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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씀 배경
마태복음 3장은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한 기록입니다.
■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사복음서 모두 시작부터 세례요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례요한의 사역이 사람들을 예수께로 이끄는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례요한의 사역을 마태복음 3:3절에서는 이사야 40:3절을 인용하여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3: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인데, 광야는 광야와 같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광야같은 세상에서 “주의 길을 준비(예비)하라” (마 3:3, 마 1:3, 눅 3:4, 요 1:23, 사 40:3), “그가 오실 길을 평탄(곧게)하라 (사 40:3, 눅 3:5), 그리고 회개하라 (마 3:2)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주께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 당시 왕이 행차를 하면 그가 가는 길을 다듬고 정리해야 합니다.
이것이 왕의 길을 예비하고 준비하고 평탄케 하는 것입니다. 높은 곳은 깍고, 깊은 곳은 메꾸고, 돌 같은 것들은 들어내어야 합니다. 왕의 대로가 여기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되기 전에는 왕이 오지도 않지만, 준비하지 않는 자들은 죽임을 당합니다.
→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왕이신 예수님이 오시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평탄케 하고 곧게 하는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곧 마음속에 이루어진 높은 교만의 산은 깍고, 거친 돌과 같은 마음의 상처를 씻어 내고, 죄의 깊은 골짜기를 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로 인하여 유황불못에 들어가 죽임을 당합니다.
■ 세례요한이 왕이신 예수님을 각 사람들의 마음에 오시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로 회개의 물세례를 주어 마음을 평탄케 하고 고르게 하게 하는 사역을 한 것입니다.
율법 613개, 하라, 하지말라의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를 외치고,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왕의 대로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본다면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심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여 그들의 마음을 평탄하게, 곧게 할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치 아무리 길을 곧게 하고 정리해도 완전할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 율법을 적용받고서는 살아나기가 어렵습니다.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최초에 우리 인간들에게 한 가지 계명을 주셨는데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창 2:17), 무슨 계명입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더 나아가 십계명을 주셨지만, 당연히 10가지 계명도 당연히 못지켰습니다. 그런데 613가지를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그래서 예수님께로 나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왕의 길을 만드는 방법이 달라진 것입니다.
마치, 최선을 다하여 정리하고 고르게 했지만 한계가 있었던 그길 위에 예수님의 피가 묻은 레드 카페트를 까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묻은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왕은 그 붉은 카페트로 인하여 거칠고 험한 길은 다 묻혀버리고 왕이 만족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살아나는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온전히 율법을 다 키지지 못하는 죄인일지라도 그 피를 보고 우리들의 죄를 덮고 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외치는 613개 조항의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율법에서 벗어나 복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 세례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가 자기 제자들에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28]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그는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 같은 죄임임을 깨닫게 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구원자 예수께로 나아가게 하는 자입니다 (눅 3:7).
[누가복음 3: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래서 세례요한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다 에수께로 보내져야 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에 머물지 말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제자 일부도 예수께로 갔습니다.
[요한복음 1: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이 두 제자가 아마 안드레와 사도요한일 것입니다 (요 1:40)
이 두사람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에서 예수님께로~~
2. 그래서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입은 옷도 먹는 것도, 사역의 내용도 구약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율법을 수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이끌어 간 모세의 영성, 불을 하늘에서 내리게 하여 태우게 하는 엘리야의 영성이 그대로 세례요한의 영성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쭉정이를 불에 태우는 것과 같이 불에 태워진다는 것을 보면 불의 영성인 엘리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을 ”오리라고 한 엘리야“라고 하고 있어 그가 엘리야의 영성을 가지고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말라기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마태복음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① 예수님은 요한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마 11:13)이라고 하여 구약시대 마지막 선지자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마지막이 되어야 구약시대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시대로 예수님의 신약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헤롯 안디바에게 목 베임을 당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마가복음 6: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막 6:14-29, 눅 9:7-9)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예수께로 온전히 가기 위하여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더 이상 율법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고 마치 율법에는 죽임을 당한 자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갈라디아서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힌 다음에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사역이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세례요한은 감옥에서 목 베임을 당하여 그의 시대를 종지부를 찍습니다.
그가 말한대로 “그는 쇠하여야 하겠고 예수님은 흥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 3:30).
② 예수님은 그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했지만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가 그보다 크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구약 선지자 중에서 유일하게 예수를 본 자요,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했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큰 자이지만, 그러나 예수의 사랑으로 하지 않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모세의 율법, 의로 했기 때문에 신약 백성들보다 작은 자인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율법의 한계, 구약 영성의 한계인 것입니다.
여전히 율법에 잡혀 있고 구약영성에 머물러 있으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책망을 받는 것처럼 책망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영성과 가르침, 율법에 계속 머무르면 안됩니다. 그러면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성과 가르침, 복음으로 넘어와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머무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조선시대에 머무르면 안되는 것과 같습니다.
3. 구약율법, 세례요한은 우리들의 초등교사요, 몽학선생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개역성경에는 몽학선생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시대에 자녀가 6-7세가 되면, 12-16세가 될 때까지 자녀를 시중(의복, 식사, 교양)드는 전문 노예를 말합니다.
■ 3세기 유대인 랍비 심라이(Simlai)는 모세오경 곧 토라에서 “하라”는 명령이 248개, “하지말라”는 명령이 365개, 합하여 모두 613개의 지켜야할 계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 성전 제사와 관련된 계명을 제외하면 297개.
이 율법을 배우기는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초등학교 과정입니다.
