꽤 큰 마을이었다.
마을 앞에 용소라고 부르는 웅덩이가 있는데 옛날에 용이 승천하였다 하여 용동이라고 부른다 한다. 용소 위에 바위가 갈라졌는데 용이 승천할 때 꼬리로 바위를 쳤기 때문에 갈라진 것이라 한다. 경주정씨(慶州鄭氏), 밀양박씨(密陽朴氏), 순천김씨(順天金氏) 등이 많이 사는 마을이다. 마을에서 흑암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불근재라고 부른다. 붉은 흙이 나는 고개라 그리 부른다.
음수동
높은땀 동북쪽으로 산골에 있는 마을을 음수동(飮水洞)이라고 부른다. 마을 앞산에 갈마음수형의 명당이 있다 해서 음수동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깊은 산골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마을 양골짜기로 30여호의 가옥이 들어섰었으나 지금은 폐촌에 가까운 마을이다. 성주현씨(星州玄氏)의 집성부락이었다.
높은땀
평촌 동북쪽으로 들 건너에 있는 마을을 높은땀 또는 고촌(高村), 중금천(中金川)이라고 부른다. 지대가 높은 곳에 마을이 있으므로 높은땀, 고촌이라고 부르고 쇠내 가운데에 마을이 있으므로 중금천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서 금산읍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수레너미재라고 부르고 금산으로 통하는 큰 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