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집서평]
경계 허물기와 거리 유지하기
김정수|시인
- 강준철 시집 『아닌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도 아니고』(작가마을)
– 금시아 시집 『고요한 세상의 쓸쓸함은 물밑 한 뼘 어디쯤일까』( )
경계 허물기 - 강준철 시집 『아닌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도 아니고』
강준철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아닌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도 아니고』는 ‘시의 백화점’이라 할 만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형태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통서정시와 새로운 형태의 시, 타 장르와의 융합을 통해 시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1980년대 해체시를 발표하던 황지우 시인의 “나는 ‘시’를 추구하지 않고 ‘시적인 것’을 추구한다”(『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한마당, 1993)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시적인 것’은 관습적인 시 장르의 해체와 갱신, 비시적非詩的 요소의 도입을 통한 시의 영역 확장을 의미한다. ‘시’는 여전히 ‘시라는 자리’에 존재하고, 시를 시라 인식하는 것은 ‘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적이다’, ‘이것은 시적이지 않다’라는 말로 바꾸어보면, 시는 여전히 ‘시라는 틀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시적인 것’에서의 ‘시적’은 시를 시이게 하는 기준이면서 원칙이고, ‘것’은 시의 영역 밖에 있는 것들을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시적인 것’이 시의 영역이나 방법론의 확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80년대 황지우 시인의 해체시가 당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관습에 대한 저항과 기존 시의 문법에 대한 반동처럼 분명한 ‘목적성’을 동반한다. 시의 영역 확대라 했지만, 황지우 시인은 “‘시적인 것’은 ‘어느 때나, 어디에도’ 있다”라고 했다. 이미 있는 시를 찾아 쓰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정현종 시인도 『빛-언어 깃-언어』(문학과지성사, 2024)에서 시에 대해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는 시 속에 살고 또 시도 우리 속에 살고 있”다면서 “그것은 마치 나무가 공기나 햇빛 또는 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들 속에서, 그것들에 의해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시도, 시의 형태도 원래 있던 것이기 때문에 찾아서 쓰면 된다는 것이다.
강준철 시인은 시집 뒤에 수록한 ‘시론詩論’ 「불이不二의 시학」에서 “한국 현대시의 서정시 중심의 흐름은 100년 가까이 거의 변화가 없다”고 했다. 시도, 시의 형태도 이 땅에 존재하지만, 서정시만 생산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다. 또한 “주지시나 주의시는 거의 없고, 서사시나 극시나, 장시도 별로 없다”면서 경계를 허무는 시, 일체의 대립적인 것을 해체하는 ‘전위시’를 선보이고 있다. 시집 제목이 상징하듯, “둘이면서 하나”라는 것이다. 현상은 둘이되 본질은 하나로, “대립의 통일과 같은 뜻”이다. 쉽게 말하면, 어릴 때의 나도 ‘나’이고, 성장한 나도 ‘나’이다. ‘나’라는 본질은 변함없지만, 어릴 때의 나와 성장한 나는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또한 전생의 나도, 현생의 나도, 후생의 나도 나인 것이다. 다르지만 같고, 같지만 다른 것이다. 이는 『유마경』에 나오는 ‘불이不二’의 사상이다. 불이란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이어지므로 다른 것이 아님을 뜻한다. 이는 결국 시의 본질은 하나이고, 이를 담은 형식은 다양함에서 가져온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시적인 것’을 수렴하는 동시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상식을 전폭적으로 전복한다. 삶이나 죽음, 행복과 불행, 좌익과 우익 등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미덕과 불이를 시종일관 고집한다. 시집을 장식한 다양한 시적 형식은 이 사상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이번 시집에는 총 15부와 시집 말미에 ‘시론’이 수록되어 있다. 1부에서는 ‘하늘 아래 새로운 문학은 없다’라는 전제 아래 다양한 혼성모방과 패러디를 선보인다. 시집 맨 앞에 놓인 시 「보나마나믿으나마나」에서는 세균에 의한 각종 감염증을 치료하는 약 ‘크라비트’의 효능·효과를 서두에 배치하고, 구약성서를 참고해 ‘가장 오래 산 사람의 순위’와 ‘가장 늦게 아들을 낳은 사람 순위’를 나열하고, 또 이태원 핼러윈 참사와 코로나19 사망 관련 신문 기사 등을 수록한 혼성모방을 시도한다. 세균과 유한한 인간의 수명, 축제와 죽음, 동물의 복지와 인간 등을 통해 삶과 죽음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을 드러낸다. 고은 시인의 시 「그 꽃」을 노골적으로 패러디한 「‘그 꽃’ 패러디」와 여러 문장을 조합한 「풍류도風流道」, 이선희가 부른 〈아! 옛날이여〉의 노랫말을 응용한 「한 번만 더」, 이상의 「오감도」를 변형한 「가난한 반원들」, 그리고 경기체가나 고려속요인 「청산별곡」 등을 패러디하고 있다.