이 율법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세례요한은 초등교사, 몽학선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세례요한의 설교도 들어야 합니다. 율법의 단계도 거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의를 알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저는 구약부터 먼저 읽었습니다.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닙니다. 앞쪽에 있으니 그것부터 읽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이 겁이 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서운 하나님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도 필요하고, 세례요한도 필요합니다. 세례요한이 외친 “독사의 자식들”인 것을 깨닫고 죄를 사하시는 주님께 나아오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의 역할이요, 구약의 역할인 것입니다.
■ 그러나 세례요한에 머물면 안됩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율법에, 세례요한에 계속 머물러 있고 복음이 없다면 우리들은 다 죽고 말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출 20:4, 신 5:18), 간음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는데(레 20:10) 오늘날 이 조항으로도 수없이 많이 죽을 것입니다.
“상처는 상처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레 24:20, 신 19:21)하셨는데
그러면 눈이 뽑힌 자, 손목이 짤린 자도 많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지킬 수도 없고, 그대로 따르기도 어렵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거듭 율법으로는 의롭다 할 육체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갈라디아서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 그래서 세례요한의 영성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항상 죄에 사로잡혀 사는 것입니다. 사망이 두려워 벌벌 떨고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정죄를 당하는 삶일 것입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여전히 죄를 짓고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창 3:8), 여전히 가죽옷을 입고 있는 구약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창 3:21), 예수님을 통하여 피로 씻겨진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에서 복음으로, 정죄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세례요한 위에 예수님이 덮혀져야 합니다.
율법에 따라 정죄하는 “의”에 머물지 말고 “사랑과 용서”로 나아가야 하는것입니다. 의 위에 사랑이 덮혀져야 하는 것입니다. 종의 영성에서 아들의 영성으로 나아가야 하며, 사망의 영성에서 생명의 영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무조건 예수님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님의 가르침 사랑과 용서 안에서 율법을 다 이루는 것입니다.
[로마서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4. 예수님은 사랑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눅 16:17)
예수님은 율법을 패하신 적은 없습니다.
<요 8:1-11,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 이야기>
-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예시
[요한복음 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율법과 사랑의 복음이 어떻게 다른지 간음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에 잡혀 있는 다가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간음한 여인을 율법에 따라 돌로 쳐죽여야 한다고 다가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함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 8:6)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어겼다고 할 것이고, 치라고 하면 지금까지 가르쳐 온 자신의 사랑과 용서의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땅에다 손가락으로 무엇을 쓰십니다. 학자들은 다가온 그들의 간음죄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리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마 8:7)고 하시고 또 손가락으로 바닥에 무엇을 쓰시니 늙은 자들로부터 젊은 자까지 다 물러갔다고 했습니다.
늙은 자가 먼저 간 것은 더 많이 먼저 간음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 자는 나중에 간 것은 그나마 적게 나중에 간음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은 늙은 자의 죄부터 기록했을 것입니다.
결국 모두 간음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 없는 자가 없어 물러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다 이런 죄, 저런 죄를 지은 죄인들입니다. 결코 죄 없는 자로서 먼저 돌로 칠 자가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간음한 여인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고, 다시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도 정죄하지 않고 자신이 세상의 빛 되심을 가르치시고 자신이 빛인데 빛안에 거하라, 그러면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요 8:10-12).
여기서 돌로 치는 율법은 간음이 죄인 것을 알게 하였고, 예수님께 나아가면 사랑과 용서의 법으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약의 율법 조항을 오늘날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율법은 신약의 예수님의 사랑의 복음 안에 융화, 흡수, 삼킴, 덧입는 바 된 모습입니다.
율법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마치, 덧입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으로 덮혀져야 합니다.
→ 안에는 의, 율법이 있어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바깥에는 사랑으로 둘러쌓여 드러나는 것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 마치 우리들의 몸이 부활시에 신령한 몸으로 덧입는 것과 같습니다.
원래의 몸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덧입혀져 새롭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5: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 물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세례로 나아가신 예수님>
예수님께 세례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고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마 3:13-16, 막 1:9-11, 눅 3:21-22)
물 세례를 받는 것은 구약율법의 정결예식의 하나입니다(레 8:6, 레 14:8 등)
예수님은 요한에게 자신이 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며 구약적 물 세례를 받아야 하는 당위성을 말씀했습니다.
구약의 의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적 의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의 물세례로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물세례를 베푸니 예수님께 세례를 받으시고 바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셔서 성령세례를 받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세례에서 성령세례로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세례는 세례요한의 영성, 성령세례는 예수님의 영성인 것입니다.
물세례에 머물지 말고, 세례요한, 구약영성에 머물지 말고 / 성령세례, 신약영성으로 나아가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율법의 완성인 사랑으로 나아가시고, 물세례에서 성령세례로 나아가시고, 세례요한의 영성에서 예수님의 영성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
말씀을 맺으면서 예수님의 비유 한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태복음 11: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깨달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잣대로 남을 정죄하고 죽이고자 하나 정작 자신들은 그 율법에 따라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슬피 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로도 나아오지 않고서 천국 잔치를 맛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함에 대한 회개가 없습니다. 눈물이 없습니다.
죄가 죄인줄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죄를 깨달아야 예수님께로 나아올텐데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로도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오늘날 우리들이 세례요한이 되어 세상 광야에서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죄인임을 깨닫게 말입니다. 에스겔처럼 듣든지 아니듣든지 죄인됨을 외쳐야 합니다 (겔 2:5,7,3:11) 그리고 회개를 가르치고 예수님께로 인도해 와야 하는 것입니다.
두 영성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오늘날 사망의 법을 전하는 세례요한도 되시고, 오늘날 생명의 성령의 법을 전하는 바울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