2부에서는 병·포기·즐거움·기우 등을 통해 세상을 역설적으로 풍자한다. 진리는 그 역도 진리라는 의견을 개진한다. 건강한 사람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어딘가 조금 아픈 사람”(이하 「역설逆說 2 –병」)이고, 오히려 아무 데도 안 아픈 사람이 “병자”라 역설한다. 내 몸이 아프지 않다고 해도 “세상이 엉망진창”인지라 아프지 않을 수가 없고, “아파 봐야 사람이 된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역설逆說 11 –포기」에서는 사랑·행복·건강 등 “뭐든지 포기해야 이루어진다”고 반어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정의·진리·국가·민족·종교 등은 “모두 칼”(「역설逆說 19 –칼을 먹는다」)이라며, “평화는 칼을 먹고 산다”고 정의한다. 3부에서는 언어를 통한 놀이에 치중한다. 타동사 ‘보다’의 활용을 통한 언어유희와 풍자(「보다」)를, 느낌표(!)와 마침표(.)를 변용하고 정의한 해학적 풍자(「방망이 !」, 「마침표(.) 2」)를 시도한다. 시 「13월의 8요일」에서는 불가능한 현상에 대한 상상력을 가동한다. 13월이나 8요일이 존재하지 않듯, “담장에 피던 장미가 전쟁터로 달려”가거나 비행기가 “변기 속으로” 추락하고, “기도하던 새 한 마리, 성경책을 분실”하기도 한다. 이뿐 아니라 “내 엉덩이에 꼬리가 돋아”(이하 「웃기는 얘기」)나고, 그 꼬리는 “추진체”가 되는 등 시인의 상상력은 상식의 경계를 벗어난다.
4부에서는 2어절 시와 1행시부터 5행시를, 5부 ‘연작시’에서는 지금까지 써온 연작시 「나무설화」·「잠언시」 등과 단시의 한계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도 시인은 “삶은 모순 덩어리”(「4행시」), “대한민국은 목하目下 변비 중”(이하 「3행시」), 깃발은 “선동가”라면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잠언시 3」에서는 “철근으로 튼튼하게” 집을 짓되 벽이나 지붕을 만들지 말고, 바람·햇빛·비·별 같은 자연을 집안에 들이라고 충고한다. “마루에는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고, “절대로 문을 닫지 말”라는 충고를 곁들여 인간의 편의를 위한 집을 자연과 나누라는, 자연 친화적 사고와 문명 비판 의식을 보여준다. 6부 ‘극시’, 7부 ‘이야기시’, 8부 ‘산문시’에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의 형식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해 창작해 보여준다.
9부에서는 기호의 특수한 세계로서의 언어, 즉 의미/개념을 대신 나타내는 형식의 시를 선보인다. “비와 서리가 물이 되”(「찬 가을」)는 것은 자연적 기호sign로 긴밀한 인과관계를, 춤추는 행위를 표현한 “←↑→↓”(「춤과 노래」)는 인위적인 기호로 단순한 약속을 나타낸다. 즉 시 「찬 가을」에서 비와 서리가 물이 되는 것은 긴밀한 인과관계가 있지만, 시 「춤과 노래」에서 “←↑→↓”는 춤추는 동작을 단순하게 나타낸다. 이런 기호들은 한 편의 시에서 부분을 이루면서 전체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기호로 작용한다. 시 「왕벚꽃 2」에서 전반부의 “하하하”와 후반부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사이에 여백이 존재하는데 “하하하” 웃는 것은 꽃잎이 지는 슬픔에 대한 반어적 기호이다. 시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의 여백은 나무를,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는 땅에 떨어져 쌓여 있는 꽃잎을, “하하하”는 나무에 달려 있는 꽃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상징한다. 웃음의 반어와 시적 형태를 통해 인생무상과 생과 사의 무의미성을 보여주고 있다.
10부에서 12부까지는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고, 한쪽만 강요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고, 세상에 고정된 것은 없다는 것을 시의 형태적 변화와 과감한 표현으로 상식적 파괴를 감행한다. 특히 내용적으로는 생각의 균형과 삶의 중심 잡기, 중용의 미덕을 강조한다. 표제시 「아닌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도 아니고」에서는 “추운 것도 아니고 더운 것도 아니고”를 시작으로 다양한 상황을 열거한다. 시 제목은 『금강경』에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非無分)”를 가지고 왔는데, 시인은 우리 살고 있는 세상, 즉 일합상一合相은 인연에 의해서 미진微塵들이 집합해 이루어진 세계이지만, 말로써 할 수 없는 것이다. 일합상이라 말하는 순간 일합상은 기호일 뿐이고, 그 본질/깨달음은 말로 존재하지 않는다.
13부 「시 창작」 연작에서는 시가 독자의 것임을, 14부에서는 사진과 시의 만남을, 15부에서는 인간과 사물의 조화를 지향한다. “사물들은 서로”(이하 「대화 4」)를 모르기 때문에 경계하지만, “내가 볼 때 그도 나를 유심히 본다”. 또 “내가 그들을 만지면 그들도 나를 만”(이하 「살」)진다. 눈을 감으면 “그들의 영혼이 만져”지고, “그들도 나의 영혼을 만지”는 등 서로 교감하면서 하나가 된다. ‘나’와 ‘사물’은 둘이면서 하나라는 것을 시와 형식의 다양성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거리 두기 혹은 유지하기 – 금시아 시집 『고요한 세상의 쓸쓸함은 물밑 한 뼘 어디쯤일까』
금시아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고요한 세상의 쓸쓸함은 물밑 한 뼘 어디쯤일까』는 급변하는 일상과 환경, 슬픔의 파고에 적응하기 위하여 세상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고요히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가는 고독한 존재의 고백록이다. 시인은 “간섭하지 않으며 침범하지 않는 경계”(이하 「제발 내버려두렴, 나의 우주를」)를 짓고는 “생소한 슬픔과 외로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고독한 거리”에서 홀로 견디려 한다. 견딤의 기본은 ‘자연스러움’이다. 자연스럽지 않으면 그 자리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들키고, ‘간섭’과 ‘개입’으로 고요의 세상은 깨질 뿐만 아니라 변화를 모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시간은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돌아가는데, 이에 적응하는 몸과 의식, 환경은 그만큼 따라주지 않는다. 시인의 선택은 세상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거나 거리를 두면서 사람과 사물,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세상 관찰하기’라 규정할 수 있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의 이격은 나를 돌아보고 숙성시키는 시간이면서 과거라는 우물에 잠겨 있던 그리움을 길어 올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거리 두기와 관찰, 사유가 깊어질수록 의식은 냉철해지고 시적 감각은 한층 깊어진다. 일정한 거리에서 관찰하고, 발견하고, 직감하는 금시아의 시는 “칠백 년 만에 눈을 뜬 연꽃처럼”(이하 「먼나무 –나의 시(詩)」) 발아해 빠르게 발육한다. 시인은 경계한다, “너무 웃자라지는 않”을지. 시인은 또 소망한다, “꽃을 피우다 죽는다 해도/ 백 년을 갈 수 있”기를. 그리하여 시인은 “낯선 소름과 설렘”으로 가득한, “공중을 빨갛게 물들”이고 싶은 시에 매몰된다.
세상 속으로, 혹은 세상과 거리 유지(두기)하기의 첫 번째는 “아름다운// 도망”(이하 「동검도 –성지순례」)이다. “동냥자루 같은// 마음 하나 둘러메고” 하루 동안의 떠남이다. “도망”이라 했지만, 부제에서 언급했듯, ‘성지순례’다. ‘성지순례’라 했지만, 인천 강화군 길상면 동검도에는 성지가 없으므로 마음을 다스리는 ‘여행’이다. “발칙한 하루”는 “슬픔을 다독거리는”(이하 「궁리포구」), “내게 주는 구제”의 시간과 다름없다. 시 「하루, 그리고 도꼬마리 씨」)에게 “여행은 늘 성급”했다면서 “그대의 사주는 역마살입니까” 묻는다. 세상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멀리 떠날 요량으로 “아무 다리”나 붙잡은 것은 아닌지, 그 다리를 붙잡고 여기까지 흘러와 불현듯 정착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묻는다. 성급한 결정으로 절망이 틈입하고, 서둘러 “옆길로 피해 달아나”다 보니 불행과 슬픔, 그리움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또한 아직도 “새장 속의 새”로 위험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한다. “딱 하루만큼”(이하 「노을을 캐다」)의 여행을 떠나고 싶었는데 “어느새 이리 멀리” 떠나와 “막다른 아픔과 적막한 슬픔”으로 물든, 불안한 자아를 마주한다.
세상과의 거리 유지(두기)하기의 두 번째는 ‘잠(꿈) 속’에 스미는 것이다. 시인은 시 「한여름 낮잠, 아다지오」에서 울창한 숲속의 “벌거숭이 괴목”에서 ‘자아’를 발견한다. “울울창창한 녹음”이 ‘사람들’이라면, 그 속에서 “숨은 듯 가려진” 괴목은 ‘나’의 분신이다. 한데 괴목은 스스로 “팔다리 다 잘라낸” 모습을 하고 있다. 세상 속에서도 세상 “바깥을 맴”도는 듯한, 우거진 녹음에서 “푸른 세상을 망각”한 채 홀로 낮잠을 자는 듯한 모습에서 “뾰족”한 심성을 목도한다. 절대고독의 자리에서 유난히 뾰족한 괴목은 “예술가의 고독”과 “외톨이 수도승”을 닮았다. 시인은 현재 “단 하나뿐인 나를 견디는 중”이다. ‘잠’보다 더 깊숙한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 ‘꿈’이다. 꿈속의 집은 “어린 은신처”(「꿈속의 집 1」) 역할을 하지만, 아늑하지는 않다. 집 문을 열고 들어가도 마당에만 머물 뿐 좀체 방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꿈속에서 마주한 것은 “편애”(이하 「꿈속의 집 2」)와 “초면이자 타인” 같은 낯섦이다. “어젯밤 꿈속에서 ‘나’를 보았”(이하 「그 짭짤한 배후를 어떻게 하겠어」)는데 그 몰골은 “더욱 초췌”하기만 하다. 성급하게 집을 떠난 이유와 꿈이 들어선 자리가 다르지 않음이다.
세상과의 거리 유지(두기)하기의 세 번째는 ‘물속’의 침잠이다. 시인은 물속이나 물가, 포구에 머물며 “자신을 소생시키는”(「머구리 K」) 시간을 기다린다. 배가 드나드는 포구는 “두 눈과 귀를 틀어막아도”(이하 「궁리포구」), “기억 저 밑바닥에서부터 젖어오는/ 슬픔을 다독거리는” 구제의 장소이다. 또한 호수는 “어느새 멀리 떠나와버린 삶”(이하 「호수를 읽다」)을 반추하면서 “그 눈부신 몰두와 채록”의 시공간이다. 즉 가만히 눈을 감고 자아에 몰두하고, 삶의 풍경과 추억을 채록하는 시간을 갖는다. 외물外物과 자아自我가 하나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러서는 더욱 “진중”해진다. 하지만 시 「달빛 좌대」에서 물가의 풍경은 고독하다. “길은 멀리 산봉우리로 이어져” 있고, 독거노인 같은 좌대 “혼자” 고독을 견디고 있다. “문득 돌아보면” 세상과 단절된 자아가 보인다. 금시아의 시에서 물의 이미지는 “어느새”나 “문득”이 지시하듯, 세월의 흐름과 기억 그리고 상실감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특히 수몰지구의 봄을 형상화한 시 「수몰」은 “물밑 세상의 쓸쓸함”과 고독을 수몰된 한 마을의 추억을 통해 세밀하게 보여준다. 댐이 생기면서 잠긴 마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인데, 시인은 물 밖에서 물밑 세상을 훤히 꿰고 있다. 물로 단절되었지만 단절되지 않은 듯, “오십 년 전 대소사들 북적북적 소란”하다. 내면 깊숙이 숨겨둔 그리움의 풍경이다.
세상과의 거리가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것은 ‘사람’이다. 깊은 우물 속처럼 알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듯, 사람들과의 관계는 특히 어렵다. “나는 너의 맨발조차 본 적 없는데/ 너는 내 민낯을 보고도 말이 없네”(이하 「완장」)라는 문장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세상에 “호락호락”한 것은 없다. 특히 완장이라도 찼다면, 서로의 관계는 쌍방이 아닌 일방을 흐른다. 감정이 개입해 거리 두기를 방해한다. 눈에서 나온 “감정의 꼬리”(이하 「눈꼬리」)는 “착각의 볼륨”과 “착시의 수위”를 높여 판단을 흐리게 한다. 시인은 “사람이 나간 사람”(이하 「여름을 잃어버린 사람」)에 주목한다. 그 사람 속에는 “화가 난 사람이 살고 있”는데, 농사는 팽개치고 대낮부터 술에 취해 있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 상실과 그리움으로 마음에 “뙤약볕과 짙은 그늘”을 들인 사람이다. “사람 속에 들거나 사람을 들이는 일”이 지극하고도 허술하다고 했지만, 이는 수행에 가까운 일이다. 가장 어려운 관계는 가족이다. 시 「핸드폰 목걸이」에서 “팔 남매”를 둔 칠순의 엄마는 자식들이 장성해도 걱정이고, “외로움과 그리움”에 자식들을 호출한다. “머나먼 지구 반대편”(「히오스섬 여인」) 여행길에서 만난 여인에게서 엄마의 모습을 발견한다. 가족, 특히 엄마에 이르러 시인은 세상과의 거리 두기에 실패한다.
세상과의 거리 두기 이면에는 ‘이별과 그리움’, 거대한 슬픔이 존재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울타리처럼 촘촘해”(「윤달」)진 그리움, 조개를 캐는 노부부의 노후와 황혼을 통한 점점 늙어간다는 자각 등은 혼자만의 시간을 불러온다. 세상과의 이격은 “무거워진 겹겹의 기억”(「홍시와 망각과 숭배」)과 “잘 잊으며” 투명해지는 시간이면서 시를 한층 성숙으로 이끄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느새 이리 멀리 왔을까”(이하 ‘시인의 말’), 시인은 자각한다. 곁을 떠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낯가림은 느슨해”지지만, 그리움은 더 무성해진다. 세상과의 거리는 더 멀어질 수 있을까?
---------------------------------------------
김정수 |·1963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사과의 잠』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 경희문학상, 사이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